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에 적힌 타이틀 하나로 자기소개가 압축되는 현대 사회에서 나는 무엇이어야 할까. 이 고민의 답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예술가이자 과학자,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한 단어로 대체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해 여름 사막에서 나는 현대의 수많은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만났다. --- p.15
매주 금요일 창업자와 전체 직원이 함께 회사의 현황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타운홀 미팅은 버닝맨의 수평적이고 투명한 커뮤니케이션 문화와 맥을 같이한다. 수많은 서비스가 베타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해도 개발자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도전 자체를 장려하는 문화도 마찬가지다. 구글의 정신과 철학에는 버닝맨의 문화가 뿌리내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21
축제가 열리기 하루 이틀 전 리노의 월마트나 코스트코 매장을 둘러보면 재난 영화에서나 봄 직한 장면이 연출된다. 재고를 사전에 충분히 확보해 놓았는데도 생수를 비롯한 음식, 침구, 취사도구, 약품, 마스크 등이 다 팔려 선반은 텅 비어 있다. --- p.25
버닝맨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쾌락을 침해하지 않으며 모두가 근본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 있도록 평등을 지지한다. 모두가 어울려 소통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도시를 설계하고 환경을 조성한다. --- p.29
그 공간에 존재하는 구성원도, 행동도 정의되지 않는다. 공연도 즉흥적으로 열린다. 이곳은 의도적으로 길을 잃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다. --- p.31
동료들과 사막 위에 놓인 앤티크 소파에 기대어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마음을 먹고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모든 게 나에 대한 ‘근본적 믿음과 자립Radical Self-reliance’으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 p.42
사람들은 버닝맨을 페스티벌이라 부르지만, 오거나이저와 버너들은 페스티벌이 아닌 커뮤니티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버닝맨을 커뮤니티로 만드는 핵심 요소가 있는데 바로 테마 캠프의 존재다. 테마 캠프는 특별한 관심사나 철학, 원하는 주제를 기반으로 모인 버너들의 그룹이다. --- p.48
블랙 록 사막으로 이동시킨 비행기 내부는 항공기 콘셉트의 디스코 바로 변신했다. 마치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듯, 승무원 복장을 한 버너들과 강한 포옹을 하고 안에 들어서면 상상 속에서나 본 파티가 벌어졌다. --- p.51
평소에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의사소통을 하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버닝맨식 통성명’이 불편했지만 나중에는 조금씩 편해졌다. 인연이 될 사람과는 깊이 있는 대화가 이어지며 관계의 통로가 만들어졌고, 인연이 아닌 사람들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내 곁을 스쳐 갔다. 내가 무리해서 애써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낯선 관계의 편안함이었다. --- p.56
그래서 버닝맨에 참가하는 것 자체만으로 정상의 아티스트들과 연결될 수도, 영향력 있는 브랜드가 될 수도 있다. 버닝맨에 작품을 내보인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질 가능성을 만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p.63
이때가 신호탄이었을까. 갑자기 사람들이 안전 요원들이 막고 있던 안전선을 뚫고 불길을 향해 우르르 질주한다. 2~3초 멈칫한 순간이 있었지만 나도 어느새 군중에 섞여 달렸다. 불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강한 열기에 주춤했다. 사람들은 불을 코앞에 두고 명상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입고 있는 옷을 전부 벗어 불 속에 던졌다. --- p.68
블랙 록 사막에는 떼를 지어 나체로 사막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자연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연이 인간의 모태이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가 가장 근본적이고 아름다운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들에 따르면, 나체는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 p.83
여기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경제 원리 대신 원시 경제에서의 호혜적 공동체와 유사한 나눔이 이뤄진다. 처음에는 비상업화 원칙 때문에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없으니까 기프팅으로 대신하는 것이겠거니 단순하게 이해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기프팅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내재한 선함, 좋은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 p.95
문득 콘리에게도 리얼 월드와 디폴트 월드의 구별이 있을까 궁금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리얼 월드는 마음속에만 존재하기 쉽다. 하지만 콘리를 보면 디폴트 월드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 p.110
교통 환경을 바꾸고 기득권을 무너뜨리는 우버, 직접 보유한 부동산 하나 없이 힐튼 호텔보다 더 많은 방을 공유하는 에어비앤비, 세상의 모든 데이터를 웹을 통해 연결하려는 구글. 그들이 구현하려는 세상은 기존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런 파괴적 혁신을 추구하는 버너들이 버닝맨에 모인다. --- p.139
버닝맨을 다녀온 뒤 많은 사람이 묻는다. 좋았냐, 어땠냐, 물론 좋았고, 신선한 경험이었고, 얻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이 한 가지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버닝맨에서의 경험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마일스톤이 되었다. --- p.143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