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9장에서도 레위인 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화자는 희생당한 그녀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는다. 19장 전체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익명인데 이런 익명성은 이 사건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당시 여성은 언제든지 레위인 첩처럼 희생당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사사기 21장에서 집단적인 납치 성폭행을 통해 현실로 나타난다. 레위인 첩은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언제 여행을 떠날지 결정할 수 없었고 어느 성읍에 들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남편의 손에 끌려나갈 때 “살려 달라”고 외치며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남편에게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다. 또한 그녀가 성폭행당하고 돌아와서 문 앞에 엎드려졌을 때도 “문 열어 달라”, 혹은 “도와 달라”는 말을 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이를 통해 화자는 기브아 노인 집에 있던 그 누구도 레위인 첩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녀의 꺼져가는 미세한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 박유미, 「성폭행, 개인의 문제인가, 사회적 문제인가」 중에서
많은 주석가들이 세겜의 후속조치를 신명기법에 따른 책임 있는 자세라고 옹호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신명기 법조항은 두 사람이 현장에서 적발된 경우라는 조건이 전제되기 때문에 디나의 사건에 적용하기 어렵다. 출애굽기 22장 16-17절의 조항이 상황에 더 적절한 법 규정이다. 반면 세겜은 이스라엘인이 아닌데, 그가 신명기 성폭력 방지법 조항에 따라 사후처리를 시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세겜이 성서의 성폭력 방지법을 자신의 실책을 무마하려는 시도로 고안했다면 세겜의 청혼이 성폭행 후 세겜의 집안에 갇혀있었을지도 모르는 디나의 제안에 의한 요청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성폭력 가해자인 남자와 평생을 사는 것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고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라는 낙인이 찍혀 험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 디나가 최악의 상황을 피한 선택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블라이스는 성폭행을 당한 후에 가해자와 결혼한 여성의 목소리를 빌어 가해자의 달콤한 속삭임과 사랑 고백이 얼마나 죽을 만큼 끔찍한가를 들려준다.
--- 이영미, 「피해자의 관점에서 읽는 디나의 성폭력 이야기(창34장)」 중에서
흥미롭게도 우리가 다룬 고대와 현대의 이야기에는 그 자체 속에 자기 고발, 불안과 심판을 안고 있고, 스스로를 해체하는 면이 있다. 해체에 대한 크리스토퍼 노리스(Christopher Norris)와 대나 퓨얼(Danna Nolan Fewell)의 간단한 정의는 이러하다. 곧, 해체는 본문 자체 안의 다른 목소리를 찾는 방식이다. 해체 읽기 방식에 의하면, 한 본문은 한 가지 절대적인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한 해석의 틈새를 뚫고 나오는 무언가 다른 목소리, 무언가 다른 뜻이 있다. 본문의 가능한 의미들과 기능들의 범위는 심지어 서로 상충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해체적 독법에서 의미는 불안정하고 열려 있다. …
사사기 21장의 젊은 여성 집단 납치 이야기도 스스로를 해체하는 면모를 담고 있다. 사사기 21장의 표면에는 베냐민 지파 구하기 프로젝트를 강조하지만, 자기모순, 거짓말, 무원칙, 비논리, 책임회피 등이 있어서 이 프로젝트는 독자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기 어렵다. 21장은 사건의 발단인 한 여자의 집단강간 사건(19장)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20장에서 성취한 전쟁의 결과(베나민 전멸)를 되돌리는 자기모순의 이야기이다.
--- 유연희, 「‘선녀와 나무꾼’, 사사기 21장, 버닝썬클럽과 해체읽기」 중에서
이 연구의 포커스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전승을 하나로 묶는 종교적 통합을 확보하고자 하는 법궤 이동 사건 속에 나타나는 다윗과 미갈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의 신학적 의미에 맞추어진다. 춤을 추다 옷이 흘러내린 것을 비난하는 것에서 시작된 미갈과 다윗의 갈등은 ‘왕권 정당성에 관한 논쟁’으로 발전된다고 볼 수 있다(삼하 6:20). 자신을 비난하는 미갈에게 다윗은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라고 반응한다(삼하 6:21). 미갈의 비난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이들 논쟁의 중심에 다윗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가 첨예한 갈등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절에서 사울을 무시하는 ‘네 아버지’에 관한 비난으로 시작한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 강조한다(참조: 삼상 10:24; 16:8-10). 다윗이 미갈에게, 야웨가 미갈의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고 자신을 택하고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았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상황은, 사울 가문의 배척을 시사하며, 다윗과 미갈과 정치적 대립구조를 부각시킨다. 미갈의 저항에 다윗은 사울 왕조로부터 자신의 왕조의 독립과 사울 왕조의 몰락을 선언하고 있다.
--- 이일례, 「미갈의 삶을 통해 보는 권력과 저항」 중에서
자신의 누이동생을 성적 대상으로 여겨 욕망했던 왕자 암논, 계략을 꾸며 암논에게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기회를 제공한 사촌 형제 요나답, 자신의 딸을 범죄의 위험에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일어난 성폭행에 대해 침묵하고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음으로써 상처 입은 딸을 외면하고 가해자 아들의 편에 선 아버지 다윗 그리고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음에도 가족관계 임을 상기시키며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오빠 압살롬. 이 모든 남자들은 다말에게 행해진 끔찍한 성범죄의 공범자들이다. 남성이며 왕족인 그들이 가진 권력은 그 범죄를 가능하게 했고 그 범죄를 덮었으며 그 범죄 위에 자신들이 세운 제도와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남자들은 가족의 명성과 명예를 위해서 피해자인 여성, 자기 딸이자 동생인 여자를 침묵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미래를 빼앗았다. 가부장제라는 제도적 권력은 통제와 권력 지향, 정서 억제와 같은 남성적인 가치로 이루어진 위계적 사회구조를 구성하며 그 안에서 한 여성을 희생자로 만든 것이다.
--- 이은애, 「다말과 권력형 성폭력(삼하 13장)」 중에서
여호야다는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을 불러들여 아달랴 정권을 함락시키길 원했다. 모인 사람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서 각각 왕궁, 수르 성문, 호위병 뒤의 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요아스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여호야다는 아주 상세한 계획을 세웠고 사람들과 언약을 맺는다. 아달랴의 죽음은 두 번 보고되는데, 16절에서는 군마가 다니는 길을 통해 왕국으로 들어가 죽임을 당하고 20절에서는 무리가 왕궁에서 그녀를 칼로 죽인다. 조셉 로빈슨(Joseph Robinson)은 20절이 16절의 요약본이라고 말한다. 한편 존 그레이(John Grey)는 두 구절들이 빈약한 증거를 보이는 서로 다른 자료에서 온 것으로 본다. 진실에 대한 역사적 확인은 어렵다. 그러나 아달랴 죽음에 대한 이중 보고는 그녀의 죽음을 재차 확인함으로써 아달랴가 비참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신명기 역사가의 이중 보고는 여성에 대한 가중된 배척과 혐오, 증오심에서 출발한다.
--- 박혜경, 「신명기 역사가의 여성 혐오주의」 중에서
이 상징적 이야기에서 아내 예루살렘은 남녀를 포함한 유다 전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야웨와 예루살렘의 상징적 이야기는 16장 41절과 23장 48절에서 대표적 남편과 대표적 아내의 이야기로 변한다. ‘백성’ 예루살렘은 대표적 ‘아내’가 되고 그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징계는 아내들 전체에 대한 교훈적 징계와 통제가 된다. 유다 남성들은 ‘여성’ 예루살렘으로 상징화되어 있었지만, 잠시 야웨와 유다 남성들은 남성으로서의 연대를 형성한다. 예루살렘이 ‘여성’이고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젠더와 민족’의 요소는 야웨와 남성 청중이 연대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야웨의 가정사를 들으며 은연중 남성으로서 남편 야웨와 동일시하여 감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처벌을 지지하게 되고, 다윗(삼하 12장)처럼 그들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기소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적 사고를 내면화한 여성들은 음행한 여인에 대한 끔찍한 처벌을 가부장제라는 시스템 안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동시에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징적 이야기가 아내에 대한 남편의 폭력적 통제와 징계를 남성의 특권으로 인정해주며 가정폭력을 묵인하고 조장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 임효명, 「에스겔 16장의 폭력 남편 야웨」 중에서
독자들은 유딧의 용단과 신앙과 결단력과 지도력과 지혜와 그 결과를 보고 다양한 칭호를 붙여준다. 페미니스트, 친페미니스트 혹은 그와는 정반대로 반페미니스트와 같은 어떤 호칭이 붙더라도 유딧이 민족의 영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유딧은 성폭력의 피해자 혹은 미투 운동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민족과 신앙을 지키려는 결단으로 성폭력을 견뎌야 했다. 유딧기 저자 혹은 독자들은 유딧의 이런 점을 간과한다. 유대 민족의 승리를 3개월 동안 다함께 축하한 유딧은 이후 베툴리아의 ‘남편 집’으로 숨겨지고 모든 남자들과 분리된다. 당대에 유명세를 탔다고 하지만 그녀는 누구하고도 관계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그녀로 하여금 자기 재산들을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고 여종에게 자유를 주는 등 모든 것을 털어버린다. 하지만 유딧은 성폭력의 그 자리와 그 일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유딧이 민족의 영웅이요 훌륭하고 경건하고 순결하며 유능하고 희생적인 여성이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독자들 역시 저자의 그런 의도를 잘 따라간다.
--- 채은하, 「성폭력의 피해자, 유딧」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