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모를 음산한 흥분감이 밀려왔다. 그건 어떤 익숙지 않은 일이 일상을 뒤흔들 때 느끼는 감정으로, 올리버는 이 나이에 이르러 처음 그런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풀장을 중심으로 정원을 훑었다. 정원 끝자락은 마르삭 숲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그 너머 2,700헥타르에 달하는 나무와 오솔길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쪽으로는 벽도 철책도 없었고, 빼곡하게 열 지은 나무와 덤불들이 자연스러운 담장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비교적 최근 축조한 방갈로가 풀장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올리버는 다시 풀장으로 주의를 돌렸다. 폭우로 인해 수면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보이는 저것은… 수면에서 인형 여러 개가 연신 기우뚱거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틀림없는 인형들인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소용없었다. 그걸 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인형들이 서로 부딪치며 춤추는 가운데, 빗방울 통통 튀는 수면 위로 희부연 인형 옷자락이 넘실대고 있었다.
--- pp.20~21
아직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면, 수도꼭지를 완전히 잠그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방울이 수면을 때릴 때마다 조용한 방 안에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해하기 전 먼저 구타를 한 듯했다. 세르바즈는 손을 욕조에 담가 머리를 물 밖으로 꺼내보고 싶었다. 긴 갈색머리를 헤집고 후두골과 두정골을 - 해골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뼈 중 두 개 - 직접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건 법의학자가 할 일이니까.
손전등 불빛이 수면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손전등을 끄자 단 하나의 광원만 남았다. 그 불빛이 물을 반짝거리게 하고 있었다.
세르바즈는 눈을 감고 셋까지 센 다음 다시 떴다. 빛의 진원지는 엄밀히 말해 욕조 안이 아니라 죽은 여자의 입 속이었다. 아주 작은 전등인데, 지름이 2센티미터를 넘지 않았다. 그게 여자의 목구멍 깊숙이 박혀있었다. 그 끄트머리만 중인두와 목젖을 지나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구개와 혀, 잇몸 그리고 치아를 비추고, 밖으로 새어나온 빛은 주위 물속을 회절하고 있었다. 마치 인체로 만든 전등 같았다.
--- pp.57~58
“정신이 들었을 때 오디오세트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무슨 특별한 음악이었나?”
“그게…….” 소년이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제가 그 집에 있을 때 클레르는 종종 음악을 틀어놓곤 했는데 그런 음악은 처음이어서…….”
“어떤 음악이었는데?”
“고전음악이었어요.”
세르바즈는 위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전음악이라면? 등골을 따라 기어오르는 소름이 느껴졌다.
“그녀가 평소에 듣지 않는 음악이었나?”
위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제가 아는 한 그래요. 그녀는 재즈 아니면 록을 들었거든요. 심지어 힙합까지도. 그날 저녁 이전에는 다른 음악을 들은 기억이 없어요. 그래서 정신이 들자마자 순간적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어딘가 모르게 음울한 음악소리가 들려오는데, 집은 인기척 없이 휑하더군요. 정말이지 평상시와는 달랐어요.”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세르바즈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희미하고, 넓게 퍼져나가는 무엇.
--- pp.109~110
이르트만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혹시 성형외과의 힘을 빌리진 않았을까? 머리와 수염을 기르거나 염색을 하고 콘택트렌즈를 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몸무게를 불리고, 말투와 걸음걸이까지 바꿔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을까? 이르트만을 떠올리자니 수많은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세르바즈는 만약 그가 완전히 다른 복장을 하고 얼굴에 분장까지 하고 나타나면 과연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인파 속에서 그 스위스인이 몇 센티미터 앞을 지나친다면…….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온몸을 훑었다.
세르바즈는 CD를 담은 투명봉지를 감식반원에게 돌려주며 투광기 때문에 두 눈을 깜빡였다.
별안간 뱃속이 쓰렸다.
쥘리앙 이르트만이 아내와 정부를 살해한 저녁 선곡한 곡이 바로 [킨더토튼리더]였다. 세르바즈는 초동수사와 이웃 탐문조사가 정리되는 대로 여러 곳에 전화해 몇몇 사람들을 불러들여야 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오래전 사랑했던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형사생활 중 가장 끔찍했던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 어떻게 하나의 범죄현장에 모일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알 듯했다. 그 자신, 검찰의 위임을 받은 수사관일 뿐 아니라 직접 이 사건에 연루된 입장이라는 사실.
--- pp.121~122
“그중에서 단연 흥미로운 케이스가 있었는데, 고속도로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사람의 증언이었습니다. 사진 속 인물이 자기 주유소에 와서 기름을 넣고 신문을 사갔다는 거예요. 모터사이클을 탔는데, 머리를 염색했고, 턱수염을 길렀고, 선글라스를 착용했지만 틀림없이 그 자라는 거죠. 온라인상 사진 중 하나를 빼박았고, 신장과 체격이 일치하고, 어딘가 모르게 스위스 억양이 살짝 실린 말투였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번엔 운 좋게도, 주유소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로 영상까지 확보했다는 거 아닙니까. 주유소 주인 말이 사실이었어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 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한 일이에요.”
세르바즈는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심장이 박동했다.
“주유소 위치가 어딥니까? 언제 그랬다는 거예요?”
“2주 전입니다. 경정님한테는 잘 된 일일 겁니다, 위치가 몽토방 북쪽 고속도로 A20, 두르 숲 구역이거든요.”
“모터사이클은 영상으로 찍혔나요? 번호는 조회해봤어요?”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카메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모터사이클을 세워두더군요. 하지만 툴루즈 방향 좀 더 남쪽에 위치한 톨게이트에서 다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미지가 아주 선명하진 않은데 번호는 처음 몇 개만 확인했고, 계속 조사 중입니다. 이제 경정님의 이야기가 왜 중요한지 이해하겠죠? 문제의 그 바이커가 진짜 이르트만이라면 현재 그는 경정님의 관할구역을 돌아다니고 있는 셈입니다.”
--- pp.209~210
세르바즈는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한편 겁이 났다. 이렇게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동안에도 정작 스위스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과연 스위스인은 어디 있는 걸까?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쥘리앙 알로이스 이르트만은 바로 앞 길모퉁이 사이버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는 것처럼 캔버라나 캄차카반도 또는 푼타아레나를 얼마든지 휘젓고 다닐 법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문득 이방 콜로나의 도주행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론, 경찰, 대테러기관들이 모두 나서서 그가 남미나 오스트레일리아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정작 이 코르시카인은 자신이 범행을 저지른 현장에서 불과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오두막에 숨어있었다.
이르트만은 과연 툴루즈에 있을까?
툴루즈는 도심구역만 따져도 1백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삶의 지향점도 제각기 다를뿐더러 개인적 사연과 집단적 욕구 또한 각양각색인 곳으로 그야말로 다채로운 인구 구성이었다. 자동차도로, 우회로, 입체교차로, 연결로 등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도로망과 그 사이사이 자리한 크고 작은 광장들. 프랑스, 영국,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 알제리, 레바논, 투르키예, 쿠르드, 중국, 브라질, 아프가니스탄, 말리, 케냐, 튀니지, 르완다, 아르메니아 등 주민들의 국적만 해도 십여 개 국에 달했다.
우거진 숲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나무 한 그루라니…….
--- pp.215~216
“말씀드렸다시피 익사한 경우 사망 원인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현상을 분석하다보면 좀 더 확실한 추정이 가능하겠죠. 예컨대 혈액 내 스트론튬 농도가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혈액 안에 존재하는 스트론튬 농도가 여자가 발견된 욕조 물에 근접한 수준을 보일 경우 욕조에 잠겨 익사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음…….”
“사체의 푸르죽죽한 색조도 마찬가집니다. 침수현상은 그런 색의 형성 자체를 지연시키지요. 조직검사도 해봤지만 특별한 게 없었습니다.”
이 말이 세르바즈의 심기를 상당히 건드렸다.
“손전등은요?”
“네? 손전등이요?”
“그 문제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글쎄요. 해석은 그쪽 일이고, 저야 팩트를 다루는 데 만족해야죠. 여자가 패닉 상태였던 건 분명합니다. 심하게 몸부림을 쳐서 몸을 묶은 끈이 살점을 깊이 파고들었어요. 문제는 어느 시점에 그랬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마도 두개골에 치명타가 가해졌다는 가설은 논외로 쳐야할 겁니다.”
세르바즈는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법의학자의 말투에 슬슬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물론 델마는 아주 꼼꼼한 전문가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러하기에 더욱 조심스러워한다는 점 역시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건 뭔가 좀 더…….”
“딱 떨어지는 결론 말이죠? 분석이 낱낱이 행해지고 나면 아마 그런 게 나올 수 있을 겁니다. 현재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자가 산 채로 욕조에 빠져 익사했을 확률이 95퍼센트에 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정도면 그리 모호한 결론이라고 할 순 없죠, 안 그렇습니까?”
--- pp.304~306
“한 가지 충고하겠습니다. 당신은 말할 때마다 은연중 ‘제가 생각하기엔’이랄지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같은 표현은 쓰는데 좀 자제하세요.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개인적 의견 따위는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행동과 사실입니다.” 까칠한 말투였다.
정당대표는 뭐라고 받아치고 싶었으나 일단 성질을 죽였다. 언제 입을 닫는 게 좋은지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 정치인이었다.
“그 형사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
“1년 반 전에 에릭 롱바르를 쓰러뜨린 바로 그 형사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장관은 곰곰이 생각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0시 12분.
“법무부장관에게 연락을 취해야겠소.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어떻게든 이 문제를 진정시켜야 합니다. 당신은 어서 라카즈에게 연락해 내가 좀 만나자더라고 전해주세요. 당장 내일.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아봐야겠습니다. 빠를수록 좋다고 하세요.”
장관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고 나서 법무부를 총괄하고 있는 여인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녀로 하여금 사건을 관장하고 있는 사법관들을 신속하게 파악하도록 조처할 필요가 있었다. 아주 잠깐 그는 법관들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버린 시대, 어떤 사건이든 마음만 먹으면 묻어버릴 수 있는 이 나라의 상황이 한탄스러웠다. 프랑스 1급 형사 경력이라는 게 고작 불법도청과 정적에게 불리한 보고서 작성, 악의적 조치 등으로 얼룩져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어쩌면 그런 시대를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요즘은 말단 수사판사들까지 여기저기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대는 바람에 조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철저히 조심해야 할 형편이었다.
--- pp.393~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