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최고 업적은 단연 훈민정음이다. 하지만 정음 창제 초기에 세종은 최만리를 필두로 하는 당대 최고의 두뇌집단인 집현전 학자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만 했다. 세종은 언문을 이용하여 충분히 조선과 중국의 한자음을 통일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지만, 최만리 등의 집현전 학자들은 언문이라는 새로운 발음기호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운서 번역과 같은 국가적인 사업을 졸속으로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종은 한술 더 떠 이 언문을 훈민정음이라는 정식문자로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우리 겨레의 언어생활을 한문의 틀 속에서 해방시키겠다는 파천황의 결단이었다.
---‘세종, 스물여덟 자로 천하를 꿈꾸다’ p.12
‘만일 내가 왕이 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언젠가 충녕은 이런 생각을 했다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앞에는 둘째 형인 효령대군 보도 있지 않은가. 딴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책이나 읽자. 공자님께서도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고 하지 않았던가.
---‘준수방에서 눈을 뜨다’ p.43
“나는 조선에 올인한 사람이니 자식들을 생각해서 자중하시오. 오버하면 당신과도 남남이오.”
태종은 세자를 불러 준엄하게 경고했다.
“왕권을 무시하는 자들은 다 저렇게 된다. 너도 함부로 냄새피우지 마라.”
“물론입니다. 저들은 저들끼리 김칫국 마신 겁니다.”
세자는 짐짓 태연하게 대처했지만 가슴이 서늘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환관 황도의 충고에 따라 근신하는 척했을 뿐이었다.
“어찌 저리 독불장군인지 원.”
“그래도 자중하십시오.”
“괜찮아. 저런 깜짝쇼가 다 나를 임금 만들려고 하는 일이니까.”
---‘만세의 대들보를 세워라’ p.55
1418년 8월 11일, 세종은 근정전에서 반포한 즉위교서에서 ‘시인발정---施仁發政)’, 곧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어짊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통치 이념을 천명했다. 태조 이성계로부터 선대 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정치가 개혁의 바람을 타고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적극적인 덕치를 펼침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이룩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상쟁이 아니라 상생의 시대를 열겠다.”
---‘어짊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p.112
1430년 3월, 임금은 새로운 조세제도에 대한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명했다. 전제군주시대에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론조사의 의제는 모든 농지 1결당 미곡 10두씩 거두는 정액제 조세제도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였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나라에서 세금을 어떻게 거둘까를 백성에게 묻다니…….”
백성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여론조사에 적극 응했다. 여기에는 관리들에 대한 세종의 독려도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다섯 달 동안 17만 명 이상의 백성이 참가했다. 8월이 되어 그 결과를 집계해보니 찬성 9만 8,000여 명, 반대 7만 4,000여 명이었다. 대략 57퍼센트의 찬성률이었다. 국민투표로 따지면 과반수를 넘은 것이다.
---‘민심이 천심이다’ p.143
세종은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었다. 조회에서는 같은 품계 중에 가장 서열이 앞서는 반두---班頭)가 되게 했고, 결원이 생기면 집현전, 이조의 당상관과 의정부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을 추천받아 보충했다.
“너희는 엘리트 중에 엘리트야. 열심히 하면 하는 만큼 보상해줄게.”
세종은 그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고 음식을 내려주었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사들은 궁궐 안에서 근무했으며 아침과 저녁도 궁궐에서 먹었다. 세종은 그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 일인 양 흐뭇해 했다.
---‘수성의 열쇠는 학문에 있다’ p.187
“나는 우리 백성에게 훈민정음을 널리 가르쳐 일상 문자로 사용하게 할 예정이다. 말과 글이 같으니 자기 뜻을 표현하기 쉬울 게 아닌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한자를 버리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 한자는 학문, 언문은 실용문자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 정도라면 지금의 이두로도 충분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번거로움을 자처하십니까?”
“옛날 설총이 이두를 만든 것은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해서였다. 언문도 마찬가지다. 그대들은 설총은 옳고 나는 그르다는 뜻이냐?”
이렇듯 세종과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의 학자들은 맹렬하게 토론을 벌였다.
---‘한 겨레의 글자를 만들다’ p.240
내불당 건립 문제는 정당한 토론이 아니라 군신 간에 감정싸움으로 비화되었다. 정갑손과 첨사원 첨사 김구, 대간, 종부시 판사 등과 승문원 판사 김황 등이 상소했다. 심지어 세종이 불당을 세우려면 사사---寺社) 창설을 금지하는 법을 없애야 하며, 이것은 군주가 만든 법을 군주 자신이 파괴하는 우스운 꼴이라고 비꼬기까지 했다. 또 대간은 불교 신앙의 일곱 가지 불가론을 제시하면서 여말선초의 배불론을 역설했다. 더군다나 집현전 대제학 정창손은 도를 넘는 비난을 쏟아냈다.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니 전하께서는 교만하고 편안해져서 토목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지금 너희는 한 가지 일로 세 번 간하는 것을 이미 지나서 열 번 간하는 것에 이르렀다. 나를 임금으로 보기나 하는 것이냐?”
“이런 간언은 백 번이라도 할 것입니다. 듣기 싫으시면 저를 쫓아내십시오.”
“그게 네 뜻이라면 그렇게 해주지.”
---‘누가 내 마음을 달래주리오’ p.274
태종의 맏아들 제는 졸지에 세자에서 양녕대군이 되어버렸다. 임금이 될 사람이 돌연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뒤바뀐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상황, 이젠 살아남는 것만이 절대 과제가 되어버렸다. 그는 입을 앙다물었다.
“두고 보아라. 이대로 엎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처연한 미소와 처진 어깨를 보여야 했다. 그가 보기에 새로 세자가 된 충녕은 따뜻한 가슴보다는 냉철한 이성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자칫 그의 비위를 건드렸다간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다.
---‘나는 왕위를 양보하지 않았다-양녕대군 이제’ p.288
자격루를 완성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한 장영실은 계속 발명 의욕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5년 후인 1438년 그는 더욱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어냈다.
“아아, 이건 환상이야. 농업국가인 조선에 이처럼 유익한 발명품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세종은 새삼 장영실의 능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는 자신의 집무실인 경복궁 천추전 서편에 흠경각을 짓고 옥루를 설치한 다음 수시로 관찰했고, 우승지 김돈에게 〈흠경각기---欽敬閣記)〉를 짓게 했다.
“여보게, 이게 대체 어떻게 해서 움직이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전하께서 들으셔도 잘 모르십니다. 저만이 아는 특별한 메커니즘으로 작동되는 거거든요.”
“하하, 그렇단 말이지. 좋아, 좋아. 아무튼 자네 때문에 내가 요즘 참으로 즐겁네.”
---‘신분의 한계에 도전하다-장영실’ p.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