세계 인삼산업계에는 고려인삼 명칭 대신에 중국인삼(Chinese ginseng) 또는 아시아인삼(Asian ginseng) 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우리의 경쟁상대들이 의도적으로 폄하한다고 탓하기 전에 우리 인삼산업(人蔘産業, Ginseng Industry)의 역사를 가감 없이 살피고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는 고려인삼의 뛰어난 가치가 바로 고려인삼의 정체성이고 선조 삼업인(蔘業人)의 땀과 눈물로 이룩한 인삼산업의 역사가 인삼 종주국(宗主國, Sovereign country)의 정당성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는 선조 삼업인이 면면히 이어온 역사의 뒤안길을 따라서 ‘인삼지식여행’을 시작한다. --- p.2
장시간 글 읽기 여행에 참여한 독자들께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유서 깊은 카페 ‘게러웨이 커피하우스(Garraway’s Coffee House) ’를 소개하려 한다.
이 커피하우스는 1651년에 창업한 런던의 명소로 당시 런던의 상인, 왕립학회 회원 등 지식층과 예술인들이 휴식과 담론을 한 곳이다. [그림 1-37]의 커피하우스는 1666년에 인근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축 후 개업하였으며, 1657년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가 구입한 인삼으로 차를 만들어 판매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메뉴판에 ‘China Drink’라고 쓰여 있었다. 동인도회사가 구입한 인삼은 조선의 고려인삼이었다. --- pp.56-57
고려인삼의 자생지는 대략 고조선-부여-고구려의 강토 내에 품질이 좋은 야생삼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동북아 만주 지역 한민족 강토의 지리적, 생태적 여건은 고려인삼의 자생지의 ‘지역편중성’이 원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한반도의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 및 조선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 pp.82
『급취편』에 기록된 삼(參)은 동북아 만주 지역의 원주민이 인삼을 부르던 Gin-seng에서 seng (또는 shen) 발음이 우리 말의 삼 발음과 유사하다. 즉 이를 음차하여 삼으로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 pp.117-118
조선 땅에는 천혜의 천연물자원(天然物資源, Natural Products Resources)인 고려인삼(Korean ginseng)이 전국적으로 자생하였다. 유독 조선 인삼이 최고의 품질과 효능을 발휘하였기에 중국, 일본 및 동남아 국가에서 칙사나 사신을 보내는 목적 중 하나가 조선 인삼을 구하려는 의도였다. 조선 왕실이 명·청에 열심히 보내는 조공사행의 제1물목 역시 인삼이었다. 조공사행에 필요한 인삼과 여행경비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하여 결국 삼상(蔘商)이 재정 지원을 하게 된다. 여기서 관료 집단과 상인이 결탁하는 정경유착이 일어나서 밀무역이 성행한다. 일본에 파견하는 통신사와 개국 초부터 설치한 삼포(三浦) 왜관무역에서도 예외 없이 밀무역이 성행하였으며 여기에도 인삼이 제1무역 품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 독점 사업은 권력층의 부정과 비리로 오염되기 쉽다. 조선 왕실이 인삼을 채삼(採蔘)부터 가공(加工) , 판매까지 독점 관리하였기에 여러 가지 비리와 폐단이 발생한다. 특히 조공사행에서 수많은 폐해가 발생하여 인삼을 공납하는 백성부터 조선 조정까지 고생 한다. 아쉬운 점은 조선 중후기에 인삼을 자유무역 대상으로 하였다면, 삼업(蔘業)이 활성화되어 오히려 국가 재정에 많은 도움을 주고 국부(國富)를 쌓을 기회가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왕조의 사대부가 갖고 있던 상업에 대한 경직되고 고착된 틀 속에서 기대난망(期待難望)이었다. --- p.135
청과의 군신관계 약속을 하고 나서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를 도와준다고 임경업과 약 1만의 군사를 은밀히 명나라에 보낸다. 이때는 이미 북경은 청나라가 장악하였고 명군은 중국 남쪽으로 패퇴해 가는 형편이었다. 중국 땅에서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도가도 못하는 임경업은 청의 포로가 되었고 청에 잡혀간 그의 부인은 자결을 한다. 물론 조선의 수많은 군졸도 희생된다. 그리고 청은 임경업을 치죄하지 않고 조선에 보낸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 군사 파견에 대한 면피를 하기 위해 임경업에게 죄를 씌워서 곤장으로 때려 죽였다. 해괴한 짓일 수밖에 없는 명나라 파병은 임금인 인조, 화친파 최명길, 김자점 등이 지시 하였다고 한다. 숙종 시기에 임경업이 복권되어 충민공(忠愍公) 시호를 받기는 한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조정은 국가 간의 약속도 안 지키며 거짓말을 잘한다”라고 더욱 모멸적 취급을 하게 된다. 즉 언행일치를 하지 않는 국가라는 뜻이다. 병자호란 이후 약 100년 동안 이러한 언행 불일치가 이어지면서 표면으로는 청에 복속하고 뒷전에서는 명나라 속국이었음을 자랑하는 행동을 보이는데 한 가지 예를 소개한다. --- p.231
조선에서 인삼산업(人蔘産業, Ginseng Industry)이 세계 최초로 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첫째, 인공재배법 발명으로 인삼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 홍삼 제조기술의 발명으로 인삼을 장기간 저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발명이 완성되어 사용한 시기가 대략 17세기 중반~18세기 초로 이미 조선과 만주 지역의 야생 인삼은 멸종 위기를 맞은 시기이다. --- p.248
조선은 명나라 측에서 요구하는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증가하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금과 은, 인삼, 매(鷹)와 개를 보내거나 대구포, 새우젓, 조개젓이나 젊은 처녀와 청소년을 보내라는 것이다[이 부분은 뒷부분의 공녀(貢女), 화자(火者) 편에 자세히 기술]. 그리고 칙사가 오는 경우에도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였다. 왕과 고위 관료가 영접하였고, 잔치와 예물은 칙사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준비해야 했다. 특히 칙사의 대부분이 조선 출신 환관이었기에 이들에게 조선 내 친인척에 관직을 주고 경제적 보상을 해야 했다. 이러한 비용 부담이 점점 증가하면서 재정 압박을 받게 된다. --- pp.323-324
그간의 정동의 처사를 보고 당연히 언론삼사인 대간, 사간 등이 벌떼처럼 비난 상소를 하는데 정동이 황제의 칙명을 빙자하여 제 스스로 꾸민 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성종도 정동의 속마음이 음험하고 간사하다는 언급을 여러 차례 거론했지만 삼사의 상소에 대한 답은 간단하였다. “과도한 예물 요구를 비롯한 그간의 정동이 행한 일들이 명 황실의 고명이 아니고 개인의 짓이라고 한다면 정말 그런지 아닌지 누가 명나라 황실에 가서 확인할 것인가?”라고 한다. 물론 어느 누구도 북경에 가서 확인하겠다는 삼사 관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임금 성종은 “세상에 정도(正道)도 있지만 또한 권도(權道)도 있다.”라고 마무리를 한다. 성종 생전 내내 조선과 명나라 관계에서 정동이 존재했던 이유는 서로 공생(共生) 관계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선의 활 제작에 꼭 필요한 물소 뿔(弓角)을 명나라에서만 구할수 있는데 명 황실은 수출을 금하였다. 조공사행에 따라 붙은 상인이 궁각을 몰래 사서 가져오려다가 붙잡혀서 매우 어려운 상황도 벌어졌다. 이를 해결해 준 이가 바로 정동이다. 그리고 성종이 연산군 어머니인 윤씨를 폐비하였을 적에 윤씨가 독질(毒疾)에 걸려 불가피하게 폐비를 하였다고 둘러대어 무사히 넘어갔고 연산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 p.352-353
삼업의 원료가 되는 인삼 중 야생삼은 이미 영조(1724~1776) 시기에 멸종하였다. 다행히도 조선 삼업인의 지혜로 인공적으로 인삼재배할 수 있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원료 공급은 가능하였다. 그리고 생산된 원료 인삼, 즉 수삼(水蔘)을 2차 가공한 제품이 백삼(白蔘, 乾蔘)과 홍삼(紅蔘)인데 백삼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과 중국, 일본 등에서도 기술적으로 가공할 수 있었지만 홍삼 제조 기술은 조선 삼업인이 오랜 시간을 두고 기술 개발을 하여 홍삼 제품화에 성공한 결과(중종~선조~정조)로 소량이지만 조공사행에 제공한 시기가 정조(1776~1800) 때이다. 인삼 인공재배와 홍삼제조 기술력을 확보한 조선의 삼업인이 이를 산업화하기 위하여 원료 생산에 걸리는 최소 5~6년의 재배 기간에 투자할 충분한 자본과 이를 제품화하는 데 필요한 자본이 구비되어야 한다. 즉 기업화가 가능할 정도의 자본 확보가 선결되는 것이 필수 조건인데 이미 이러한 조건이 19세기 초반에 성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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