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릴 수 있는 바울의 모습은 이렇다. 그는 여행하는 선교사로 전략적인 지역에 있는 수많은 도시와 마을을 방문하여 필요한 만큼 또 가능한 만큼 머물면서 교회를 세웠다. 이런 식으로 바울은 이 도시들과 마을들이 있는 좀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을 확장하려고 기초를 놓은 것이다(아시아에서는 행 19:10과 같은 일을 위해 에베소를 중심지로 삼았다). 동시에 바울은 이 공동체들을 다시 방문하였으며, 또 그의 동료들을 보내 방문하게 하고 많은 서신 교환을 통해 계속 그 공동체들과 접촉했다. 이처럼 바울은 단지 복음 전도자나 교회 개척자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들을 목회하며 돌보는 책임을 감당한 사람이었다.
--- 「3장. 바울, 그의 서신과 삶」 중에서
사도행전은 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 후에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 논의가 있었으며,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는 않지만 교제를 더욱 원활히 하려면 이방인 회심자들이 몇 가지 유대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고 말한다(행 15장). 하지만 사도행전은 바울이 좀 더 이른 시기에 예루살렘이 기근으로 고통당할 무렵, 그곳 그리스도인들을 도우려고 경제적인 구호품을 가지고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고 진술한다(행 11:30; 12:25).
갈라디아서 2:1-10과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두 회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논의가 활발하다. 더 나아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몇 가지 다른 문제도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독립한 사도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기술한다. 이를 통해 자신과 예루살렘의 확실한 관계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사도행전 11:30에 나오는 예루살렘 방문은 분명히 언급하지 않는다.
--- 「4장.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1-7장은 바울과 회중 사이에 이루어진 화해를 언급한다. 반면에 10-13장에서는 바울의 어조가 달라지며 바울은 명백히 회중의 삶의 어떤 측면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런 변화 때문에 독자들은 오랫동안 혼란스러워했다. 어조가 바뀌고 어려운 문제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학자들은 이 두 부분을 별개의 서신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10-13장이 1-7장보다 먼저 쓰였는지 혹은 뒤에 쓰였는지는 전혀 합의된 바가 없다.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하고 있는 8장과 9장과 관련해서는, 이 두 장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 별개 서신들의 일부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따라서 본 서신의 이런 단원들의 기원과 그 단원들이 반영하고 있는 상황들에 관해서 어떤 정보를 찾을 수 있는지 알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 단원들을 따로 살펴보아야 한다.
--- 「7장.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중에서
우리가 이미 살핀 것처럼 고난은 인간 운명의 한 부분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박해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따르는 고난 때문에 더욱 심할 수도 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은 광범위하게 바로 이것을 다루고 있다(롬 8:18-39). 바울은, 고난은 견딜 수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자들이 기다리는 영광스러운 미래와 비교할 수 없으며, 피조물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 새로워질 때 맞이할 영광스러운 미래와도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이 부분은 신약성경 저자가 우주의 미래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피조물의 갱신을 기대하는 몇 안 되는 구절 중 하나다). 이어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나약하고 무지하지만, 성령께서 이것도 도우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자기 가족이 되게 하고 그들과 영광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방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며, 또 아무것도 그분의 의도를 꺾을 수 없으므로 이 목적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마어마하게 크셔서 그 무엇도 그 사랑에서 자기 백성을 끊을 수 없다.
--- 「8장.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바울 사상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임을 신자들에게 부여하는 데 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결국 그분과 함께하는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믿음 없이는 사람들은 계속 죄의 지배를 받고, 궁극적으로는 그 죄를 섬긴 대가로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바울처럼 선교 사명에 참여하도록 특별히 부름받은 자도 있다(롬 1:14; 고전 9:16). 비록 이것을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자가 되고 변화된 삶을 살며 자신들의 믿음을 담대히 말함으로써, 일반적으로 복음을 자기 주변의 공동체에 전하게 될 것이라고 전제한다(엡 6:15; 빌 2:15-16; 살전 1:8).
--- 「14장. 바울-선교사이자 신학자」 중에서
신약성경을 읽을 때 문제는 다른 편지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둘의 대화 중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전화 통화하는 것을 듣고 있지만 전화 너머 상대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은, 대화 중에 상대편의 말에 반응하며 통화자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안다. 어느 정도는 들은 것을 가지고 상대편이 무슨 말을 했을지 알아낼 수 있지만, 그 과정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원래 상황과 다른 상황을 재구성할 가능성도 높다. 이것이 바로 바울 서신의 상황이다. 우리에게는 일반적으로 그가 서신을 보
내는 곳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인 출처가 없다. 그 대신 바울의 반응을 통해서 그 상황을 재구성하고 그렇게 재구성한 상황을 통해 바울이 왜 그런 식으로 편지를 썼는지 설명해야 한다. 이 과정을 종종 거울 독법(mirror-reading)이라고 부른다.
--- 「15장. 신약성경의 서신들-해석과 저작권」 중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익명으로 남겨 놓은 빈 곳을 굳이 채우려고 애쓰기보다는 히브리서를 쓴 사람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을 약술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 그는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이었다.
■ 그는 예수의 사역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아니었다(2:3).
■ 그가 디모데를 언급한 것(13:23)과 바울 편지의 특징들을 사용한 것(13:22-25과 빌립보서와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의 마지막 부분을 비교하라)을 볼 때, 그는 바울의 영향력이 미치는 집단과 접촉하고 있었다.
■ 그는 잘 정제된 헬라어 문체로 글을 쓰며, 헬라 철학적 사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 그는 헬라어 구약성경 연구와 창조적인 해석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히브리서 저자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은, 초대교회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위대한 인물들과 위대한 사고를 더욱 풍성히 향유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더욱 강하게 심어 준다.
--- 「16장.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몇몇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을 신자의 삶에 세세히 관여하시는 분으로 본다. 이런 태도는 사소한 것에 관한 관심으로 침잠할 수 있다. 다른 전통들은 하나님이 세계에 관여한다는 생각을 최소화한다. 하지만 또 다른 전통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운명주의적인 것으로 보고는, 요한계시록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바르게 이해하자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런 개입은 운명론적인 것이 아니며, 권력과 자유와 고난 중에 보이는 신실함이라는 쟁점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악의 실재 간의 역설을 한데 연결하고 있다.
--- 「21장. 요한계시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