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
귀족으로 태어나, 농부로 죽기를 소망한 러시아 대문호(1828~1910)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Гра?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Lev Nikolayevich Tolstoy), 일명 톨스토이(Leo Tolstoy)는 문학 작품에 관심이 없는 이라도 이름은 친숙한 러시아의 대문호입니다.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Count Nikolai Ilyich Tolstoy)(1794~1837)과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Countess Mariya Tolstaya (nee Volkonskaya)(1790~1830) 사이의 부유한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2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9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부를 소유한 외가댁은 넷째 아들인 그에게 그가 태어난 저택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Ясная Поляна)를 비롯해 적지 않은 유산을 선사하였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은 슬픔은 그를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카잔 대학(Kazan University), 페테르부르크 대학 등에 몸을 담긴 했으나, 학업에 흥미를 갖지 못하였고 사교계의 방탕한 생활에 빠져 들었습니다. 결국 막대한 도박 빚으로 대부분의 유산을 청산하였고, 형제들의 권유로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포병 하사관으로 캅카스 지역(Caucasus)을 병탄하며, 크고 작은 공을 세웠고 이례적으로 현지에서 임관할 수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군인으로써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이 목도한 전쟁의 참상과 자신의 인생을 소재로 1856년 제대하기까지 글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52년 출간한 유년 시대(Детство)(1852)부터 3연작과 세바스토폴 이야기(Севастопольские рассказы)(1855)가 이 시기에 집필한 글입니다. 톨스토이가 훗날 비폭력을 기치로 삼은 기독교 평화주의(Christian pacifists), 톨스토이 운동(Толстовство, Tolstoyan movement)을 전개한 것은 당시의 참전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의 삶은 수차례 평전과 다큐멘터리, 영화 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미국 소설가 Jay Parini의 원작 소설 The Last Station(1990)은 2009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국내 번역본 미출간.
“A man can live and be healthy without killing animals for food; therefore, if he eats meat, he participates in taking animal life merely for the sake of his appetite. And to act so is immoral.”
“사람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이지 않고도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기를 먹는다면 단지 식욕 때문에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데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벨문학상 비수상자(1902, 1904, 1905, 1906) : 톨스토이는 국경을 넘어 큰 인기를 누린 대중작가이자, 문학성을 인정받은 ‘당대의 대문호’입니다. 1902년부터 1904년, 1905년, 1906년까지 무려 4회에 걸쳐 노벨문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으나,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후보에 오른 해의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 더더욱 의아해지는 대목이지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러시아인’은 파리로 망명한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Бу?нин)으로, 1933년 수상하였습니다. 말년에 평화주의에 심취하였던 톨스토이는 노벨문학상 뿐 아니라, 노벨평화상에도 후보로 여러 번 거론되었으나 문학상과 마찬가지로 수상하지는 못했습니다.
“Freethinkers are those who are willing to use their minds without prejudice and without fearing to understand things that clash with their own customs, privileges, or beliefs. This state of mind is not common, but it is essential for right thinking...”
“자유사상은 편견 없이 자신의 관습, 특권, 신념과 충돌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정신 상태는 흔하지는 않지만 올바른 사고를 위해 필수적입니다...”
인생의 동반자, 소피아 톨스타야(Countess Sophia Andreyevna Tolstaya, Со?фья Андре?евна Толста?я)(1844~1919) : 대문호 톨스토이의 삶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그의 아내 소피아(Countess Sophia Andreyevna Tolstaya, Со?фья Андре?евна Толста?я)입니다. 건장한 체격의 톨스토이는 청년 시절 방탕한 생활에 물들었고, 특히 성욕이 매우 왕성하여 여자 관계도 복잡하였습니다. 본처 외에도 여러 여자와 어울렸고, 결혼 전에 이미 사생아를 두었지요... 그러나, 1862년 서른 넷의 나이로 무려 16세 연하, 방년 18세의 꽃다운 여인과 결혼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톨스토이와 소피아는 9남 4녀, 무려 13명의 자녀를 낳았을 정도로 부부간의 금술이 좋았습니다. 특히 막내딸 알렉산드라를 56세, 막내 아들 이반을 60세에 얻었을 정도... 당시 유아사망률이 심각하게 높았던 시기임을 감안한다면, 4남 1녀를 잃었으나 8명이 성인으로 무사히 성장한 것은 의사의 딸 소피아의 헌신적인 육아 덕분일 것입니다. 이처럼 안정된 집안은 톨스토이에게 집필에 몰두할 수 있는 기반인 동시에, 가문을 번성케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소피아가 그의 든든한 문학적 파트너가 되어준 시기, 톨스토이는 그를 대표하는 걸작을 연달아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y)(1869)와 안나 카레니나(Анна Каренина, Anna Karenina)(1877)에는 아내 소피아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 등장하지요!
톨스토이의 기독교 평화주의(Christian pacifists), 톨스토이 운동(Толстовство, Tolstoyan movement) : 톨스토이는 청년시절 직접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하였으며, 당시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서훈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목도한 인류의 비극은 그를 비폭력, 반정부, 채식, 순결, 평화주의로 이끌었고 이는 톨스토이 운동(Толстовство)이란 철학이자 신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기존의 세속 정부와 종교가 국민을 억압한다며 비판한 톨스토이는 자신의 철학은 녹여낸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였고, 이 때문에 그를 기독교 무정부주의자(Christian anarchists)로 분류합니다. 그의 사상은 아나키스트 사상(anarcho-pacifism)에 영향을 미쳤고, 비폭력에 대한 신념은 인도의 간디에게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간디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인근에 1910년 1,100 에이커 규모의 톨스토이의 철학에 근거한 톨스토이 농장(Tolstoy Farm)을 조성하기도 하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린 톨스토이는 부활(Воскресение)(1899)을 러시아를 비롯해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서 연재하였고, 원고료와 인세를 러시아에서 박해받는 두호보르파(Духоборы, Dukhobortsy)의 캐나다 이주금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분파 중 하나인 두호보르파(Духоборы, Dukhobortsy)는 19세기 말 국경 분쟁이 잦은 러시아 제국에서 기독교 평화주의에 입각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해 캐나다, 키프로스 등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러시아 최초의 국가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는 1901년 톨스토이를 파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