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필휘지의 필법을 익히지 못했으나 후회하지 않는다. 자책할 이유도 없다. 한 줄 한 줄이 전전긍긍이었으므로 이 산문들을 그 흔적들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를, 지금, 이곳에, 나로 있게 해준 말들 앞에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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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눈을 뜨면서 해마다 12월 언저리에는 이른바 신춘문예 열병을 앓곤 했는데, 당선 통지를 기다리며 연탄불에 라면을 끓이는 날이 많았다. 라면이 끓는 양은냄비를 숟가락으로 익숙하게 들어 올리는 일은 이력이 붙었으나, 기다리는 신문사의 당선 통보는 왜 그리 목을 길게 만들던지. 그런 겨울, 연탄도 떨어지고 친구네 집에 두어 장 빌리러 가기도 민망해서 차가운 자취방에서 이홉들이 소주를 병째 들이켜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던 날이 있었다. 내 문학은 연탄의 뜨거운 기운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자책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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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워 화투판에서 밑천 다 날리고 새벽 마루 끝에 앉아 냉수 한 사발 들이키는 사람처럼, 다 벗어던지고 몸뚱이 하나 남은 겨울 나무처럼 스스로 벌거벗기 위해 서 있는 것들이 있으니, 오로지 뼈만 남아 몸 하나가 밑천인 것들이 있으니, 올해 당신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해도, 희망 같은 것을 몽땅 잃어버렸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절망이 많으니, 절망을 재산으로 삼고, 절망으로 밥을 해먹고, 절망으로 국을 끓일 각오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는 흔쾌히 반성문을 쓰고, 살아갈 날들을 위해서는 빛나는 예지의 선언문을 쓰고, 누가 뭐라 해도 후진하는 법 없이, 요란하게 수다를 떠는 법 없이, 발소리를 남기지 않고 침묵으로 한 생을 밀고 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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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과 관련해서 두 가지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트위터에 올린 17개의 글에서 “박근혜 후보가 안중근 유묵을 훔쳐 소장하고 있거나 유묵 도난에 관여했다”는 취지의 표현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제 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소설을 썼습니다. 검찰은 정치적 판단에 의해 무리하게 저를 기소했습니다. 권력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이 오히려 그 권력에 해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우매한 겸찰은 모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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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37_그날은 절대로 쉽게 오지 않는다. 그날은 깨지고 박살나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참고 기다리면서 엉덩이가 짓물러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뒤섞이고 걸러지고 나눠지고 침전되고 정리된 이후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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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 시간에 나는 사랑에 대해서 쓰려면 ‘사랑’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말아야 한다고, 그 말을 아예 잊어버려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주문한다. 시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은 은유다. 잘 알다시피 은유는 차이성 속의 유사성을 끄집어내는 비유의 방식이다. 대상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참신한 본질을 찾아내기 위한 수사인 것이다. 그리고 은유는 직설적인 언어의 뻔뻔함과 뻣뻣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기여한다.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은유가 앞장서서 갈등을 조장하지는 않는다. 은유는 부드러움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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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으로서 최근의 저는 낙제자입니다. 시에 투여해야 하는 절대적인 시간을 다른 데로 유용하고 있습니다. 백 잔의 술을 마시고도 한 줄의 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달복달해도 오지 않는 시를 낚아채려고 눈을 부릅뜨기보다는 멀리 지나가는 기차 소리처럼 가만 놔두는 일이 잦습니다. 시가 기관차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때를, 시가 삶을 달구고 삶이 시를 달구던 때를 ‘그때’라고 한 오라기 뉘우침도 없이 회고할 뿐입니다. 시도 쓰지 않으면서 머리꼭지에 턱하니 시인이라는 벼슬을 수탉처럼 붙이고 다닙니다. 저는 망하기 직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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