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가족은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가족이다. 그래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이다. 그런데도 이들 모두는 하나의 가족이다.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서로 닮은 점을 갖고 있고, 한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성도들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아니, 공통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우리들은 모두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이 땅이 우리의 터전이다. 우리는 동일한 피로 피뿌림을 받았고, 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다. 같은 노래를 부르고, 한 언어로 말하며, 한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고, 한 유업 안에 있는 상속자들이다. 수많은 시대가 흘러내려 오는 동안에도, 그리고 각양 각색의 민족들 가운데 살면서도, 동일한 모습, 동일한 감정, 동일한 습관을 갖고 있는 이 하나됨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고, 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특수한 사람들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더욱 뚜렷하게 우리들을 특수한 사람들로 구별해 주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얼마나 눈에 띄는 특징인지, 식구끼리 한눈에 금방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모두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다. 그것이 부끄러워 숨기는 법도 없으며,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로 인하여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게 그러하니라』(엡 6:14).
어떤 때는 그것이 좀 가벼울 수도 있고 혹은 더 무거울 수도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다른 때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겨지기도 하고 간혹 유달리 고통스럽기도 하다가, 또 어떤 때는 좀 덜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그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어디를 가나 십자가를 지고 다닌다. 우리의 십자가는 이름만 십자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진짜 십자가다.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기도 하지만 때로는 거기에 실제로 못박힌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므로 그것은 진짜 십자가인 것이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만이 우리에게 전부라고 여기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 십자가에 처형된 그분에게 쏟아지던 비난을 우리가 짊어진 채, 우리가 세상을 내던지고 세상에서 탈출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우리가 따르는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또 거기에 못박히셨으니 우리도 똑같이 고난받기를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어찌 그분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걷고, 우리를 위해 그분이 짊어지셨던 십자가와 좀 더 유사한 십자가를 우리도 짊어짐으로써 그것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주님의 십자가보다 이 세상 다른 무엇이 더 값지고 더 영광스럽겠는가? 세상은 조롱하고 멸시할지라도 이 십자가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이기에 우리에게는 그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먼 옛날 십자가를 짊어졌던 한 성도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복되도다. 주님이 지셨던 나무보다 더 복된 나무가 없나이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주님의 뜻이다. 주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주님의 제자된 사람이 달고 다니는 표식이다. 그 표식이 없으면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과 주님을 따르는 일, 이 두 가지는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성도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을 지지 않으면 아들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침례로 침례받아야 한다. 주님이 받으셨던 비난을 우리도 견뎌내야 한다. 주님이 당하셨던 수치의 옷을 입고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겨야 한다. 우리의 육신은 그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 주님의 가족들은 모든 수치를 감당해야 한다. 우리의 옛 사람과 이 수치를 맞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굴욕의 언덕 위에서 우리들의 죄들을 다 짊어지셨을 때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워 주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을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을 지고 나를 위해 징계를 받으라. 이것을 지고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라. 이것을 지고, 너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고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기라. 이것을 지고, 네 목슴을 아끼지 말고 나를 위해 감옥에라도 기꺼이 가며 죽음도 마다하지 말라. 그렇게 끝까지 나를 따르면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으리라. 십자가를 견디고 수치를 개의치 않는 법을 배우라.”
이러한 주님의 뜻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께서 실제로 보여 주셨던 본보기가 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본보기란, 단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사건 그 자체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사건들이 있다. 십자가 사건 자체는 일생 동안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그분의 생애 전체를 마감하는 장면이었다. 주님은 말구유에 누우셨던 순간부터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를 일생 동안 메고 다니셨다. 주님의 전생애는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갈보리를 향해 가는 한 순례자의 길이었다. 그분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을 떠나 “비통의 길”을 따라 골고다로 끌려 가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땅에서 그분이 겪으셨던 모든 인생 여정 자체가 고통이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줄곧 질책과 슬픔의 생애였다. 전생애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주님의 죽음은 이 모든 고난들의 요약이며 절정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것으로 모든 수치와 고난이 영원히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아직 여기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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