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만큼 불행해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나를 버리기 때문이다. 그럴 때 불행이라는 녀석은 나를 재빨리 낚아채 저 나락으로 사정없이 패대기친다. 내가 나일 때, 내가 나의 결점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고쳐지지 않는 나만의 흠집이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행복이 창문을 열어 준다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원심력, 구심력이 필요한 이유는 빳빳한 견제라기보다 부드러운 균형감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수평적 생각에 길들여지는 것. 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라는 수직적 사고인 교만을 버리면 수평이 이루어진다. 인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미약하고 부족한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인식했으니 내 곁에 변함없이 머물러주는 달과 같은 그 사람이 있어서 부족함이 채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어려움을 견디고 힘든 것에 저항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그 존재가 있어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겠다.
‘얀테의 법칙’이 소낙비처럼 생각의 지붕을 두드려댄다. 그 사람과 함께 여는 오늘도 작은 행복 하나를 호주머니에 주워 담는다. 호주머니가 점점 두툼해진다.
--- p.17, 「박모니카·삭」 중에서
세상이라는 난바다를 헤엄쳐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물고기 한 마리씩 키운다 했거늘 잡았다 놓친 물고기가 어디 이번뿐일까. 사는 일이 그날이 그날일 때 세상을 힘껏 비틀어 쥐어짜고, 삐딱하게 바라보리라. 낯섦에서 오는 긴장과 설렘, 신선한 충격이 나를 변화시키는 미끼로 낚아챌 것이다. 감성이 메말라 가는 나이에 펄떡펄떡 살아 있는 감성 언어의 출몰을 기대하며 야간조업에 나선 나는 초보 낚시꾼이다.
--- p.47, 「고경서(경숙)·감성어 낚시」 중에서
뿌웅~, 하행열차가 태백역 쪽으로 달음질친다. 고추를 말리던 노인이 굽은 허리를 편다. 살살이꽃들이 쉬어가라는 듯 연분홍 손을 흔든다. 여기선 아직 기적 소리가 유효한가 보다. 나는 백 년의 시간여행에서 돌아와 기적소리의 정서적 지향점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한 시절, 지아비와 자식들을 싣고 폭폭, 눈 내리는 마을 에둘러 가뭇없이 멀어지던 기적 소리, 격동의 환절기를 돌아온 사람이라면 누군들 기적 소리에 실려 온 추억 한 장 없을까. 쓰윽, 기적의 여음을 닦으니 오래된 어머니가 달려 나온다. 그랬을 것이다. 저 기적 소리는 세상의 모든 길을 돌아 종내는 그곳으로 돌아갔으리라. 기다림 쪽으로 가고 어머니를 향했으리라. 기적 소리가 번성하던 시절, 기차는 역장의 발차전호로 떠나고 기적은 매번 어머니의 손끝에서 울었기에, 어쩌면 파랑 같은 한 시대를 떠밀고 온 힘은 어머니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여리면서도 강한, 그 손끝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대가 있는 것이라고, 그 힘으로 오늘 하루를 견인하는 것이라고, 기적 소리는 그 멀고 아련한 잠언들을 일깨우며 내 생의 간이역을 지나간다.
--- p.69, 「김만년·기적소리, 그 멀고 아련한 것들에 대하여」 중에서
나는 가끔 부재한다. 존재를 닫는다. 분명 있던 자리에 사라지고 없는 것이 생긴다. 아무리 검색해도 페이지를 못 찾아 허탈할 때가 있다.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꼭 찾고 싶은 주소가 있어 이백이십 볼트의 플러그를 꽂는다. 전원이 켜지면 아침을 로그인했다가 저녁을 로그아웃한다. 하루를 끄기 전에 열어본 페이지를 찾아 모두 삭제하고 새로고침 단추를 누른다. 새로고침은 흔적을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내일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다. 페이지를 새로 고치시겠습니까? 네.
--- p.123, 「김희정·새로고침」 중에서
대신 그런 사소한 단점을 받아들인 그는 조촐한 기쁨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얀 바탕에 한 자씩 의지를 새기는 쾌감, 유리창을 깨끗이 닦은 듯 점점 맑아지는 풍경이 주는 행복감, 주변을 머무는 것과의 기묘한 일체감, 귀로 들어오는 여러 소리가 음악이 되는 차분한 고양감, 미지근한 물에 잠긴 듯한 정신이 빠르게 또렷해지는 각성, 그리고 헝클어진 몸과 마음이 차곡차곡 다시 맞춰지는 그 안도감까지. 그쯤 되면 그는 어엿한 글쓴이가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주변 모든 것이 망가진 채 몸이 피폐해지고 마음이 무너졌을 때 그 순간을 견디는 방법이 남들보다 한 가지 더 생긴 것이다. 하얀 종이에 글씨를 새기든 종이의 껍질을 벗기든 오늘을 내일로 이어붙일 자신만의 수단과 과정을 마련한 사람이 된다. 날이 밝는 대로 이 종이 뭉치를 불태우고 죽자며, 그 핑계로 지금 좁고 낮은 방에서 험난한 새벽을 넘길 수 있을 그라서 다행이다.
--- p.159, 「이한얼·글쓴이의 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