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들은 흔히 성장을 3단계로 구분하는데, 첫째, ‘생산요소 투입 증대’에 의한 성장, 둘째, ‘효율성 향상’에 의한 성장, 셋째, ‘혁신(혹은 창신)’에 의한 성장이다. 이와 같이 볼 때, 1980년대 중국은 자국에 풍부한 저임 노동력과 저가의 토지 등 생산요소를 최대한 활용하여 성장을 추구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성장 단계인 혁신(혹은 창신)을 통한 성장을 아직 크게 강조하지 않았고, 마오쩌둥의 야심찬 시도들이 실패로 끝난 시점에서의 반성과 자제도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p.70
또한 본질적으로 이노베이션은 순수하게 전문가의 영역[이른바 ‘전(專)’]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지식과 식견이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창의와 열정[이른바 ‘홍(紅)’]이 함께 작동해야 이루어지는 것이 이노베이션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이 쌍창을 독려하면서 군중노선을 강조하는 것을 기이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또한 ‘전’과 ‘홍’이 자리를 맞바꾸며 서로 다른 시대를 이끌었던 중국 현대 경제사에서 비교적 성과가 좋았던 시기(신민주주의 시기, 개혁개방 시기)는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압했을 때라기보다는 양자가 적절한 비율로 섞였을 때였다고도 볼 수 있는 만큼 쌍창을 추구하며 군중노선을 내건 것의 적절성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
--- p.83
양적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90년대 말을 전환점으로 하는 변화의 의미이다. 이와 같은 교판·원판기업의 변화는 중국의 국가혁신체제라는 더 큰 틀에서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갖는다. 우선, 그것은 중국 대학 및 연구기관들이 1980~1990년대에 걸쳐 지식산업화를 위해 활용해 온 ‘수직적 통합 모델’의 부분적 해체 혹은 완화를 의미한다. 교판·원판기업은 중국 대학 및 연구기관들이 연구성과를 활용할 기업을 스스로 보유한 것, 다시 말해 산업생산 기능을 내부화(internalize)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개혁은 대학 및 연구기관과 산하 기업들 간의 수직적 고리를 깨고, 한몸이 되다시피 한 대학 - 교판기업(혹은 연구소 - 원판기업) 간에 일정한 방화벽을 두는 것이었다.
--- p.119
요컨대, 중장기 과기계획으로 드러난 중국의 과학기술 혁신전략은 외자 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남으로써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같은 종속적 발전을 답습하지 않고, 미국과 같은 전략대국의 과학기술 정책을 추구하되,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적인 기술 추격 경험을 참고하겠다는 것이다.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중국은 위와 같은 중장기 계획을 통해 자국의 과학 역량을 크게 키웠고, 이를 산업 고도화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2010년부터 추진된 ‘7대 전략적 신흥 산업 육성계획’과 2015년부터 추진된 ‘중국제조 2025’도 그 토대 위에서 이뤄질 수 있었다. 2017년부터 중국 과학기술부 주도로 추진하고 있는 ‘과기창신(科技?新) 2030’ 계획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 p.129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분권화 속에서도 특구, 신구 등의 이름으로 특정 지역에 성장 에너지를 응축시켜 성장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단계적으로 그런 지역을 확대함으로써 전면적인 성장을 유도해 왔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특별히 지정된 곳’조차 그 특별함은 크지 않고 그런 만큼 국내외의 자원을 집중적으로 들여오는 힘이 약해졌다. 오늘날의 중국에 각지의 독특한 매력을 더 심화하고 키워야 하는 과제가 남겨진 것이다. 동시에 이 상황은 중국이 한 단계의 성장과정을 성공적으로 밟아 새로운 단계의 문턱에 섰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 p.184
주목할 만한 것은 인터넷상의 가상공간을 구축하는 일선에 선 이들 기업이 개인이 창업하여 키운 민영 기업이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중국의 인터넷 공간이 정부의 상당한 통제와 검열하에 있음을 생각하면, BAT와 같은 민영 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이 곧 중국 인터넷 공간의 완전한 자유를 증명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중국의 인터넷 공간은 정부와 주요 (민영) 기업들의 공조 속에서 조형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p.201
중국 내에 독특한 수요가 크다면 그것은 중국으로 하여금 그 방면의 혁신을 주도하게 하는 동력원일 수 있다. 개발도상국의 독특한 수요가 새로운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하여 학계의 이목을 끄는 한 가지 개념은 ‘검약식(儉約式, frugal) 혁신’이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나라의 실질적 수요에 맞게, 때로 기술적 스펙 및 기능을 낮추고 비워 만든 새로운 제품·서비스를 창출하는 것이 ‘검약식 혁신(frugal innovation)’이다.
--- p.213
샤오미의 예를 보면 중국 기업은 여전히 모방을 하되 그 모방의 수준은 과거와 비교하여 크게 고도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록 모방이지만 단순 복제 단계에서 창의적 모방으로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방의 고도화 과정에서 조직 학습과 기업 역량의 구축·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변화를 관찰함에 있어 ‘모방’과 ‘혁신’을 이분법적 잣대로 사용하는 것은 이상적이지 않다. 어떤 ‘모방’을 ‘혁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해 버리면 중국의 사다리 오르기를 제대로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엄밀한 잣대를 적용하면 인간의 문물 중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있을 수 없다.
--- p.252
신약 개발 및 제조 부문 외에, 중국의 또 다른 중요한 혁신은 의료 서비스 부문에서 일어날 수 있다. 즉, 의료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원격 의료 서비스가 중국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고도화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는 의료법, 개인정보법 등의 규제가 많고, 대형 병원, 소형 의원 소속 의사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의료 서비스의 혁신을 제약할 가능성이 상당한데 중국의 사정은 그와 다르다. 오프라인으로 충분한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지 못하는 중국의 현 상황은 오히려 온라인 의료 서비스의 장을 키우고, 이미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의 활발한 응용 단계에 들어간 중국 기업들이 정부의 뒷받침으로 의료 서비스 혁신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신용카드의 보급이 크게 뒤처져 현금으로만 결제가 이루어지던 중국의 소매금융 시스템이 신용카드를 건너뛰고 스마트폰 모바일 결제 시스템으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고 전격적으로 이동했던 양상이 의료 서비스에서도 일부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 p.312~313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경제의 전환과 국가주도적인 중국 체제의 특성이 제대로 맞물린다면 중국은 의외로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 수도 있다. 앞 장에서 논의했듯, 현재 세계 경제는 ‘플랫폼 기반 경제(platform-based economy)’로 이행 중이다. 플랫폼 기반 경제가, 제약이 없는 시장에서 개인이나 개별 기업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전통적인 인식 속의 ‘개인 기반 자유시장경제(individual-based free market economy)’를 적잖이 대체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신산업의 성장 공간과 틀을 만드는 주체로서 국가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다면 성과는 클 수 있다.
--- p.386
중국에 대한 비판과 경계는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을 관통하는 공통된 기조일 뿐 아니라, 미국이라는 기존 강대국의 견제는 거대하게 성장한 중국에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향후 중국의 성장과 혁신 추구는 종전과는 다른 판도와 구조 속에서 전개될 것이고 그 추진의 동력 또한 상당 부분 교체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로서의 미래상은 불확실하지만, 이 책에서 다각도로 논의한 다양한 변수들의 경합과 상호작용 속에서 그려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 p.458
이상의 분석은 ‘중국 주변의 소규모 국가들에겐 부상하는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가 중요한 전략적 문제’라는 인식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연히 SUTD의 한 가지 사례가 우리의 전략적·정책적 고민을 일거에 풀어줄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SUTD가 중국과 미국 사이의 구조적 틈새에 자신을 전략적으로 위치시키고, 미국과의 연계를 통해 기초 역량을 축적하는 한편, 중국을 향해서는 산학연 연계를 구축해 응용·실천의 여지를 확장하고, 과학기술 그 자체를 넘어 디자인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도 정책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바이다.
--- p.495
중국은 비록 성장의 사다리 하단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느새 그 상단이라 할 만한 통신설비, 우주항공, 고속철도, 스마트폰, 모바일 금융, 게임 등의 영역에 폭넓게 진입했다. 중국은 거대한 내수 기반과 더불어 플랫폼 기반 경제의 도래 속에서 적잖은 산업들에서 약진했다. ‘기업가적 국가’의 뒷받침도 큰 몫을 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차지할 것 같은 중국의 위세 속에 실로 그들이 잘하는 것, 반대로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되짚어보는 것은 정책적 고민의 필수 코스일 것이다.
--- p.503
한국과 중국은 4차 산업혁명에 어느 나라보다도 관심이 많지만, 그러한 기술적 변화가 남길 공백, 즉 4c를 어떻게 채울지에 관해서는 아직 충분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한국이 중국보다 앞선 것이 시민사회의 성숙, 해법의 민주적·창의적 모색 능력이라면 그를 충분히 발휘하여 4c를 풍부하게 채워가야 한다. 그리고 그를 중국에 선보임으로써 중국에서 한국의 위상을 강화하고 양국의 협력적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기계에 의해 대체되지 않을 인간성의 영역을 찾고 키우는 것, 건조한 기능만이 아닌 따뜻한 감성을 담아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한국이 앞서서 해야 할 일이다. 제품을 넘어 서비스와 사회 환경에 대한 공적 디자인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 p.518~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