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책도 땔감으로 삼았다. 종이는 불길이 오래 가진 않지만 아주 잘 탄다. 폭약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샤토브리앙이여 안녕! 괴테여 안녕! 아리스토텔레스, 릴케, 스티븐슨이여 안녕! 마르크스, 라포르그, 생시몽이여 안녕! 밀턴, 볼테르, 루소, 공고라, 그리고 세르반테스여 안녕! 존경 받는 내 소중한 친구들이지만 예술이 필요보다 앞설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야 당신들은 말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 드라마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장작더미와 책을 쌓아 올리고, 석유를 끼얹고, 나중에 쓸 땔감으로 책들을 모아 묶음을 만들면서 나는 한 사람의 고독한 삶, 그러니까 내 생명이 모든 인류의 천재, 철학자, 문인들의 작품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pp.57~58
그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리라. 그녀와 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멀리 있었다. 그녀는 바다 속 존재들에 속해 있었다. 그녀의 세계, 일상생활, 그녀가 살아가는 원리를 생각할 때마다 내 상상력은 벽에 부닥쳤다. 그녀의 갈등을, 그녀의 좌절감과 패배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서 그녀가 자기 종족을 떠나 등대로 숨어들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으리라. 아일랜드 탈영병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그녀가 결코 알 수 없듯이.
--- p.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