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시는 인간의 선천적 원인 두 가지에서 생겨난 듯하다. 인간에게는 어릴 때부터 이미 모방 본능이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부분도 처음에는 모방을 통해서 배우고, 모방하는 데 가장 뛰어나며, 모방된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아주 혐오스러운 동물이나 시신처럼 그 자체로는 보기에 역겨운 형체도, 그것을 그대로 모사해놓은 것을 볼 때는 즐거움을 느낀다. 학습은 철학자뿐 아니라 (학습 능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일반 사람에게도 지극히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람은 모방해놓은 것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모방한 것이 무엇인지 추론하고 배우기 때문이다. 실물이 생소하다면 모방해놓은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모방 기법이나 색채, 그 밖의 여러 이유로 즐거워한다.
이렇게 모방은 물론이고 선율과 리듬(운율은 분명 리듬의 한 부분이다)도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본능적으로 아주 강력하게 끌리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즉흥적으로 모방했다가,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시가 출현한 것이다.
--- 「4장. 시의 기원과 발전」 중에서
비극은 양념을 친 온갖 언어를 곳곳에 배치해, 낭송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통해, 훌륭하고 위대한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모방하여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써 그 감정의 정화를 이루어내는 방식이다.
“양념을 친 언어”는 리듬과 선율을 지닌 언어나 노래를 의미하고, “곳곳에 배치한다”는 어느 부분에서는 운문만 사용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다시 노래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비극이라는 모방은 배우의 연기로 표현되기 때문에, 당연히 시각적 요소가 먼저 비극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 다음이 노래와 대사인 까닭은, 비극에서 배우가 모방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 대사와 노래이기 때문이다. 대사는 운율이 있는 말의 배열을 뜻하고, 노래의 뜻은 누구나 다 안다.
비극은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행위는 행위자가 행하는 것이고, 행위자는 자신의 성격과 사상에 따라 특정한 성질을 지닐 수밖에 없다. (…) 하지만 여섯 구성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나 사건을 구성하는 플롯이다. 비극은 사람이 아니라 행위와 삶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삶의 행복과 불행은 행위에 있고, 비극의 목적도 성격이 아니라 행위다. 어떤 사람의 특성은 성격이 결정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행위가 결정한다.) 따라서 비극은 성격을 모방하려고 행위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 성격을 포함시킨다. 이렇게 비극의 목적은 행위와 플롯이고, 목적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 「6장. 비극의 정의와 구성요소」 중에서
반면에 호메로스는 다른 점에서도 뛰어나지만, 배워서 익힌 것이든 타고난 것이든 이 점을 잘 알았던 것 같다. 『오디세이아』를 쓸 때 호메로스는 주인공에게 일어난 일을 다 다루지는 않았다. 예컨대 주인공이 파르낫소스 산에서 다친 일이나, 출전하지 않으려고 미친 척한 일 같은 것은 다루지 않았다. 이 두 사건은 개연성이나 필연성 측면에서 주인공에게 일어난 다른 일과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호메로스는 앞에서 말한 하나의 통일된 행위를 중심으로 『오디세이아』를 구성했고, 『일리아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모방 예술이 하나의 대상을 단일한 전체로서 모방하듯이, 비극의 플롯도 행위나 사건을 모방하므로, 행위나 사건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모방해야 한다. 따라서 플롯을 이루는 여러 사건 중에 어느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기거나 제거한다면 전체가 꼬이고 흐트러지도록 플롯을 구성해야 한다. 어느 부분이 있으나 없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그 부분은 전체의 일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8장. 플롯의 통일성」 중에서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고결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을 주로 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은,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한 경우에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시는 등장인물에게 특정 이름을 붙이지만, 시의 목표는 보편적인 데 있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은, 이를테면 알키비아데스가 무엇을 했고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희극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희극에서는 개연성에 따라 플롯을 구성하고 나서 등장인물에게 그 플롯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풍자 시인이 특정한 개인을 놓고 시를 쓰는 것과 다르다. 반면에, 비극은 실존 인물의 이름을 고집스레 사용한다. 가능성이 있어야 설득력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능하다고 믿기 어렵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분명 가능하다. 가능성이 없다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9장. 플롯의 필연성과 개연성」 중에서
가장 훌륭한 비극은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 하고,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나 사건이 있어야 한다(이것이 비극이라는 모방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귀한 사람이 행복 했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공포나 연민이 아니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악인이 불행을 겪다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비극적인 것과는 가장 거리가 멀고, 비극의 효과를 조금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수긍할 수도 없고, 연민이나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
--- 「13장. 플롯의 모방 대상」 중에서
호메로스는 칭찬받을 점이 많지만, 시인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칭찬받을 만하다. 시인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말하는 것을 극히 삼가야 한다. 그러한 행동은 모방하는 사람인 시인이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시인들은 모방하는 것은 별로, 아니 거의 없으면서, 극 전체에 걸쳐 자기가 직접 나서서 휘젓고 다니지만, 호메로스는 도입부에 해당하는 짤막한 몇 마디 이후로는 곧바로 한 남자나 한 여자, 또는 다른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등장인물은 한결같이 개성이 뚜렷하다. (…) 그럴 듯하게 거짓말하는 방법을 다른 시인에게 제대로 가르쳐준 인물도 호메로스였다. 잘못된 추론을 통해 속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즉, 첫째 일이 존재하거나 일어나면, 둘째 일도 존재하거나 일어난다고 전제해보자. 둘째 일이 존재하거나 일어나면 사람들은 첫째 일도 존재하거나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 「24장. 서사시와 비극」 중에서
가능하긴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보다는 불가능하지만 개연성 있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 믿을 수 없는 일로 플롯을 구성해서는 안 된다. 믿을 수 없는 일은 단 하나도 플롯에 넣지 않는 편이 가장 좋다. 넣지 않을 수 없다면, 그런 믿을 수 없는 일은 『오이디푸스왕』에서 주인공이 라이오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설정처럼 작품 밖에 두어야 하지, 『엘렉트라』에서 피토 제전에 관해 보고하는 사람이나 『미시아인들』에서 테게아를 출발해 미시아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사람처럼 작품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 「24장. 서사시와 비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