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사상의 형성에 프렉은 어떤 기여를 했는가?
프렉의 경험적 인식의 배경은 ‘의학’이다. 과학이론에서 의학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온 분야지만, 프렉이 의학적 사실을 들어 도달한 결론은 그 당시 논쟁의 주도자인 비엔나학파가 도달한 결론과 아주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프렉은 의학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문제를 예로 들면서도 세부적으로 하나의 증례 연구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것은 매독 개념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것이고, 그리고 바서만과 그의 동료들에 의한 연구결과에 관한 것이다. 바서만 연구팀은 처음으로 (이른바 ‘바서만 반응’이라 불리는) 매독의 진단에 대한 도구를 제공한다. 1920년대에 프렉 자신도 여기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프렉의 연구는 단순히 사회적 인식론의 선구자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프렉의 『과학적 사실의 기원과 발전』이 출판되고 나서 80여 년이 흘렀지만, 프렉의 책이 여전히 과학사회학의 연구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음을 우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프렉 사상의 독창성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① 프렉은 근본적으로 과학이론을 사회화한다. 과학이론을 사회화했다는 관점에서 볼 때 과학적 활동의 집단적 성격은 새로운 생각을 다듬고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데 결정적이다. 프렉의 관점은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생각의 원천은 특정한 개인의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집단의 활동에서 유래한다. 이를 매개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사고 교류’Denkverkehr다. 프렉은 사고 교류를 집단 내 사고 교류와 집단 간의 사고 교류로 구분했다. 집단 내 교류는 집단을 안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것은 집단의 실제적인 사고 양식을 반복적으로 확인해 줌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집단 간의 교류는 집단 외부에서 오는 영향을 제공한다. 이 영향은 변화에서 초래된 것이다. 개인은 여러 사고 집단에 속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집단에 속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각 개인에게는 이와 상응하는 사고 양식이 나타난다. 그래서 한 집단 속에서 각자가 하나의 생각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하나의 생각에 대한 생각이 각자 다르다면, 여기서 오해가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오해가 사고 양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어떤 의미에서 프렉은 과학적 언어의 전통적 견해를 뒤집어 버린다. 논리실증주의에 의해 ‘의미의 불변성’은 과학적 인식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지만, 이제는 제거될 수 없는 오해가 과학에서 변화와 발전의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 셈이다. 물론 프렉도 언어의 역할을 과학자들 가운데 사고 교류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강조한다(프렉이 처음으로 텍스트의 비교를 통한 내용 분석법을 연구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언어적 소통은 집단의 양식에 따른 협동에 충분한 것이 아니다. 과학에서 협동은 확실하게 형성될 수 없는 실천적 경험을 통해 보완되어야만 한다.
② 프렉은 근본적으로 과학이론을 역사화한다. 그는 과학적 발전을 누적적이고 진보해 간다는 기존의 견해 대신에 끊임없는 사고 양식의 변화로 과학이 발전해 간다는 견해를 채택했다. 과학은 역사적으로 발전되고, 사회학적으로 제약되며, 과학 상호 간에 작용한다. 이 구조의 역동성이 과학의 발전적 힘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발전을 진보나 진화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과학의 발전은 사고 양식과 관련 있고, 사고 양식이 바뀌면 이와 관련된 특성이 상실된다. 양식과 관련 없는 것들은 모두 부적절한 것이고, 더는 ‘자명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인식이 부상하면, 낡은 것은 사라진다. 그러나 프렉은 -쿤과 달리- 과학에서 급작스러운 혁명에 관해 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생각과 인식의 전제조건은 과학자들이 알아채지 못하게끔 서서히 변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어떤 ‘선행 이념’ 또는 ‘근본이념’은 오랜 기간 살아남는다. 그 이유는 선행 이념과 근본이념이 많은 사고 집단의 생성을 연구하는 발견적 지침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고, 또한, 새롭게 등장하는 학파의 연구 집단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재사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행 이념과 근본이념은 새로운 사고 양식의 틀 내에서, 그리고 새로운 사고 양식의 바뀐 전제조건에 따라 재해석된다. 이로써 낡은 생각과 새로운 생각이 서로 병합되고, 따라서 사고 양식의 연속성도 보장받게 된다.
③ 프렉은 사고 양식의 틀에서 과학적 사실의 형성을 재해석한다. 과학적 사실은 과학적 활동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학적으로 제약되고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사고 양식은 스스로 과학자의 인식에 부과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프렉이 인식의 능동적 요소와 수동적 요소를 구별한 것에 관해 언급해야만 하겠다. 사고 양식의 전제조건은 집단에 의해 능동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과학자가 찾는 것은 능동적 ‘설정’에서 유래하는 수동적 연결이다. 우리가 어떤 전제조건을 이루는 것은 능동적 설정 속에 포함된 수동적 연결을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어떤 전제조건이 ‘자연스럽게’ 경험된다. 과학자는 이러한 경험과 관련하여 다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인데, 사실의 인식 과정을 그는 저항으로 느낀다. 사고 집단이 발전된 사고 체계 내에서 저항과 협동한다면, 이 저항은 보다 분명한 ‘사고의 힘’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지각된 형태로 된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은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사고 양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 점에 관해 프렉은 더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결코 상대주의적 해석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둬야 하겠다. 왜냐하면, 수동적 요소와 능동적 요소의 연결은 단지 설정된 전제조건에서만 유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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