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그랬을까.’
저수지에서 있었던 일을 여러 번 곱씹어 봤지만, 로지의 뇌는 그 어떤 실마리도 내놓지 않았다. 마치 누가 단칼에 싹둑 베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로지는 태평에게 발견되기 전의 기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많이 놀랐겠지.’
자투리만 남은 기억 속에 선명한 건 온통 태평과 관련된 것뿐이었다. 절박하다 못해 괴로움에 물들었던 얼굴, 제 이름을 부르던 갈라진 목소리, 자신을 끌어안은 팔이 무섭게 떨리던 느낌까지.
이성을 잃은 태평은 흡사 미친 사람처럼 굴었지만 로지의 머리를 감싸며 끌어당기던 그의 손은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코끝에 눌린 그의 가슴팍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고, 물기에 젖은 그의 몸은 로지의 떠는 몸을 달래 줄 만큼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으니까.
‘집에 가자.’
집으로 가자는 태평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로지는 하마터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착각할 뻔했다. 자신을 안고 걷던 태평의 다리가 여러 번 휘청이지 않았다면, 그의 입술이 눈물을 참듯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지 못했다면, 이 모든 게 악몽이었다고 생각하며 간단히 넘겼을 수도.
‘이제 어쩌면 좋지.’
로지는 마른 입술만 달싹였다. 불필요한 오해는 풀고, 태평에게 준 상처도 다독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그저 숨이 막힐 뿐이었다. 물에 빠졌을 때도 편했던 호흡이, 왜 지금은 질식할 것처럼 막혀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옆으로 누웠던 몸을 바로 했다. 늘 봤던 천장과 비교가 안 되는 높은 천장이 보였다.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태평은 이불 없이 짙은 남색 가운만 입고 로지에게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태평아.’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는 태평의 등은 소리 한 점 내고 있지 않았다. 로지의 편안한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몸을 돌려 태평 쪽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을 펼쳐 그의 등에 댔다. 두툼한 소재로 된 가운 너머로 뜨뜻한 체온이 감지됐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여전히 로지인 것처럼, 그도 여전히 태평인 것 같아서.
“건드리지 마.”
사나운 말투에 로지의 손이 반사적으로 그의 등에서 떨어졌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가시 돋친 소리가 다시 들렸다.
“뭐가 문제야.”
“…….”
“내가 다 해결해 줬잖아.”
“…….”
“돈이고, 사람이고, 복수고. 너 귀찮게 하는 것들은 내 손으로 다 치웠는데, 뭐가 또 문제냐고.”
자제력을 잃은 심정을 대변하듯, 태평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격양되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
“내 눈앞에서, 내 부모가 불에 타 죽었다고 했잖아. 사람 살 타는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진동해. 내 발목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고막을 찢고 싶게 만든다고.”
“…….”
“그런 내가, 이젠 네가 죽는 것까지 봐야 하는 건가?”
거친 언사가 섞인 태평의 말에 로지의 얼굴은 고통으로 얼룩졌다. 로지는 멍한 눈으로 그의 등을 좇았다. 눈앞에 있던 태평의 등이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 다시 손을 뻗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순식간에 몸을 돌린 태평이 상체를 세웠다. 로지는 자신을 양팔로 가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일그러진 눈이 분노로 치민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붉어져 있었다.
“이게 네가 말한 사랑이야?”
“…….”
“날 버리지 말라고 했더니, 너를 버리는 게?”
“…….”
“내가 고작 이런 꼴을 보려고, 한국에 온 줄 아냐고!”
고집스럽게 로지를 보고 있던 눈이 무너져 내렸다. 둑을 터뜨리고 쏟아진 태평의 분노 앞에서 로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살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고,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도 나를 모르겠으니 용서해 달라는 말들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차마 뱉어지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