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했냐?”
귀에 익은 낮은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민우 선배가 보였다.
“술 취했냐고.”
“아니요. 괜찮아요. 이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아요. 큰일 날 정도는 아니니까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네. 그리고 선배, 음. 이렇게 있다가는 서로 불편해질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요. 음, 저 준서 선배 안 좋아해요. 그러니까……, 그냥 관심이었어요. 있으면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감정 있잖아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혹여나 저 신경 쓰셨다면 안 쓰셔도 돼요.”
민우 선배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건조하게 답했다.
“신경 쓴 적 없어.”
“아……. 다행이네요. 저 두 사람 너무 예쁘잖아요. 아, 두 사람 잘됐으면 좋겠다.”
내가 꺼낸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내 마음을 헤집었다. 이런 말이라도 해서 어색함을 깨고 싶었고, 깔려버린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그럼 전 실례할게요.”
몸을 틀어 지나치려다 민우 선배의 손에 붙잡혔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지 주머니에 있던 손이 언제 날 잡았는지 모르겠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담담한 척, 민우 선배에게 말을 꺼냈다.
“서연이 놀이공원 좋아한다며?”
역시 이 사람은 서연이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사실을 이 사람이 알 리 없었다.
“……그런데요?”
“시간 되는 대로 놀이공원 가자. 멤버는 이 멤버.”
난 또 들러리가 되고, 서연이의 그림자가 되고, 머릿수만 맞춰주는 사람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숨이 막히는데 그곳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사람들이 쏟아지는 곳에서 난 얼마나 더 비참해질까.
“저……. 시간 없어요.”
민우 선배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 그렇게 서 있었다.
“시간 내. 네가 말한 대로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위한 일이니까 말이야.”
민우 선배가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갔다. 성큼성큼 테이블로 향하는 민우 선배를 보다 어깨너머에 서연이의 앞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준서 선배가 보였다.
손 털고 일어나서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호감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지금처럼 초라함, 부끄러움, 슬픔, 아픔, 미움들로 내가 더럽혀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없어도 즐거워 보이는 세 사람을 보며, 이 거리가 참 멀게만 느껴졌다.
“이제부터 선배 말고 오빠라고 불러.”
“……네?”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민우 선배를 올려다봤다. 민우 선배는 놀라 굳어버린 나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좋다며.”
“네? 그, 그건.”
“준서 아니라며.”
“그, 그렇긴 하죠.”
“근데 좋다며.”
“…….”
“어제 네가 그랬잖아. 좋다고.”
말이 그렇게 되는 건가. 술이 뇌세포를 다 죽여버린 건지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내 앞에서 좋다고 말했잖아.”
“…….”
“내가 좋다는 거네.”
멋대로 해석인데 반박할 여지가 없다는 게 날 당혹스럽게 했다. 지금 당장 민우 선배가 내게,
“아님 다른 놈이라도 있냐? 이름 대봐.”
이렇게 물어온다면 난 할 말 없다.
난 어제 분명히 민우 선배 앞에서 좋다고 소리를 쳐댔다. 그리고 난 준서 선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리고 좋아한다고 소리칠 때 내 앞에는 민우 선배가 있었다. 무작정 좋다고 소리치며 매달린 내 고백을 자신을 향한 고백이라고 알아들었던 걸까. 내가 준서 선배를 좋아하는 걸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갑자기 시치미 뚝 떼고 왜 이러나 싶었다.
더는 민우 선배의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그의 팔을 보고 있을 즈음, 들리는 충격적인 발언에 나는 그만 가방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래. 뭐, 사귀어줄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