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체제가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가 있었던 그곳에 아이러니하게도 성격이 전혀 다른 시위 부대가 자리를 잡고 특정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6월항쟁 이후 변화에도, 냉전체제 붕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쳤다. 무엇이, 어떻게, 저렇게 오랫동안 그들의 정신세계를 닫아놓았을까·
--- p.5, 「개정증보 3판 서문.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을 다시 조명하며」 중에서
4월혁명은 제2의 해방으로, 그 안에는 새 시대를 향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민주화운동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쟁취뿐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대적인 변화를 촉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와 함께 냉전체제에 갇혀 있던 분단 문제를 다시 불러내어 통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갈망은 한국전쟁 전후에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 김구 살해, 조봉암 처형 등 갖가지 의혹 사건을 파헤쳐 과거사를 청산하고, 3·15부정선거 관련자, 반민주행위자, 부정축재자를 단죄하는 ‘혁명입법’을 요구했다.
--- p.249, 「401. ‘피의 화요일’에서 ‘승리의 화요일’로」 중에서
대통령 선거전은, 박정희 후보가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의 자유민주주의와 가식의 자유민주주의와의 대결”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윤보선 후보의 격렬한 응수로 ‘사상 논쟁’으로 비화했다. 윤 후보는 여수반란사건의 관계자가 정부에 있음을 상기시켰다. 박 후보를 친일파로 공격하기에는 윤 후보도 한국민주당 관계자였으므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한편 이 선거에서는 미국에서 준 밀가루가 주로 영호남 농촌에 대량으로 살포되었다. 당시는 식량난에 태풍 피해 등 재해가 아주 심했다. 농촌일수록 관의 영향력도 컸다.
--- p.306~307, 「502. 민정 이양과 한일회담」 중에서
중화학공업화로 고도성장을 이룩해 정당성을 끌어내려던 박정희 유신 정권이 중화학공업의 과잉 중복 투자로 몰락을 자초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978년 1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8.5퍼센트 더 득표한 데에도 경기 약화가 한몫했다. (……) 12·12총선 패배로 등장한 신현확 경제팀은 중화학 축소 조정, 물가 안정, 금융자율화, 수입 개방 확대, 새마을운동 지원 축소 등 ‘안정화 정책’을 제시했다. 이는 유신 수호와 연결되어 있는 박정희의 고도성장정책·성장제일주의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정책이어서 사사건건 충돌했다. 1979~1977년에 13퍼센트 안팎이던 경제성장률은 1978년부터 큰 폭으로 감소하여, 1980년에는 마이너스 5.2퍼센트로 추락했다. 1952년 이후 처음 있는 놀라운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 p.370~371, 「601.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중에서
광주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지역 차별 정책이 배경을 이룬다. 10·26으로 유신독재와 함께 지역 차별 정책이 사라지고 민주주의 사회가 오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12·12쿠데타, 5·17쿠데타로 또다시 특정 지역 출신 유신 잔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아버리고는, 생각지도 못한 공수특전단을 파견해 ‘공포의 유혈 작전’으로 나오자, 분노한 광주 지역 학생과 시민이 궐기한 것이다. 전두환·신군부는 권력 장악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폭압으로 압살하고자 했는데, 특별히 주시하던 광주에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두환 유신 잔당의 권력 탈취에 대한 항거 시위가 일어나자 ‘위력 과시’의 유혈 작전으로 나온 것이 대규모의 참혹한 학살극을 초래했다.
--- p.427~428, 「701. 현대사의 새 이정표, 광주항쟁」 중에서
6월 29일 노태우는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시국 관련 사범 석방, 인권 침해 시정, 언론 창달, 지방자치 실시, 대학 자율화아 교육자치 실시 등을 골자로 한 6·29선언을 내놓았다. 15년 만에 민주주의 헌정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 6·29선언은 6월항쟁에 굴복해서 나왔지만, 군이 출동하기 어려웠던 점이 있었고, 6월 24일 전두환과 국민당 총재 이만섭의 회담이 끝날 무렵에는 김대중·김영삼이 다 대통령 후보로 나올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했던 점도 있었다. 6월항쟁에서 군부대가 동원되거나 유혈 사태가 나지 않은 데에는 광주항쟁의 경험이 작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 p.449, 「703.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 6월항쟁」 중에서
2012년은 선거의 해였다. (……) ‘박정희 신드롭’이 ‘안철수 현상’을 이겼다고 할까, 과거 세대가 미래 세대를 밀어냈다고 할까. 50대는 박정희 집권 18년에 유년기,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박정희 유신체제로부터 초·중·고 시절에 ‘유일 영도자’로서 박정희를 절대시하는 교육을 받았고, 총력안보체제론과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었다. 조국 근대화는 다름 아닌 경제성장이라는 논리에 익숙해진 50대 이상의 연령층이 안고 있는 창창하게 남은 노후에 대한 불안감도 박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데 변수로 작용했다.
--- p.485, 「705.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