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은 암흑 속에서도 빛나며, 어둠이 빛을 가릴 수 없는 법이다. 어리석게 살 것인가, 동물적 삶을 부정하고 현명하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진리의 가르침에 의해 해결된다. 진리의 가르침은 행복의 가르침으로 일컬어진다. 진리의 가르침은 동물적 자아가 찾는 거짓된 행복 대신, 그리고 언젠가 어디선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행복 대신, 항상 지금 당장 이 곳에서 얻을 수 있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진정한 행복을 제시한다. 이런 행복은 이론 상의 행복이 아니며 어디선가 찾아내야 할 행복도, 언젠가 어디선가 얻기로 약속된 행복도 아니다.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면 매료될 행복이며, 누구에게나 가장 친숙한 행복이다. 모든 사람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동물적 자아의 행복보다 높은 차원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큰 행복은 동물적 자아의 욕구 충족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동물적 자아의 행복에서 벗어날수록 더 커진다. 인생의 모든 모순을 해결하고 인간에게 큰 행복을 선사하는 그 감정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 p.146-147
- 이 사람의 행복은 사랑에 있다. 이것은 식물의 행복이 햇빛에 있는 것과 같다. 즉 충분한 햇빛 속에 있는 식물은 어떤 방향으로 자라야 좋은지, 더 멋진 다른 빛을 기다려야 할지 따위를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그래서 세상의 유일한 빛을 향해 뻗어 나간다. 이와 같이 동물적 자아의 행복에서 벗어난 사람은 타인에게서 빼앗은 것을 사랑하는 이들 중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지금 사랑을 원하는 대상보다 더 나은 사랑의 대상이 있지나 않을지 고민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앞에 놓인 사랑을 위해 자기 존재 전체를 바친다. 오로지 이런 사랑만이 인간의 이성적 본성을 완전하게 만족시킨다.
--- p.165
-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참된 사랑이다. 인간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내어주고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고 자신의 생명을 바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한다. 행복은 오직 이런 사랑 속에서 얻게 되는 선물이다. 사람들 내면에 바로 이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자신의 몸을 아이의 먹이로 내어준다. 아이는 이런 사랑 없이 살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
--- p.166
- 사랑은 선택된 사람과 대상을 향한 사랑처럼 개인의 일시적 행복을 확대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동물적 자아에서 벗어난 후 인간 내면에 남는 것으로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번이라도 이 감정을 느껴 보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 행복한 감정을 모를 수 없다. 우리 생명을 억압하는 그릇된 가르침에 의해 영혼이 더럽혀지기 전, 아주 어린 시절 자주 경험했을 바로 그 감정이다. 이 복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면 모두를 사랑하고 싶어진다. 가까운 사람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악한 사람, 적, 개, 말, 들풀 모두를 사랑하고 싶어진다. 또한 오로지 모두가 잘 되고 모두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며, 모두가 잘 되기 위해서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삶을 바치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유일한 사랑이며, 그 안에 인간의 생명이 존재한다.
--- p.169
- 난 죽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두려운가? 육체 속에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어 왔는데, 과연 내가 그 변화를 두려워했는가? 무엇 때문에 아직 닥치지 않았으며 나의 이성과 경험에 어긋나지 않는 이 변화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이 변화는 내가 이해할 수 있으며 친숙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동물과 인간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이고 기꺼운 삶의 조건이라고 받아들였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사실 냉철하게 볼 때 논리적 인생관은 두 가지뿐이다. 첫 번째 인생관은 출생과 죽음에 이르는 동안 자신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인생이라고 여긴다. 두 번째 인생관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내면의 의식으로 인생을 이해한다. 전자는 그릇된 인생관이고 후자는 참된 인생관이다. 하지만 둘다 논리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둘 중 하나를 자신의 인생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 인생관을 선택하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 p.178
-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허무하고 암흑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무와 어둠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이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183
- 내 육체는 비물질적이고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통해 내 육체라고 인정되는 어떤 것일 뿐이다. 내 몸은 수십 번이나 바뀌었다. 노화된 것은 무엇이든 사라졌다. 근육, 내장, 뼈, 뇌 등 노화된 모든 것이 변했다. 이처럼 끝없이 변하는 육체를 유일한 자신의 육체로 인정하는 데는 물질이 아닌 무엇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질이 아닌 그 무엇이란 바로 우리가 의식이라 부르는 것이다.
--- p.186
- 나의 내면에도 하나의 동일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삼십 년 전 내 육체와 현재의 육체가 가진 물질이 다르듯이, 세 살 적 아기일 때 의식과 현재 내 의식은 다르다. 불변하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세분할 수 있는, 연속적인 여러 의식이 존재한다.
--- p.187
- 연속적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의식을 하나로 연결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 바로 “‘나’는 이것을 사랑하고 저것은 사랑하지 않는다.” 란 말이다. 이 말은 아주 단순하지만 그 안에 모든 의식을 하나로 연결하는 특수한 ‘나’가 무엇인지 해결할 열쇠가 있다. 이것은 사랑하고 또 저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나’이다. 왜 이것을 사랑하고 저것은 사랑하지 않는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모든 인간의 삶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며 시간 속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모든 독립된 인간의 의식을 하나로 연결하는 그 무엇이다.
--- p.188~189
-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병과 노화로 자신의 삶이 줄어든다고 말하며 슬퍼하는 것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빛을 향해 갈수록 자신의 그림자가 작아진다고 한탄하는 것과 같다. 육체의 소멸이 생명의 소멸이라고 믿는 것은 환한 빛 속에 들어가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존재가 사라졌다고 믿는 것과 같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림자를 바라보아서 그림자가 대상 그 자체라고 생각하게 된 사람만이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p.201
- 나와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일정한 크기의 사랑을 가지고 세계에 대한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세상을 산다. 처음에는 세계에 대한 이런 관계에서 우리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되지만, 자신과 타인들을 살펴보면 세계에 대한 관계와 우리 각자가 가진 사랑의 크기는 현재의 삶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가 육체적 출생을 통해 미지의 과거로부터 현재로 가지고 온 것이다.
--- p.218
- 이 사람은 어떤 이유로 이런 본성의 자아를 지닌 채 태어나고 또 저 사람은 어떤 이유로 저런 본성의 자아를 지닌 채 이 세상에 태어나며, 또 이 인생은 왜 소멸되고 저 인생은 왜 지속되는 걸까? 우리는 스스로 묻는다. 내가 존재하기 전 내가 태어나게 된 어떤 이유가 있을까?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죽음 후의 세계가 달라질까? 이런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해 아쉬워한다. 하지만 태어나기 전과 죽은 후의 삶을 알 수 없다는 아쉬움은 내 시야 밖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같다.
---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