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교회엔 문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결한 생각의 씨앗을 심고 키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생각을 삶으로 드러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느 시대건 그리스도인은 이런 삶을 살았다. 미움이 가득한 곳엔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핍박과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 위로하며 삶을 회복시켰다. 자신의 생각을 깃발처럼 높이 들고 휘젓고 다닌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통찰은 문학에 대한 수련 없이는 불가능하다.
--- p.8, 「프롤로그 | 문학은 신앙의 땅 밑을 흐르는 강물과 같다」 중에서
한국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교회 성장으로 대신하고, 헌신의 범위를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역에 한정하고,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개인적인 일로 축소시킨 것은 아쉽다.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천국행 티켓을 얻는 일과 봉사를 신앙생활의 전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백성이라면 생각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 p.32, 「1장 문학이 주는 세 가지 선물」 중에서
변화를 따라가려면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문학은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 쉬도록 하는 것”이다. 시나 소설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문학을 통해 우리를 일깨운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다시 말해 문학은 신앙을 지키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 무기를 갖고 있는가? 세상의 유혹에 맞서는 시인의 무기가 시인 것처럼 우리는 이런 무기를 가졌는가?
--- pp.83-84, 「2장 문학을 읽어야 할 이유」 중에서
늙은 애벌레의 말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린다. 나비의 꿈은 곧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는 꿈이다. 헌데 제자들이 사는 나라는 ‘거꾸로 뒤집힌 왕국’이 아닌가? 이곳에선 우리가 알아왔던 세상의 가치, 전제, 규범이 완전히 뒤집힌다. 큰 자는 오히려 섬기는 곳이다. 그런데 주님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다들 높은 곳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주님은 가장 낮은 곳에 계시면서 “너도 나와 함께 이곳에 있을 수 있는가”라고 물으신다. 이것이 부르심이다.
--- p.143, 「3장 꽃이 피려면 사계절이 필요하다」 중에서
“문학 어디에서든 우리는 신학을 만난다.” 존 뉴먼(John Henry Newman) 추기경이 1852년 『대학의 이념』이란 책에서 한 말이다. 뉴먼은 19세기 영국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뉴먼은 문학이 세속화에 저항하는 강력한 도구란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인간은 그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만들어 가는 존재다. 이 과정에서 문학은 인간이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 p.189, 「4장 문학에서 삶의 기술을 얻다」 중에서
광야는 배고픔, 추위와 들짐승으로 인해 위험한 장소이고, 불확실함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광야에선 무방비 상태에 빠지게 되므로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으면 이곳에서의 시간이 힘겨울 것이다. 하지만 광야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하나님을 독대하는 절대적인 시간은 매우 강렬하다. 세상의 문이 닫혀도 하늘의 문은 닫힌 적이 없다.
--- p.272, 「6장 감정,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입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