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여러분에게 독서가 얼마나 즐겁고 훌륭한 유희활동인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다만 이 책을 읽고 계신 분들은 이미 책의 재미를 알고 계신 분들이리라 짐작하므로, 이 장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책의 재미를 설득할 때 논거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출판계가 살아나고 종사자들의 처우가 개선되고 더 질 좋은 책이 나오고 우리는 더욱 즐거운 독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 장은 여러분에게 영업을 권유하는 장이다. 독서를 취미로 두는 이들은 영업과 거리가 먼, 내향적인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깨부숴주시면 좋겠다(물론 이 책을 쓴 사람은 전형적으로 내향적이다.).
--- p.51
이상한 일이다. 게임도 TV도 컴퓨터도 핸드폰도 한참 하면 공허한데, 책은 그렇지가 않다. 하루 종일 컴퓨터만 하다가 침대에 누웠을 때, 침대에 누워 한참동안 핸드폰을 만지다가 화면을 껐을 때, 조용한 마음에 이상하게 들어차는 그 허전한 느낌을 여러분도 알 것이다. 어딘가에 말을 걸고 싶고 무언가 충만한 일을 하고 싶을 때, 책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여러분이 손만 뻗는다면.
--- p.61
대강의 흐름은 이렇다. 사실 이 자리에서 내가 읽었던 책을 모두 나열할 수도 없고, 나열해봤자 별 의미도 없다. 중요한 건 책이 나의 피와 살이라는 것이고, 인생의 삼할 정도는 책장을 넘기는 데 썼다는 것이다. 이할 정도는 책장『에세』를 읽는 동안 나는 나를 여러 번 뒤집어야 했다. 지금껏 알고 느끼고 확신했던 많은 것을 버리고 수정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지금의 나를 만나게 된 것을 진정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나를 발견한 것이 기쁘고 반갑다. (…) 왜 몽테뉴를 알아야 하냐고 내게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꼭 그를 알 필요는 없다고. 몽테뉴는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럴 필요는 없다. 몽테뉴 이전에 고대 그리스 로마의 숱한 사상가들이 이미 답을 찾아놓았다. 나는 그저 그 많은 사상가 중에 몽테뉴를 만난 것뿐이다.
특별한 게 없는데 왜 그를 소환하냐고? 사실 나는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답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다만 명심하지 않는 것이다. 명심하지 않기에 계속해서 답을 찾는 것이다. 고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에세』를 그런 고전 중의 하나로 읽으면 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철학자들에 대한 몽테뉴의 비판은 “철학자들은 죽음과 죽음에 관한 오랜 예측 때문에 두 번 죽음을 맞이한다.”는 표현에서 더욱 정확히 드러난다. 오히려 자신의 이웃들인 농민들은 숨을 거둘 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데, 이는 본성이 그들에게 죽어갈 때밖에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도록 가르쳤기에 그들의 행동이 더 올바른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에 무지한 농민들이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점잖게 죽음을 해치운다고 일갈하는 것이다. 몽테뉴는 마지막 순간에 자연이 얼마나 순리대로 그 순간을 잘 처리해주는지 확신했다. 그러니 자신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대부분의 철학자가 평생을 그러는 것처럼 살아 있는 동안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압도당하지 말라고 간절히 당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으니 제발 존재만 하지 말고 살라고, 죽음에 대해서는 걱정이 아닌 대비가 필요할 뿐이며, 그 대비를 통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결정대로 그저 열심히 살면 된다는 진심 어린 충고를 하고 있다.
--- p.37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니 어느 날 드는 생각이 고통으로 가득했던 불행의 시간이 결과적으로 나에게 나쁘기만 했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불행한 이유는 불행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부정적 의미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나 역시 고통을 극복해야만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고 행복은 좋은 것, 불행은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인생을 바라보았다. 소크라테스의 말마따나 불행과 행복이 서로 꼬리물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몽테뉴도 이 말에 동의하며 “웃음의 절정에는 울음이 섞인다.”고 하지 않았나.
--- p.64
나는 왜 성공하고 싶었나. 성공은 누구나 꿈꾸는 것일지도 모르고 성공이 나쁜 것도 아닌데 나는 어째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를 성공 그 자체보다 가벼이 여겼나. 대체 성공이 무엇이기에. 성공이 뭔지,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를 찾기 어려운 것은 역으로 일상의 삶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일 수 있다. 평범함을 규정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나에게 내 자아는 공적公的 자아, 사회적 자아였을 뿐 그냥 나 자신의 삶, 어느 누구의 삶이 아닌 나만이 살 수 있고 나만이 살아내야 하는 삶에 대한 자각과 그런 자각으로 인해 형성되는 사적私的 자아가 없었다. 일과 직업으로는 나를 규정할 수 있었지만 다른 무엇으로는 나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빈껍데기로 살아왔더랬다.
--- p.77
몽테뉴는 간절히 이야기한다. 그 무엇보다 ‘나’로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정을 보살피는 일이 국가를 다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 모두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전자를 더 강조하는 말이라고 봐야 한다. 그가 알렉산드로스와 소크라테스를 비교하며 “세상을 정복하는 일”보다 “타고난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무게를 싣는 것을 보면 그렇다. 몽테뉴를 만나기 한참 전이었지만 나 역시 온전한 나만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몽테뉴의 힘을 빌려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사적 자아를 정성스레 보살피라고 말이다. 사적 자아가 강한 자들은 평범함과 범속함 속에 삶의 진리와 변치 않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다시 말해 지체 높은 사람들 속에서, 혹은 특정한 곳에서 그것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p.84
몽테뉴는 은퇴 2년 뒤부터 본격적으로 『에세』를 쓰기 시작했다. 집필의 목적이 한가함을 극복하고, 자신의 몽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아 나중에 그것으로 자신을 탓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엉뚱하고 우습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작의 의도와는 달리 몽테뉴는 집필 과정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는 힘을 키우게 된다. 자기 생각, 느낌, 모든 자연현상, 사람들의 행동과 말, 숨겨진 심리 등 몽테뉴의 눈에 가볍거나 무의미한 것들은 없었다. 주의를 집중해 살펴볼수록 세상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했다. 『에세』가 흥미로운 이유는 몽테뉴가 세상을 복잡하고 다양하다고 여기면서도 그 안에 담긴 진리는 단순하다고 깨닫게 되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록에 계속해서 내용을 추가하되 이전의 기록을 수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술하다 보니 독자로서는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때때로 내용이 모순되거나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달라 갈피를 잡기 어렵지만 사고의 흐름만큼은 꽤 흥미롭다
--- p.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