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반정세력의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불운한 왕이다. 죽은 후에도 ‘폭군’으로 낙인찍힌 채 임금이 받는 칭호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데 광해군이 폐위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평가 뒤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광해군을 폐륜군주로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던 정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과연 어떤 왕이었을까? --- p.20, 광해군 편
창왕은 사비시대를 이끈 백제 27대 임금이다. 죽어서는 위덕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낯선 이름만큼이나 백제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07년 10월, 창왕의 미스터리를 풀어줄 귀한 유물이 발굴됐다. 부여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1400년 전 사리함이 그것이다. 사리함에는 잃어버린 후기 백제사의 공백을 채워줄 명문(銘文) 기록이 남아 있었다. 창왕의 슬픔과 고뇌를 고스란히 담은 기록이었다. --- p.45, 백제왕 창 편
우씨는 한때 고국천왕의 부인이었다. 고구려 제9대 왕인 고국천왕과 결혼해 17년 동안 왕후로 살았던 그녀는 고국천왕이 사망하자, 차기 왕인 산상왕과 재혼했다. 우씨는 한 몸으로 두 번 왕후가 된 역사상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상 최대의 스캔들이었다. 왕후가 차기 왕과 재혼을 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사건의 배경엔 우리가 잘 몰랐던 초기 고구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 p.107, 우씨 왕후 편
구화산이 등신불의 성지가 된 것은 서기 794년, 한 스님이 열반하면서부터였다. 그의 이름은 김교각, 신라 왕자라고 중국의 역사서는 적고 있다. 열반 후 등신불이 돼서 자신의 서원을 이루고 구화산을 지장보살의 성지로 일군 김교각이 정말 신라 왕자였다면, 그는 왜 신라가 아닌 당나라에서 구도자의 삶을 살았을까? --- p.134, 김교각 편
춤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정치가이자 예술가였던 효명이 살다 간 19세기 초는 전 세계가 산업자본주의의 격랑에 휩쓸리던 시기였다. 이웃 일본은 이런 세계사의 흐름을 발 빠르게 받아들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 조선에는 무력해진 왕권과 부패한 관료사회를 바로잡고 새로운 조선을 꿈꾸던 왕세자 효명이 있었다. 3년여의 짧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뛰어난 정치력과 예술적 상상력으로 국정을 장악했던 효명세자.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효명이 급서하지 않고 계속 집권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사뭇 달라지지 않았을까? --- p.185, 효명세자 편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지지를 힘입어 고려를 자주적인 독립 국가로 세우고, 기울어가던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그러나 조선은 아내를 잃은 공민왕의 말년을 강조함으로써, 공민왕을 부패하고 정신을 놓아버린 반쪽짜리 군주로 정의하고 있다. 고려의 왕을 폄훼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명분을 세우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까지는 모욕하지 못했다. 「고려사」 곳곳에는 이 두 사람의 든든한 파트너십과 변치 않는 신뢰에 대해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쇄락하고 있던 고려의 마지막 부흥기는 이들의 사랑이 있어 가능했고, 이 사실은 6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 p.213, 공민왕과 노국공주 편
비극의 역사를 견뎌 그것을 기록한 여인, 혜경궁 홍씨. 그녀의 책 「한중록」은, 시대의 약자였지만 역사의 불명예자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던 한 조선 여인의 처절한 삶의 기록이다. 혹자는 혜경궁이 친정 식구들의 정치적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한중만록」을 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왕의 며느리이자, 어머니, 할머니로 궁궐에서 70년을 살았지만 아무런 주도권도 가질 수 없었던 조선의 여인이라는 점이다. 환갑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여유롭게 쓰기 시작한 회고록이 피눈물의 기록이 되도록, 혜경궁은 말년까지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 p.271, 혜경궁 홍씨 편
흥선대원군과 고종이 살다 간 19세기 조선은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 같은 거대한 전환기였다. 두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아들 고종도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위기의 조선을 다시 일으켜세워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타협할 줄 몰랐던 흥선대원군은 결국 아들과 대립하며 갈등하는 사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부국강병의 길을 놓쳐버렸다. 어쩌면 흥선대원군의 비국은 아들의 능력을 믿지 못함으로써, 아들이 해야 할 국왕의 정치를 대신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p.303, 흥선대원군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