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테논 신전이 위대한 예술 작품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에게 경험이 될 때에만 미적인 지위를 갖는다. 누군가 개인적인 향유의 영역을 벗어나 그 건축물을 일원으로 하는 거대한 예술의 공화국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그는 성찰의 어떤 지점에서 그 건축물에서 눈을 돌려, 시민 종교와 일치하는 시민적 감정을 가진, 요란스럽고 논쟁을 즐기며 감수성이 예민한 아테네 시민들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즉 신전을 일종의 표현으로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시민의 기념물로서 지었던 그들의 경험으로 말이다.
--- p.21, 「제1장 생명체」 중에서
유기체와 환경 간의 상호 작용이 완전하게 수행될 때 그것은 참여와 소통으로 변하며, 경험은 이러한 상호 작용의 결과이자 징표이며 보상이다. 운동 기관과 결부된 감각 기관들은 이러한 참여의 수단이다. (중략) 마음과 신체, 혼과 물질, 정신과 육체 등의 여러 가지 대립은 근본적으로 생활이 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 그 기원이 있다. 그것들은 위축과 후퇴의 징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여러 신체 기관, 욕구, 기본적 충동에 의거해 인간이 동물적 상태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인간을 짐승 수준으로 환원시켜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의 경탄할 만한 탁월한 경험의 상부 구조를 세우는 기초로서의 인간 경험의 평면도를 그릴 수 있게 해준다.
--- p.55, 「제2장 생명체와 ‘천상의 사물들’」 중에서
두 사람이 만나고 있다. 한 사람은 구직자이며, 또 한 사람은 그 일의 결정권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다. 면접은 기계적이어서 질문이나 답변이 시종 사무적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만난 곳에 경험이란 없는 것이다. 채용이냐 아니냐가 수십 번 이루어져도 반복 아닌 것이 없다. 그 상황은 마치 부기 실습처럼 처리된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경험이 발전하는 데서 하나의 상호 작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러한 경험의 설명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중략) 그것의 본성이나 의미는 예술로만 표현될 수 있다. 오직 경험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경험의 한 통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 p.93~94, 「제3장 하나의 경험을 갖는다는 것」 중에서
소재는, 그 작업자의 마음을 구성하는 이전 경험의 결과들을 활발하게 조직화하는 작용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섭취되고 소화된다. 잉태된 태아가 태어나 우리 세계의 부분으로서 지각되기 전까지는 임신 기간이 지속된다. 과거의 지속적 과정의 절정은 다른 모든 것을 자기중심에 넣고, 자기 이외의 것은 모조리 잊어버리는 어떤 현저한 운동에 의해 도달된다. 미적 경험이 한순간 속에 집결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도달의 의미에서다. 포함적·완성적 종결을 향한 본질적 운동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저항, 긴장, 흥분의 전향이 바로 미적 경험인 것이다.
--- p.115~116, 「제3장 하나의 경험을 갖는다는 것」 중에서
《경험으로서의 예술》은 모두 14장으로 되어 있다. 제1?3장은 전통 철학이나 전통 미학에서 드러난 미와 예술에 관한 오류나 오해들을 폭넓게 지적·검토하며, 나아가 경험 일반과 미적 경험을 새롭게 이해하여 굳건한 논리적 토대 위에 올려놓고자 한다. 제1장에서는 인간을 생명체의 수준으로 환원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욕구와 그 위협으로 항존하는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되는 것이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동물적 수준의 경험으로부터 잘 정제되고 순화된 형식을 가진 수준의 경험이 구성된다고 기술한다.
--- p.133, 「해제-3. 미학에 대한 미학, 《경험으로서의 에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