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맛이 갔어.”
“열쇠를 찾아봐.”
“말했잖아. 주머니들은 다 뒤졌어. 수갑 열쇠 따위는 없어.”
“서류 가방 암호는? 암호를 적어둔 종이가 있지 않을까? 지갑 같은 데?”
“뭐? 암호를 적어서 들고 다닌다고? 그런 머저리가 어디 있어!”
“그럼 체인을 잘라. 일단 서류 가방을 들고 가자. 여는 방법은 나중에 생각하고.”
“이거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네. 절단하려면 한 시간은 걸리겠어.”
“수갑을 손 위로 당겨서 뺄 수 없을까?”
“내가 계속 얘기했잖아. 이걸 절단해야 된다니까.”
“수갑은 안 끊길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수갑 얘기하는 게 아니야.”
……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초콜릿을 씹다가, 잰을 먼저 먹게 해줬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후회했다. 하지만 다음 주에는 잰에게 정말 잘해 줄 생각이니 이런 실수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월요일에는 집에 갈 때 꽃다발을 사갈 것이다. 주말쯤에는 이썬을 부모님께 맡겨 놓고 잰과 외식을 해야지. 잰이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 내 탓일지도 모른다. 내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잰을 원상태로 되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노력이든 할 생각이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을 다시 정상 궤도로 돌려놓기 위해서라면 어떤 노력이든.
가판대에서 몸을 돌리는데, 잰이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잰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다.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입가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유모차는 어디 간 거지? 나는 잰이 앉아 있었던 지점을 바라봤다.
잰이 황급히 다가와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주 잠깐 한눈팔았을 뿐인데…….” 그녀가 말했다.
“응?”
“신발…….” 잰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돌멩이가…… 신발에 들어간 돌멩이를 꺼내고 있었는데…… 꺼내고 돌아보니―.”
“잰, 그게 무슨 말이야?”
“이썬이 없어졌어.” 잰은 마치 목소리가 사라져 버린 듯 속삭였다. “돌아보니 이썬이―.”
나는 이미 잰을 지나쳐서 아까 우리가 함께 있었던 지점으로 달렸다.
유모차는 없었다.
나는 잰이 앉았던 콘크리트 턱 위로 올라가 공원의 사람들을 살폈다.
‘착오가 있었던 거야. 유괴일 리가 없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누가 유모차를 착각해서 끌고 간 거야.’
“이썬!” 나는 소리를 쳤다. 걸어가던 사람들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지나쳤다. “이썬!” 나는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잰이 아래쪽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찾았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말했잖아. 잠깐 한눈을 팔았―.”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애한테서 눈을 뗄 수 있어!”
잰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녀를 다그치려다가 시간 낭비임을 깨달았다.
……
“출입구로 가 있어.” 나는 평정을 찾고자 애쓰면서 잰에게 말했다. “누가 이썬을 데리고 나가려고 한다면 출입구를 통과해야 할 테니까. 출입구에 안전요원이 있을 거야. 이썬이 없어졌다고 얘기해 둬.”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콘을 집어던졌다.
“당신은 어디로 가게?”
“나는 저쪽을 찾아볼게.” 나는 아이스크림 가판대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어쩌면 이썬을 남자화장실로 데리고 갔을지도 모른다.
잰은 이미 출입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잰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면서 휴대폰을 귀에다 갖다 대는 동작을 취했다. 뭔가 발견하면 전화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반대편을 향해 달렸다.
……
이썬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쪽으로 향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지만 우두커니 서 있는 것보다는 어느 쪽으로든 가는 편이 나았다. 나는 근처의 ‘쾌속선’이라는 이름의 롤러코스터를 향해 달렸다. 그 아래에는 백 명쯤 되는 사람들이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대기열 속에 이썬이 탄 유모차가 있는지, 아니면 유모차를 타지 않은 이썬이 있는지를 살폈다.
이썬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나는 또다시 달렸다. 저 앞쪽에는 ‘키드랜드 어드벤처’가 보였다. 그곳은 파이브 마운틴즈의 커다란 롤러코스터들을 탈 수 없는 유아들을 위해 작은 놀이기구들을 모아 놓은 구역이었다. 과연 유괴범이 이썬을 놀이기구에 태워주려고 저곳에 갔을 가능성이 있을까? 없다. 물론 유괴가 아니라 누군가 착각하여 이썬이 탄 유모차를 밀고 갔고, 한 번도 안에 타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지 않은 채 저기까지 갔을 가능성은 있다. 실은 나도 전에 쇼핑몰에서 그런 실수를 할 뻔한 적이 있었다. 유모차들이 너무 비슷비슷하게 생긴데다가, 딴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저 앞에 키가 작고 덩치 큰 여자가 나를 등지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이썬의 유모차와 똑같이 생긴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 나는 쏜살같이 달려가 그녀를 따라잡은 뒤, 유모차 앞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살펴보았다.
유모차 안에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세 살쯤 된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여자아이의 얼굴에는 붉고 푸른 무늬들이 색칠되어 있었다. “저기요, 무슨 문제라도……?” 여자가 물었다.
“미안합니다.” 나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돌려 다른 곳을 살폈다. 그렇게 살피고 살피던 중 이윽고 나는 또 다른 유모차를 발견했다. 파란색 유모차. 작은 캔버스 천 가방이 뒤쪽 바구니에 쑤셔 넣어져 있었다.
유모차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유모차만이 홀로 그곳에 놓여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는 안에 아이가 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내 눈가에 어떤 남자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턱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남자를 개의치 않고 버려진 유모차를 향해 질주했다.
‘제발, 제발, 제발…….’
나는 유모차 앞으로 달려가 내려다보았다.
이썬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썬!” 나는 몸을 숙여 아이를 유모차에서 끄집어내어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썬!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썬!”
나는 아이를 붙잡은 양팔을 쭉 뻗어 그 얼굴을 바라봤다. 이썬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아빠가 왔어.”
나는 이썬의 언짢은 기분이 엄마, 아빠와 떨어졌던 탓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저 낮잠을 방해받아 짜증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다 괜찮다는 말을 계속 되풀이하며, 이썬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썬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나는 다시 팔을 쭉 뻗었다. 아이는 입술 떨기를 멈추더니 내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초콜릿 먹었어?”
그 말에 나의 얼굴은 웃음과 울음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은 뒤 이썬에게 말했다. “엄마 만나러 가자. 엄마한테도 이제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거든.”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