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적 자본주의가 잠재적으로 파국적 생태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은 완전히 주류적 인식이 되었다. 이제 이러한 생각은 주변화되고 조롱당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정신병자들’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새롭게 제시된 전략들이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생태적 위기를 다루는 것을 옹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적용되고 있는 기술적 교정이나 시장에 기초한 유인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비판적 작업이 요구된다. ---p.18
자본주의의 승리가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지구적 경제를 창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은 지구적 자유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이 사적 이익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는 경제 체계에 적합하지 않다. 인류가 거주하고 있는 행성인 지구 또한 그러한 무한경쟁을 견뎌낼 수 없다. 이러한 체계는 이미 우리 문명의 사회적·환경적 토대를 허물고 있다. 급진적 변화가 없다면 지구상의 생명은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많은 이에게 이러한 대혼란은 이미 현재형이다. ---p.26
오늘날 현대적 식량 생산은 첨가물과 잔류물로 전체 인간 먹이사슬을 오염시키는 동시에, ‘푸르고 안락한 대지’를 적대적으로 산업화된 단일경작체제로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의 읍락과 도시들은 사회적·환경적으로 쇠락하고 있다. 승용차에 의존하는 교통체계는 도시 공간의 유쾌함을 파괴하고, 우리가 호흡하는 대기를 오염시키고 있으며, 승용차 소유자 민주주의에서 배제된 많은 이들의 이동을 어렵게 하고 있다. 새로운 화학약품, 핵 기술과 생물학적 기술에 내재된 은밀한 위협과 더불어 지구적 경제활동의 규모 그 자체가 상호 연관된 환경적 위협의 망을 만들어내는 더 지역화된 과정과 결합한다. 이러한 위협에서 어떤 그룹도, 심지어 부유하거나 특권을 누리는 집단조차 벗어날 희망이 없다. ---p.29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두 입장의 정책적 결과가 반드시 다를 필요는 없다는 분명한 사실 때문이다. 만약 후세대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려 한다면, 인간중심주의자들은 비인간 자연에 대해 생태중심주의자들이 제시한 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심층녹색주의자들---p.deep green)’이 인간혐오와 생태적 권위주의의 함정을 피하려 한다면, 그들은 인간의 도덕적 요구가 최소한 환경의 도덕적 요구와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환경보전과 지속가능성이 중요하고 실제적이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기획의 도덕적 정당화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p.40
시장력을 시장 교환과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한다. 시장 교환은 이미 존재하는 것 또는 현재 존재하는 생산 능력을 이용함으로써 생산될 수 있는 것을 사고파는 과정이다. 시장 교환은 교환을 매개하고 인민들이 그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상들에 대한 정보를 창출하는 모든 근대 경제에는 어느 정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시장력의 작동―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지칭했던―은 서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사전에 아무런 조율도 없는 기업의 투자결정이 생산 능력의 규모, 구조, 위치에서의 변화를 낳는 과정이다. 그 결과는 시장력이 개인, 공동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자의적이고 통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시장력은 분절화와 소외를 조장한다. 시장력은 불안정하고 지속 불가능한 팽창과 소비주의의 동학을 만들어낸다. ---p.83~84
전통적 정치투쟁은 국가권력 장악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혁명을 통해서이든 투표함을 통해서이든 과거의 모든 시도는 소망하던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론적으로 잘못되었고 실천적으로 효과가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적 접근이 실패한 곳에서 출발한다. ---p.88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지만 정치적인 것 또한 개인적이다. 광신 또는 소진을 낳는 것은 구성원들의 심리적 필요를 충족하기는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을 때이다. 우리는 의미, 동료의식, 유쾌함에 대한 필요가 표현되고 부분적으로 충족되는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p.99
런던 광역시 의회의 급진적 정책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강력한 비판 지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노동자 운동뿐 아니라 지역공동체 운동, 환경운동, 흑인 인권운동, 반파시스트 운동, 평화운동 등을 통해 제기된 다양한 필요를 주목했다. 또한 노동자, 여성, 인종적 소수자, 레즈비언·게이, 노인, 장애인 같은 대중적인 사회세력과 생태운동, 평화운동, 특수한 주장을 펼치는 다른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다양한 의제를 포괄할 수 있는 공통 지반으로서 필요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경험적 사례를 제공했다. 이러한 공통 지반은 곧 현존 사회질서---p.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전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 체제는 사람들이 필요를 표출하는 통로를 왜곡하고 이윤을 위해 이를 조작하며 결국 그들이 자신의 필요를 정치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p.118~119
종종 행위자들은 욕망을 필요로 착각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필요의 충족은 개인적·집단적 행위자들의 안녕과 행복을 낳지만, 욕망 추구는 끝없는 불안과 박탈감을 초래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은 소비를 통해 충족되는데, 소비를 통한 욕망 충족은 끝없는 경쟁으로 내몰고 타자와 비교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다. ---p.120
욕망의 주체는 개인이지만 필요의 주체는 공동체이며 서로 소통할 수 있다. ---p.120
케이트 소퍼는 이러한 소비 자본주의를 쾌락주의로 규정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녀가 제시하는 것은 대안적 쾌락주의인데, 이것은 시장에 의해 인식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다양한 필요에서 출발한다. 자가용을 이용한 빠른 이동이 소비문화의 쾌락이라면 아이들의 안전, 소음과 대기오염으로부터의 자유, 걷기와 자전거 타기에 의한 건강한 생활 등은 대안적 쾌락이다. 자가용 이용에 따른 안전의 위협, 오염, 운동 부족에 따른 비만 등 각종 질병의 발생은 소비주의적 자본주의가 충족할 수 없는 기본적 필요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p.121
전통적으로 사회주의 경제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로 인식되어왔다. ---p.중략) 현실에서 ‘계획’이 ‘통제’로 변질되면서 대중의 이해와는 동떨어진 관료적 국가사회주의 체제로 퇴행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로 존재했던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 현실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회주의적인 자본주의 체제 비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시장 실패를 경험적으로 증명하는 동시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경제체계의 원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TINA---p.There Is No Alternative)’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p.161
민주적 참여를 통한 계획경제 전략은 총체적 인식의 장애물을 자원, 정보, 지식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찾는다. 우리는 대형 할인매장이 어떻게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제약회사들이 우리의 생명을 담보로 불필요한 약품을 양산하고 중독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제조업체들이 제3국으로 진출해 그곳의 노동자들을 얼마나 착취하고 그곳의 환경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공무원·관료집단과 건설자본이 어떻게 유착해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우리의 삶의 기본 조건들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정보와 지식은 전문가들에게 독점되어 있고, 언론은 그것을 왜곡한다. ---p.184
‘지속가능성’이라는 수식어로 성장주의와 소비주의의 문제점을 은폐해야 할 만큼 기존의 성장 패러다임은 위기에 봉착했다. ---p.189
녹색담론과 사회주의 담론 사이에는 깊은 골이 존재한다. 녹색담론은 지구환경과 생태적 가치를 우선시함으로써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착취와 불평등의 문제를 부차화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주의자들이 볼 때 인간 사회의 빈곤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조건에서 생태계의 내재적 가치와 우선성을 내세우는 것은 먹고살 만한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현실의 계급투쟁을 교란할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다른 한편 녹색 운동의 시각에서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은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자연을 인간발전과 웰빙의 수단으로 간주하며 근본적으로 성장 패러다임과 단절하지 못했다. 환경 문제를 언급한다고 해도 그것은 대부분 마지못한 수동적 반응일 뿐이라고 본다.
---pp.189~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