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을 통해 영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가 내 자신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인간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법이다. 인간은 인간이 되기 위하여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달팽이는 달팽이가 되었다. 박쥐는 박쥐가 되었다. 인간은 인간이 되었다. 참나무는 참나무가 되었다. 청량산은 청량산이 되었다. 달팽이는 달팽이를 알고 있을 것이고, 박쥐는 박쥐를 알고 있을 것이다. 참나무는 참나무를 알고 있을 것이고, 청량산은 청량산을 알고 있을 것이다. 돌멩이는 영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영물이다. 영물일 것이다. 영물이란 자기 자신의 품안에 영혼을 끌어안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물은 제 혼자 편협하지 않으며, 제 홀로 독선적이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혼은 어디 있는가. 영혼은 어떤 것에 혹은 어떤 곳에 갇히지도 않는다. 달팽이의 영혼을 보라. 박쥐의 영혼을 보라. 참나무의 영혼을 보라. 청량산의 영혼을 보라. 영혼은 철두철미 자기 자신을 자각한다. 영혼은 빛이기 때문이다. 빛은 양의 모습을 띤다. 모든 물질 역시 빛을 숨기고 있다. 이 숨김[즉, 음]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존재의 틀인 것이다. 물질을 보라. 물질의 숨김을 보라. 물질은 영도의 자리에 숨어 있다[즉, 물질이라는 것은 실은 속이 텅 빈 쭉정이일 뿐이다]. 불교의 우주관으로 본다면, 그것들은 공기층에 깔려있는 풍륜의 형상일 뿐이다. 우리는 왜 인간인가. 우리네 삶이란, 따지고 보면 물질의 자리로 내려온 허공인 셈이다. 형상세계의 숨구멍을 들여다 보라. 우리는 물질의 겸허함을 보고 다시 깨닫게 된다.
--- 「제1장 : 영원은 없다. 잠깐일 뿐이다」 중에서
정신이 맑으면, 마음도 맑아진다. 내 마음이 맑아지면, 나는 천상의 음악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천상의 음악은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양을 띤다. 이 노래의 모양을 보자. 아래는 소슬바람이 불고, 위로는 우레가 치솟는다. 주역은 이 움직임을 가리켜 ? 뇌풍항이라고 불렀다. 항은 ‘항상’ 항恒이다. 사랑은 그러니까 하늘로 날아오르는 우레소리를 닮는다. 하늘의 정체를 보라. 물질의 정체를 보라. 하늘의 움직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혜택을 준다. 물질의 움직임 또한 누구에게나 평등한 혜택을 준다. 그것을 일컬어 천지자연의 평상심이라고 부른다.
--- 「제2장 : 세상살이는 조금 흔뎅거려도 괜찮다」 중에서
말이 많으면 자주 궁색해진다. 속을 비우고 그 텅 빈 중을 지켜가는 것만 못하다(다언삭궁 불여수중 『노자』 5장). 말이 많으면 왜 궁색해지는가. 말이 많으면 기다림이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물은 흐른다. 시간은 쌓인다[즉, y축]. 연못은 고인다. 시간은 행동이었다. 시간은 업적이었다. 공간은 고여 있다. 연못은 공간이다. 공간은 그릇이었다. 그런데 시간은 공간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마침내 시간과 공간은 한 몸으로 뭉쳐버린 것이었다. 공간은 자신의 몸속에 시간을 쌓아둔다. 이때부터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 시간은 벽돌처럼 쌓이게 된다. 주역은 이 모양[즉, ? 연못에 담긴 ? 물]을 보고 ? 수택절이라 했다. 그릇에 행동을 담아놓은 것을 주역은 절[즉, 예절]이라고 불렀다. 음[즉, 공간]은 양[즉, 시간]을 등에 지고 있다[즉, 음부양]. 음부양이란 무슨 말이었던가. 음[즉, 몸]은 양[즉, 정신]을 제 품속에 붙잡아 앉힌다. 그렇다면, 과거로 흘러들어간 시간은 ‘소멸된’ 시간이 아니다. 공간 속에 담긴 시간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릇 속에 담긴 행동은 부스러지지 않는다[이를 가리켜 힌두교에서는 다른 말로 업 Karma라 했다]. 그러기에 생명 속에 깃든 단 한 토막의 시간은 얼마나 투명하고도 맑은 영명체이랴. 그토록 청정한 시간은 돌멩이에게도 붙어있고, 빗방울에게도 붙어있다. 그것들 말고 우리는 또 무엇을 만나보아야 할 것인가. 누구를 만나보아야 할 것인가. 운명인가. 운명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 운명은 내 몸에 쌓인 시간일 뿐이다.
--- 「제3장 : 이 세상에는 무(無)는 없다」 중에서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잘하는 행동은 궤적을 남기지 않는다. 정말로 잘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않는다. 정말로 잘하는 셈은 주판을 쓰지 않는다. 정말로 잘 닫아 놓은 것은 빗장을 쓰지 않아도 열 수가 없으며, 정말로 잘 묶어 놓은 것은 끈을 쓰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선행무철적 선언무하적 선수불용주책 선폐무관건이불가개 선결무승약이불가해 『노자』 27장).
--- 「제4장 : 존재는 존재 없이도 존재한다」 중에서
불꽃은 출렁거린다. 오탁(汚濁)을 씻어내는 시간 역시 출렁거린다. 시간의 몸놀림 속에는 회한과 불운이 함께 움직인다. 서합괘의 공리적인 은유는 이렇게 말한다; “족쇄를 채워 발을 없애는 단계[즉, 구교멸지의 초구]가 있고, 살을 물어뜯어 코를 없애는 단계[즉, 서부멸비의 육이]가 있다. 그런가하면, 말린 고기를 씹다가 독을 만나는 단계[즉, 서석육 우독의 육삼]가 있고, 마른 고기를 씹다가 금화살을 얻는 단계[즉, 서간치 득금시의 구사]가 있다. 또 마른 고기를 씹다가 황금을 얻는 단계[즉, 서간육 득황금金의 육오]가 있고, 형틀을 썼다가 귀가 떨어져나가는 단계[즉, 하교멸이의 상구]가 있다”. 여기 보여주는 누진의 행세는 결국은 부박한 지엽말단에 휩쓸리지 않고 화뢰火雷의 위엄[즉, 천리의 뜻]을 쫒아야 하는 그 존양(存養)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내 몸은 결코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이처럼 부패와 악행은 단번에 소멸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굴곡과도 같이 복잡다단한 변형들로 굴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악행은 관념의 가시덤불 속에서 불가시의 적의들과 함께 공생한다. 분노의 감정이 없는 자는 유약한 나머지 수치심도 제대로 거두지 못한다. 사람들은 왜 악을 삼키고 있는가. 당분처럼 입에 착 달라붙기 때문이다.
--- 「제5장 : 시간은 마음의 품물(品物)이다」 중에서
비엔나필의 감흥[즉, 취합의 결정체]을 들어보라. 오케스트라는 췌괘의 합성이 가장 아름답게 방출되는 비방이다. 큰일을 하고자 할 때는 췌의 비방을 불러들여야 한다. 물론 그 비방이란 팔괘의 자연물들이다[즉, 하늘 (? 건)·연못 (? 태)·불 (? 리)·우레 (? 진)·바람 (? 손)·물 (? 감)·산 (? 간)·땅 (? 곤)]. 곡식의 힘이 그런 것이고, 바다의 힘이 그런 것이고, 사막의 힘이 그런 것이고, 숲의 힘이 그런 것이고, 책의 힘이 그런 것이고, 국가의 힘이 또한 그런 것이다. 췌괘초육의 효사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을 갖고 있더라도 결말은 좋지 않다. 어지러움에 휩쓸릴 것이다. 여기저기 호소해보아도 그들은 비웃는다. 눈치 볼 것 없이 가던 길을 가라”(유부 부종 내란내췌 약호 일악위소 물휼 왕 무구). 대개는 초지일관이 만복을 부른다.
--- 「제6장 : ‘지금’이 초월이다」 중에서
은둔은 현실로부터의 단절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삶에서 현재의 순간들을 제외해버리면 무엇이 남겠는가. 거기 어떤 약속이 남아 있겠는가. 약속은 어떤 경우로든 현재에 대한 결속을 의미한다. 미래를 예비하는 약속일지라도 그것은 곧 현재를 보완해두려는 기대일 뿐이다. 은둔은 바로 이 현재를 바로잡는 위의인 것이다. 은둔이야말로 내 자신이 내 자신에게 새로운 약속을 제안하는 제의였다. 그것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정신은 희망에 대한 자각이다. 왜 그런가. 나는 내 자신에게 종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열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은둔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 「제7장 : 하늘도 내 것이 아니고 땅도 내 것이 아니다」 중에서
시간은 언제 나타나는가. 시간의 물리적 표상은 결여와 소멸의 표적들 앞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왜 도덕적인가. 도덕은 이 결여와 소멸의 유비들이다. 불멸의 꿈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이와는 반대로 잉여는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므로 완숙을 방해할 뿐 아니라 총체적으로는 부패를 불러오는 화근이 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불운을 미연에 방지하면 얼마나 좋으랴. 기제괘 육사의 효사는 이렇게 말한다; “배의 밑바닥이 새고 있다. 걸레조각을 들고 종일 경계해야 한다”(유유의여 종일계). 위험은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돌발한다. 위험에는 이연移延이 없다. 예측이 필요할 때다. 앞에서 말하는 의여[즉, 걸레조각]는 그 예측[즉, 미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들이 그동안 간과해온 것들도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미연이었던 것이다. 일상사 예측보다도 더 좋은 경계가 어디 있겠는가. 저것보라. 등 뒤에서 매미를 쏘아보는 당랑[즉, 사마귀]이 있지 않은가. 당랑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놈은 화가 치밀게 되면 자신이 깔려 죽을지도 모르는 수레바퀴 앞에 턱 버티고 있지 않는가(여부지부당랑호 노기비당거철 부지기불승임야 『장자』 「인간세」). 상대편의 위의 앞에 나설 때는 조심성 있게 그를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 아첨은 비굴해져서 나쁘고, 오만은 방자해져서 나쁘다. 노여운 생각이 하늘을 찌르게 되면 사랑하는 마음이 소멸된다.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의유소지 이애유소망 가불신야 『장자』 위와 같은 편).
--- 「제8장 : 실재가 관계의 산물이듯 주역은 공간 안에서 천하를 건너다닌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