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칫솔, 탁상 거울, 집에서만 쓰는 안경. 매일 쓰는 것이 아름다워야 일상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언제까지 예쁜 카페나 근사한 숙소로, 비일상으로 도망칠 수는 없으니 일상을 가꿔야 한다. 나는 이제껏 반대로 살았다. ‘어디에 돈을 쓸 것인가’ 갈림길에 섰을 때 사는 즉시 최대의 만족을 주는 것만 골라왔다. 질 좋은 이불을 사는 대신 하룻밤에 5만 원이 넘는 숙소로 가는 편을 택했다. 꼬질꼬질한 자취방에서 이불 하나 바꿔 봐야 티도 안 날 테니까. 언젠가 형편이 넉넉해지면 구질한 물건들은 싹 다 버리고 근사한 삶으로 건너가리라.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생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집을 짓는 제비처럼 작은 만족을 주는 물건을 차곡차곡 모아야 하는 건 아닐까?
---「매일 쓰는 물건이니까 예뻐야 해」중에서
이번 봄은 시간을 조금 다르게 써 보기로 한다. 완성도가 좀 떨어지더라도, 단 5분이라도 날 기쁘게 만들 수 있는 일이라면 일단 하고 봐야지. 예를 들어 마감이 코앞이 어도,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이어도, 꽃샘추위로 턱이 덜덜 떨려도.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꽃을 보러 가야겠다. 날씨, 장소, 사람 삼박자가 어우러진 벚꽃놀이는 유니콘과 같은 것이므로. 2퍼센트 아쉬운 뽀시래기 행복이라도 틈틈이 주워 둬야 한다.
---「기분 전환하려면 몇 시간이 필요할까」중에서
일기를 쓰면서 내 인생은 예전보다 더 단정해졌다. 해야 하는 일에 끌려 되는 대로 살다 보면 함정에 빠진 것처럼 막막해질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마다 일기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10년 동안 쓴 일기는 책장 맨 위 칸에 모아 뒀다. 제일 좋아하는 만화 『어쿠스틱 라이프』 바로 옆 칸이다. 1권부터 빠짐없이 모은 만화책 전권 분량만큼 내가 쓴 일기가 쌓여 있는 걸 보며 먼 미래를 상상해 본다. 내가 몇 살까지 일기를 쓰게 될까?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일기를 계속 쓴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 있을 텐데. 매일 일기 쓰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10년 차 ‘일기인’이 전하는 일기 쓰기의 기술」중에서
서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도서검색용 기계를 찾아간다. 책 제 목을 입력하면 책이 꽂혀 있는 장소가 프린트되어 나오는 게 매번 재밌다. 보물 지도를 뽑는 기분이다. 월급이 나오기만을 벼르며 위시 리스트에 적어 둔 책을 모두 찾은 뒤엔 신간 코너로 간다. 거기서 눈길을 사로잡는 책을 몇 권 더 고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잡지 코너로 이동해서 애틋한 마음(너희는 아직도 애쓰고 있구나!)으로 종이 잡지 몇 권을 더 집는다. 이걸 다 사면 얼마를 내야 할지 셈하지 않고 양껏,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게 월급날 서점 나들이의 포인트다.
---「월급날엔 서점에 간다」중에서
나는 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주 나를 해친다. 이 사실도 오랫동안 모르고 있다가 몇 년 새에 겨우 알게 됐다. 그래서 덜 다치기 위해 시간이 남을 때마다 나에게 관심을 준다. 지난 일기도 다시 읽고, 사진첩도 뒤져 보고, 플레이 리스트도 점검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운동이나 영어 공부를 하면서 자기 관리를 한다면, 내 방식의 자기 관리는 섬으로 도망 와서 맥주를 마시며 나를 관찰하는 것이다. 약속 시간이 5분 남았을 때 쓸데없이 초조해하는군. 맑은 하늘보다 구름 낀 하늘을 더 좋아하는군.
---「나에게만 의미 있는 예쁜 쓰레기 같은 얼룩들」중에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부정적인 방향으로 과장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덕분에 회복 탄력성이 많이 좋아졌다. 아무리 슬픈 일이 생겨도 제시간에 일어나 회사에 간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가벼운 산책을 한다. 대화 도중 슬픈 일을 떠오르게 하는 돌부리를 만나면 걸려 넘어지기 전에 멀리 돌아간다. 미처 피하지 못한 돌부리에 걸려 휘청하더라도 금방 균형을 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하게 웃는다.
---「요즘 우울해 대신 오늘 우울해」중에서
요즘 들어 신세 한탄이 잦아진 친구의 전화를 은근히 피한 게 문득 찜찜하거나, 누군가에게 받았던 다정한 마음이 별안간 떠오를 때. 메신저 앱을 열고 ‘선물하기’ 버튼을 누른다. 뭐 대단한 걸 보내는 건 아니고. 사과즙, 아이스크림, 손선풍기같이, 주는 나도 받는 이도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귀여운 선물을 고른다. 기프티콘을 계기로 호의를 나누는 가벼운 대화를 하고 나면 잠시나마 예전의 ‘좋은 나’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간헐적으로나마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중에서
생계를 유지해 주는 일, 내가 파는 것에 대한 평가가 인생의 전 부인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때면 사는 게 의미 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앞으로 그럴 땐 요리를 해야겠다. 줄 서서 사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비매 품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괜찮은 음식을 만들어야지.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요리를 먹으며 짓는 표정을 공들여 담아둘 테다. 어쩌면 인생의 진짜 의미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팔지 않을 작정으로 열심히 만든 것에.
---「팔지 못하는 재능을 어디에 쓰냐 하면」중에서
존재감이 없어서 괴로웠던 스무 살의 나에게, 친애하는 콩자반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거다. 특이한 이미지나 캐릭터를 타고나지 못했다면 그런 ‘척’이라도 해 보자고. 어차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짜 나’ 같은 건 없으니까. 누군가 근사한 이미지로 봐 주길 기다리지 말고 능동적으로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가면 된다. 스스로를 포장하는 거 아니냐고? 포장 좀 하면 어때.
---「평범해서 괴로운 사람들에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