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도 배우고 싶다”
작정하고 학교를 기웃거리기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 학교를 방문해서 수업을 보고 교사들에게 수업 연구를 제안했을 때가 떠오른다. 많은 교사가 수업 공개에 대한 부담을 호소하며 거부감을 표시했다. 어떤 학교에서는 ‘책장사’로 오해받아 쫓겨나기도 했다.
이렇게 높고 굳게 닫혔던 학교의 문이 열리고 교실이 열렸다. 그리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많은 선생님이 수업을 하면서 행복하다고 한다. 아이들이 학교가 좋다고 한다.
그동안 전국의 학교 현장을 돌며 수업 연구를 하면서 가장 크게 느끼고 배운 것은 ‘선생님도 배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한 명의 아이도 배움에서 소외되지 않는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질 높은 배움을 제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쯤이면 수업으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까?’ 많은 교사가 고민하지만, 그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교사에게 수업이란 지식을 전달하는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수업이란 교사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 학교를 어떤 곳으로 받아들이며 수업을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나아가 교사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배움의 공동체’는 이런 교사들의 고민을 학교 안에서 그것도 수업 속에서 동료와 함께 해결해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매뉴얼화 된 답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고민이 바로 교사의 삶이고 그 고민이 어쩌면 답이기 때문이다. ---「시작하는 글」 중에서
잠자는 교실에서 희망의 교실로!
행복한 수업, 성장하는 내일을 꿈꾸는 교사들을 위하여
행복한 수업에는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중?고등학교는 진정성이 아이들에게 전달되는가, 마음이 전달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진정성이 전달되면, 아이들은 반드시 달라진다.
교사가 6개월 동안 목소리를 낮추고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면 된다. 아이들의 귀에 쏟아 붓던 말을 줄이는 습관부터 고치는 것이다. 물론 힘들지만 그 과정을 6개월만 견뎌내면, 아이들의 12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교사의 진정성 담은 6개월, 이것이 교실을 바꾼다.
단순히 수업 기술을 터득하려고 하면 핵심에서 멀어진다. 나를 바꾸는 것,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 이것이 본질이다. 교사로서의 마음과 삶을 다스리는 6개월, 그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초등학교 1학년 국어 수업에 들어갔을 때다. 이중 모음을 순서에 맞게 정확하게 쓰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글자는 ‘왜’ 자이다. “왜, 왜”라고 소리 내며 한획 한획을 적다 말고 한 아이가 목소리를 냈다. “참외는 아닌데.” 선생님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처럼 아이가 ‘왜’라는 이중 모음의 글쓰기에서 ‘왜’와 ‘외’의 차이를 발견해내듯이, 선생님이 던져주는 범위에서만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배움을 구성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서다. 또한 정해져 있는 일정한 기능과 지식을 저장하는 것이 배움은 아니다. 배움은 사물이나 사람을 매개로 하는 활동을 통해 의미와 관계를 구성한다. 초등학교 1학년이 ‘왜’라는 글자를 쓰는 활동을 통해 거기에서 또다른 관계를 발견했을 때, 의미와 관계를 구성한 것이다. 바로 그게 배움인 것이다.
교사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배움을 발견한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지적 호기심까지 북돋울 수 있다. --- 「1-1 교실의 주인공은 학생이다」 중에서
배움의 공동체는 매뉴얼이 아니라 철학이다. ‘한 명의 아이도 배움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질 높은 배움을 보장하자’는 기본 철학을 중심으로 교사가 수업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배움의 공동체 수업은 틀에 박히지 않고, 교사와 학생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사토 마나부 교수는 ‘배움의 공동체는 다음 3가지 철학적 원리에 의해 운영된다’고 한다. 첫째는 공공성(public philosophy)이다. 학교는 공공적인 사명과 책임에 의해 조직된 장소이고, 교사는 그 공공적인 사명과 책임을 맡고 있는 전문가이다. 둘째는 민주주의(democracy)다. 학교 교육의 목적은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있고, 무엇보다 학교가 먼저 민주적인 사회 조직이어야 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교육 철학자 존 듀이가 정의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말한다. 민주주의의 원리로 조직된 학교에서 학생, 교사, 학부모는 각각 고유한 역할과 책임을 지고 학교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셋째, 탁월성(excellence)이다. 가르치는 활동, 배우는 활동은 모두 탁월성의 추구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탁월성이란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최고를 추구한다는 의미다. --- 「1-1 교실의 주인공은 학생이다」 중에서
배움은 학습자가 혼자 도달할 수 있는 수준과 교사나 친구의 도움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준 사이에서 일어난다. 모르는 것을 함께하면 배울 수 있는데, 많은 학교가 수준별 수업으로 아이들의 수준을 나누고 있다.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섞어놓으면 잘하는 아이가 손해를 보고, 수준별로 하면 성적이 오를 거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에서 수준별 수업에 의해 학력이 향상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학교의 경우에도 학력이 상?중?하로 나뉜 어느 집단에서도 혼성 학급보다 학력이 향상된 조사 결과는 없었다.
지금 교과 교실제를 하고 상?중?하로 나누면서 교사들의 고민이 큰데, 배움의 공동체는 수준과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모둠을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잘하는 아이가 없는 모둠에서는 배우는 게 있겠느냐고 하지만, 이때도 해결 방법은 있다. 우선 못하는 아이가 일등에게 질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등이 설명하면 못 알아듣지만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잘하는 친구의 말에는 더 귀 기울이고 의존한다. 그리고 모둠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다른 모둠을 살피도록 연결해 줄 수 있고, 선생님이 살펴주면 되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 --- 「1-2 서로 배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가 함께 성장하다」 중에서
“배움의 공동체에서 나쁜 점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대해 호평 중학교의 한 학생이 재미있는 대답을 했다. “잘 수 없어서 너무 싫어요.” 모둠을 하면 도저히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 가보면 책상 배치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교실은 일제식으로 일렬로 앉아 있고, 어떤 교실은 ㄷ자 또는 모둠으로 앉아 있다. 그런데 교실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잠자기 좋은 교실이 바로 일제식 배치라는 것이다.
왜 ㄷ자로 만드는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교사가 많다. 아이들이 서로 보고, 잘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하다보니까 교실의 공간에서 ㄷ자가 가장 이상적이었다. 앞 옆 뒤 모두 볼 수 있는 구조여서 실제로 아이들이 덕을 많이 본다. 선생님이 질문했을 때 친구 것을 베낄 수도 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한다. 학기마다 ㄷ자형 수업에서 제일 좋은 점을 말해보라고 하면, “친구에게 내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기가 쉽다”라는 대답이 첫 번째다. --- 「1-3 배움의 재구성, 아이들이 달라진다」 중에서
교사로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전문가의 위치를 찾으려면 ‘교사 문화’라는 고정된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많은 사람과 만나고, 이질적인 문화를 공유하고, 외부와 끊임없이 관계 맺어야 한다. 수동적으로 자기방어에 급급한 교사가 아니라, 교실을 열고 끝없이 배우고 소통하는 프로그램과 수업을 만들어가야 능동적인 교사가 될 수 있다.
또한 전문가라면 끊임없이 수업 임상을 통해 역량을 쌓아가야 한다. 배움의 공동체에서는 수업 임상이란 말을 쓰는데, 의사가 임상 연구하듯이 교사도 수업 임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의사는 병상 옆에서 성장하고, 교사는 책상 옆에서 성장한다.
의사들이 환자의 증상을 보고 사례 연구를 하며 전문 역량을 쌓듯이, 교사도 수많은 수업 사례를 연구하며 전문 역량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사들은 ‘교실과 아이들’이라는 임상의 천연 자원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수업에 관해 책을 찾아가면서 공부했다. 실천의 지가 아닌 이론의 지에 매여 있어서다. 본인이 임상 전문가이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자산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많은 학교에서 교사들이 비디오로 수업을 찍고, 이 기록을 활용해서 수업의 다채로움과 깊이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수업의 사례 연구이며 임상 연구다. --- 「2-1 가르치는 전문가에서 배우는 전문가로」 중에서
수업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이다. 그 교재에서 아이들과 무엇을 중심으로 추구할 것인가. 그 주제를 수업 과정에서 얼마나 깊이 있게 다루는가에 따라 배움의 질이 결정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과정을 조직하는 것이다. 아무리 의미 있는 주제라도 풍부한 추구와 표현으로 조직하지 않으면 빈약한 배움이 된다. 예전에는 수업 계획이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수업 전에 다 결정하고 준비해 놓고 거기에 맞게 달성해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수업을 해보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다. 수업은 진행되는 과정에도 구성이 되기 때문에 단순하게 만들면서 양을 줄이고 수준은 높여야 한다.
수업 디자인에서 단계를 나눌 때 3단계 이상이 되면 힘들고, 두세 단계가 가장 적절하다. 3단계라면 홉(hop)-스텝(step)-점프(jump)로 구성한다. 홉은 무용을 하기 전에 발돋움하는 것과 같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인지하고 준비하는 단계이다. 준비가 되면 일단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홉과 스텝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을 활용하고 심화시키며 점프한다. 이러한 홉-스텝-점프를 통해 기초의 공유 과제와 점프 과제를 제시하고 이를 모둠에서 함께 하도록 조직하는 것이다. --- 「2-3 수업 디자인Ⅰ: 교과서를 활용한 교재 연구」 중에서
고등학교 수업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일까. 배우기를 포기하고 엎드려 자는 아이가 많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을 보는 교사들의 마음은 안타깝고 참담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자는 아이들은 정말 배움을 포기한 걸까? 아니었다. 수업을 바꾸자 아이들이 달라졌다. 눈이 반짝였고 배우려 들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아이들은 수업에 반응했다.
아이들은 배움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배워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어른들이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눈여겨보지 않아서일 뿐, 아이들은 배움에 대한 열망과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배움의 공동체를 추진하면서 확인한 것이 고등학교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초?중?고등학교 가운데 배움의 공동체에서 제일 성공적인 곳이 바로 고등학교다.
흔히 입시로 경쟁에 익숙한 아이들이라 함께 배우는 것이 가장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곳이 고등학교인데, 가장 잘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등학생들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에 비해 성숙해서 사람과 관계 맺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묻고 답하는 게 잘되기 때문이다.
---「3-2 고등학교: 엎드려 자는 아이가 없는 교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