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운 삶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아름답다. 내남 없이 한데 어울려 구김 없이 쾌활하고, 세상의 모든 생명에 따뜻한 연민을 품는다. 도통 낭비란 걸 모르는 검소하고 절제된 일상의 연속이다. 바지런히 몸뚱이를 부려서 자식들을 건사하고 들녘의 푸르름을 지켜온 당당하고 떳떳한 몸짓이다. 돈으로 맺는 거래에는 서투르고 따순 인정을 주고받는 데만 고수인 사람들의 습속이다. 허장성세 따위로 현혹하지 않고 알토란 같은 속내만을 드러낼 줄 아는 담박한 성정이다. 뉘라서 촌사람들과 이른바 촌스러운 것들을 업신여길 수 있으랴. 이제라도 ‘촌스러움’의 미덕을 회복해야만 끝없는 욕망의 전쟁터가 된 우리의 삶터에 사람의 온기가 돌고, 온갖 개발의 삽날에 찢기고 망가지는 산천도 가까스로 보존할 수 있지 않을까.
--- p.29, 「촌스러운 것들을 위한 변명」 중에서
우리말이란 뿌리는 하나일지 모르지만, 이리저리 갈래를 치고 천만 개의 잎과 꽃으로 무성하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생명체와 같다. 지역마다 환경과 생업, 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의 표현들이 생성돼 유통되고 대물림되어온 것이다. 전라도말 역시 누대에 걸친 삶과 문화의 축적이요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이 투영된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섬사람들은 물고기나 해초와 관련한 풍부한 어휘들을 만들어내고, 산골에서는 온갖 풀과 약초들의 생김이나 색깔을 세세하게 구별하는 표현법을 발전시켜왔다. 특히 산과 들, 강과 바다, 갯벌에서 나는 오만 가지 식재료들로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들면서 전라도말의 풍성함을 더했다. 무엇보다도 전라도말에는 공동체를 유지해온 미덕이 펄펄 살아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뒷전에 밀리면서 상대적으로 공동체의 원형을 유지해온 마을이 많기 때문이다.
--- p.63, 「전라도말에 담겨 울리는 것은」 중에서
아짐은 왼손엔 주걱을 들고 솥 안의 죽을 저으시고 오른손에 든 뒤지개로는 전을 부친다. 전라도 시골 엄니들의 밥상을 탐해오는 동안 처음 보는 진풍경이다. 뽀로록뽀로록 뜨거운 방울이 솟구치는 솥 안으로 당근 조각, 반지락 속살 한 움큼, 그리고 자잘하게 칼질한 인삼뿌리가 뒤따라 들어간다. 죽솥이 아니라 보약단지다.
“오메오메, 상다리 뿌러지겄네. 완전히 잔칫상이네요.”
일일이 헤아리기가 송구할 지경이다. 반지락죽, 반지락회평, 반지락고추볶음, 삶은 반지락, 반지락무나물, 반지락 호박나물, 반지락전, 반지락떡국, 백합찜, 삶은 백합, 콩나물잡채, 게무침, 조기찜, 물김치, 배추김치. 부엌에 들어오신 지 한 시간 남짓, 아짐의 밥상은 마술처럼 채워진다. ‘이런 호강을 혼자 누리다니….’ 음식 이야기를 잡지에 연재하는 동안 늘 부러움을 토로하던 독자들이 급기야 시샘과 미움으로 바라보겠구나 싶어 더럭 겁이 난다.
--- p..144~146, 「반지락으로 누리는 수십 가지 호강」 중에서
흔히들 ‘음식은 손맛’이라고 한다. 처음엔 그저 ‘엄니들의 손끝에서 맛이 나온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엄니들이 맨손으로 식재료를 매만져 양념과 버무리고 비벼대는 사이에 배어드는 손맛이려니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한 분 한 분, 이런 요리 저런 음식들을 만나면서 ‘손맛’의 진정한 의미를 짐작하게 되었다. 물론 능숙하고 정성스런 손끝에서 음식의 맛이 살아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손’은 단순히 조리하는 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뭍에서, 강에서, 갯벌과 바다에서 건져 올린 원재료가 사람의 입에 들어가기까지 거치는 무수한 손놀림을 모두 합산한 것이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아! 음식 하나에 저토록 많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니!’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게다.
--- p.195, 「음식은 손맛이요 이야기의 맛」 중에서
옥룡사지를 빠져나와 근처의 도선국사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초입에 할머니 몇 분이 나와 좌판을 열었다. 옥룡사지를 찾아오는 외지 사람들은 꼭 들렀다가 가는 이름난 마을답게 제법 장의 분위기가 느껴지고 거래도 꽤 진진하다. 잘 말린 고사리와 토란대, 올망졸망 호박, 닭똥 묻은 달걀에 감과 밤, 팥, 그리고 잰피(초피)까지 그릇그릇 담겨 조르라니 펼쳐졌다. 자그마한 시골 장터 한쪽을 뚝 떠다가 그대로 옮겨놓은 듯 정겨운 풍경이다. 무공해니 유기농이니 따질 것도 없이 할매들 심성만큼 착한 먹을거리가 싸고 푸지다. 게다가 맑은 샘물은 욕심껏 채워가도 거저다. 할머니들은 긴긴 여름날 잡초를 매느라 땡볕에서 땀을 쏟고, 비탈진 산속을 기어다니며 나물을 채취하던 몸공을 셈해 가격을 올려붙일 줄 모른다.
--- p.220, 「백운산 자락에 선 옥룡사 부처님」 중에서
진도는 ‘놀 줄 아는 사람들의 섬’이다. 일하면서 놀고, 쉬면서 놀고, 기뻐서 놀고, 슬퍼서 논다. 논에서도 밭에서도 갯바닥에서도 바다에서도, 손발을 노대며 입을 쉬지 않으니 노래로 노는 게 진도의 삶이다. 오죽하면 초상집에서 재담을 하고 소리 공연으로 날밤을 지새우겠는가. 진도에서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노래와 춤을 연마해온 ‘프로’가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자연스레 예술로 풀어내온 무수한 ‘아마추어’들을 만난다. 그 아마추어들의 기예가 이른바 전문가들을 압도하는 것을 보는 감격을 누릴 때야말로 진도 여행의 짜릿한 진수를 만끽하는 게다. 수수만년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기어이 서럽고도 질긴 역사를 이어가는 이 땅 민초들의 생명력, 그 삶과 문화의 끌텅(깊은 뿌리)이 곧 진도라는 이름 안에 옴싹 들어있는 것이다.
--- p.239~240, 「진도 엄니 소리로 한세상 구성지게 꺾이고」 중에서
젊어서는 자식들 ‘멕이고 입히고 갈치려고’ 억척스레 일 욕심을 부렸고, 장성한 자식들이 제 앞가림을 하는 노년의 겨울날엔 스스로 떳떳하기 위해 일구덕으로 들어가신다. 마침내 베고 캐고 훑고 추려 나누고 입에 넣어줄 때까지 할매들은 이 땅에서 가장 긴 시간 일을 하는 노동자다. 노동만이 명징한 삶의 증거인 할매들은 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일손을 멈추지 않을 게 분명하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어 자리보전을 하는 순간이 되어서나 기나긴 노동의 대열에서 조용히 비껴날 뿐이다. 시골마을 우체국 앞마당에는 올 가을에도 산더미처럼 택배물건이 쌓일 것이다. 할매들이 일구고 거둔 온갖 먹을거리들은 자식들이 사는 곳이라면 지구 끝이라도 찾아갈 터이다. 그 보따리 보따리를 받아줄 ‘새끼들’ 때문에 할매들에게 은퇴란 없다.
--- p.258~260, 「갯마을 일터가 있다면 죽는 날까지 현역!」 중에서
시골 고샅에서 만난 어르신들의 손에는 ‘차마 내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들려 있기 십상이다. 보리 이삭 하나, 호박 한 덩이, 깻잎 한 장도 허투루 내버리지 않는다. 타작을 끝낸 마당에서 한 톨 한 톨 알갱이를 일일이 줍고 바람에 떨어져 뒹구는 깨진 과실 하나도 먼지를 털어내고 알뜰살뜰 챙겨온다. 하늘과 사람의 공력으로 길러낸 먹을거리에 바치는 순정이다.
“밥 묵고 가. 끼니 땐디 기냥 가문 안 되제. 찬은 밸 것이 없제만 한술 흐고가랑께.”
“잡솨봐. 생긴 건 이래도 속은 암시랑 안 해. 묵을 만허꺼시네.”
생전 처음 보는 길손을 집 안으로 불러들여 밥상 앞에 앉히고 숟가락을 꼭 쥐어주는 인정의 손이다. 가을이면 단감을 깎고 홍시 껍질을 벗겨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호박한 덩이, 밤 몇 톨이라도 챙겨줘야 직성이 풀리는 손이다.
--- p.271~274, 「한순간의 쉼도 없는 위대한 손의 역사」 중에서
“사람도 따땃헌 디서만 산 사람은 쪼깨만 추워도 혹석(법석)을 떨어. 고상을 해본 사람은 어려워도 의젓허제. 원망헌다고 되는 일이 있가디. 이 담에는 잘 될 것이여, 허고 희망을 가져야제.”
전라도의 어록을 하나하나 들여다볼수록 강한 긍정과 낙관의 철학이 도드라진다. 사람의 도리란 타인에 대한 사랑과 베풂에 있음을 누누이 밝힌다. 산골에서도 섬마을에서도 어르신들은 마치 입을 맞춘 듯 똑같다. 돌아보면 그분들의 시대는 수탈, 압제, 탄압, 학살, 소외 등 참담한 비극으로 점철되었다.(...)그 징글징글한 질곡의 세월, 숱한 역경을 헤치고 당도한 마음자리에 분노와 갈등 대신 성찰과 인내, 상생의 지혜를 쌓아오셨다. 혹한을 견딘 봄나물의 단맛처럼 스스로에게 닥친 시련일랑 “암시랑토 않다” 하고 꿋꿋이 이겨낸 사람의 향기는 그만큼 순하고도 깊다.
--- p.335~336, 「공부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