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을 때, 심지어 돈이라고는 통장을 다 털고 저금통을 탈탈 털어도 10원짜리 서너 개밖에 없는 경우에도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려고 했다. 항상 내일은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젊을 때부터 자신의 힘으로 풍족하게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지금 당장의 주머니보다는 인생이 풍부해지는 경험을 어떻게 쌓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온 것 같다. 사실 그 경험들을 하면 할수록 주머니가 두둑해지기보다는 가벼워지기 십상이지만 나는 앞을 보며 살고 싶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것보다는 훗날 인생의 경험이나 추억이 부족해지는 것이 훨씬 더 무서운 악몽이었다.
…… 언제 잃을지 모르는 재산보다는 자칫 위험해 보일 만큼 순수한 감성으로 ‘경험’과 ‘추억’에 쏟아 붓는 삶. 나는 항상 이쪽을 택한 것 같다.
- 033p, ‘조금 불편할 수 있는 가벼운 주머니’ 중에서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기,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모두 마지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디자인 작업에서는 더더욱 마무리가 중요하다. …… 루이즈 윌슨을 포함한 모든 강사들의 고함 소리에서도 알 수 있다. 어렵게, 정말 어렵게 고안해낸 새로운 피니싱 기술로 마무리한 의상 샘플을 들고 가면 그들은 입을 모아 얘기한다.
“누구 입힐 거야? 헤어와 메이크업 아이디어는? 음악은? 무대는? 조명은? 분위기는? 포즈는?”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겠지만 아무리 대답해도 질문이 끝나지 않는 직업이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든지 말든지는 선택 사항이지만 속 시원히 대답해 버리려면 작업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순수함은 리서치와 고집 그리고 피니싱이 모두 가능해지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 062p, ‘세인트 마틴이 가르쳐준 것들’ 중에서
사람들에게 아끼는 말인데, 사실 나는 마돈나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 세월이 흘러도 기억될 수밖에 없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마돈나의 성공은 정말 본받을 것이 많다. 타고난 미모와 천재성만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받기 힘들 것이다. 그녀는 신념을 가지고 소신 있게 노력하면 언젠가는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내 마음속 스승이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속 비밀의 스승.
한철만 반짝이는 예쁘장한 꽃들을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마돈나의 행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끝까지 존재하는 것은 무조건 아름다운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고서 어떻게 아름다움을 논할 수 있겠는가. 마돈나 포에버!
- 080p, ‘꽃보다 노력’ 중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참 안타깝다. 사실 안타깝고 아픈 것보다 부끄럽다는 게 더 큰 문제일 때가 있다. 하지만 미끄러지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미끄러지면 포기하고 그냥 주저앉는 것이다. 그럴 땐 누구나 미끄러질 수 있다는 것을 빨리 기억해내고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굴하지 않고 계속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미끄러짐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줄 것이다. 미끄러짐을 알면 다시는 미끄러지지 않아야겠다는 교훈을 얻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하지만 그 누구나 아는 얘기를 실천하는 것은 참 쉽지 않다. 일단 한번 미끄러지고 일어서보지 않는 한!
- 088p, ‘미끄러짐’ 중에서
런던 거리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옷은 버리면 손해다’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잘 보관해두면 언젠가 그 트렌드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캄든 마켓이나 노팅힐 마켓 등 빈티지 패션으로 유명한 곳에 가면 반복해서 드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아니! 저것은 짐정리 좀 하라는 엄마의 등살에 못 이겨서 버린 옷이랑 비슷하잖아!’ 한번은 캄든 마켓의 빈티지 옷 더미에서 타탄 체크 아이템을 열심히 찾는데 친구가 살짝 비아냥거리는 투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어떤 사람의 쓰레기는 다른 어떤 사람의 보물!”
- 135p, ‘돌고 도는 돌림병, 빈티지 바이러스’ 중에서
옷을 잘 입고 싶은가? 그렇다면 경험을 두려워하지 마라. 돈 걱정은 일단 접어두고, 의류 매장에서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경험을 실컷 누리기를! 사이즈별로 모두! 컬러별로 모두! ‘시간이 없다’ ‘눈치 보인다’는 식의 변명은 집어치우고 이 옷 저 옷 입어보면 톱 스타일리스트의 조언 없이도 금방 발견할 것이다. 자신이 가장 멋져 보이는 스타일을.
- 143p, ‘뛰는 놈, 나는 놈, 경험 많은 놈’ 중에서
항상 이용하는 골목, 대문을 열면 어김없이 존재하는 길바닥, 눈을 뜨고 얼굴을 들면 열려 있는 하늘, 하나도 생소하지 않은 동네 놀이터, 난생 처음 보는 눈매를 가진 이방인과 그들의 옷차림, 그리고 그 이방인들에게는 너무나 낯설지도 모르는 나.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아름답지 않은 색은 없다’ ‘어울리지 않는 색은 없다’
정말 안타까울 것이다. 내가 눈을 감을 때,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 만져보지 못한 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눈을 감으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검은색을 왜 그렇게 좋아할까?
- 153p, ‘colour colour colours’ 중에서
역시 어느 한 도시에서 사는 것과 그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달라도 아주 다르다. 마음가짐, 기분, 가고 싶은 곳, 가야 하는 곳, 사람들, 친구들. 그중에서도 가장 다른 것은 바로 ‘내 옷장이 없다는 것!’
옷장에 옷을 가득 채워도 입을 옷이 없는데, 조그만 트렁크에서 뭘 입으라는 것인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습할 때도 건조할 때도 틈만 나면 구불거리는 내 반곱슬머리를 잠재울 모자는? 기분 따라 마음 가는 대로 쏙쏙 골라 입는 내 컬러 티셔츠 컬렉션은? 욕심 때문에 떠나는 여행에서 욕심을 버리는 법을 배운다. 여행 가방을 꾸릴 때마다.
- 171p, ‘하상백의 런던 룩’ 중에서
‘월 화 수 목 금’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지난한 일과를 뒤로하고 주말 파티를 위해 신나게 놀기로 작정했다면 남의 시선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해서 놀 수 있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말쑥한 회색 슈트를 벗고 초록색 닌자거북이가 돼보는 것, 스커트 정장을 벗어던지고 번쩍이는 레깅스에 마돈나의 브라톱을 믹스매치하는 것, 그리고 끝없이 돌아가는 디스콜 볼 아래에서 형형색색의 타이츠로 휘감은 몸을 열정을 다해 흔드는 것.
오늘의 위너이자 인생의 위너인 댄스 플로어의 영리한 사람들은 눈치를 살피며 점잖을 떠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듯하다.
“웃어라, 세상이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 222p, ‘댄스 플로어의 영리한 사람들’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