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74년 5월, 원호청 주최로 척수장애인 상이용사 체육대회가 열렸다. 시합 종목으로는 탁구, 양궁, 역도 등 몇 가지 종목이 있었다. 나는 우연히 역도시합에 출전하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영국에서 열리는 국제 척수장애인 체육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국제 척수장애인 체육대회는 통칭 척수장애인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행사였다. 원호청이 주최한 대회는 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한 국내 예선전인 셈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행운을 선사하셨는지 나는 역도시합에 나가 우승을 하게 되었다.
국제 척수장애인 체육대회에 우리 나라는 그동안 탁구선수들만 출전하여 우승을 했다. 금년에는 참가종목을 확대하여 처음으로 역도선수로 나를 파견하기로 확정하였다. 나는 시합도 시합이었지만, 대회가 내가 재활교육을 받던 바로 그 재활병원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꼭 참가하고 싶었다. 나는 국내에서 뜻하지 않게 가벼운 기분으로 시합에 출전했다가, 국제시합에 나가는 선수로 선발되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모두 9명이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 다른 선수들은 모두 탁구 종목으로 가고 나 혼자 역도선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이런 뜻하지 않는 기회가 오게 된 것은 내가 평소에 꾸준히 운동을 한 덕분이었다. 아직 나처럼 근육운동을 하는 척수장애인은 한국에는 별로 없었다. 더구나 영국으로 가는 것은 정부가 후원하는 것이라 금전적인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원호청에서 선수들에게 얼마씩 용돈까지 지급해 주었다. 영국으로 출발하기 앞서 원호청에서는 공항에서 선수들을 위하여 단촐하나마 출전식도 주선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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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향하는 도중 수시로 곤란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선수 중 두 사람이 좌석에서 소변이 새어나와 옷뿐만 아니라 앉은 좌석까지 적셔버리게 되었다.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로 파리까지 가게 되었는데, 도착하여 선수들을 기내에서 사용하는 휠체어로 옮길 때는 소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선수들이 다 내리고 나는 맨 나중에 내렸다. 항공사 직원들에게 설명을 하고 사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직원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괜찮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의논하여 좌석 두개를 빼내서 밖으로 들고 나가는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도 마찬가지로 직원들의 도움으로 비행기에서 내려 선수들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갔다.
문제는 또 있었다. 소변을 실례한 선수가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것이었다. 짐을 모두 부쳐버렸기 때문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옷이 젖어 있는 장애인에게 생기는 상처였다. 그대로 두면 욕창이 생길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입은 그대로 영국으로 갈 수밖에 없어서, 임시방편으로 나는 좌석 밑에 신문지를 깔고 앉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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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내가 죽더라도, 여기 병실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죽어야만 한다더라도, 저 소년만은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기침을 시작하면 기침을 멈추게 해달라고, 신음을 뱉어내면 신음을 멈추게 해달라고, 통증으로 엄마를 찾으면 하나님의 긍휼이 소년에게로 깃들기를 진실로 기도했다. '저 놈의 기침이 아이를 죽이리라. 필시 저 기침이 아이를 죽이리라.' 나는 분노에 차서 소년을 괴롭히는 기침을 마귀라고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내 왼쪽의 환자는 육군 소위였다. 그는 중환자실의 다른 환자들처럼 총상을 당하거나, 칼에 찔리거나, 수류탄 등 무장공비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작전수행 중 차량전복에 의한 중상이었다. 머리가 개어지고 다리가 부러졌고, 얼굴이 벗겨졌으며 늑골이 절단되었다. 온몸이 멍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가장 경미한 환자로 취급하는 쓸데없는 여유까지 부리곤 했다. 그만큼 우리는 그의 완쾌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그는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어느 밤에 먼저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내상이 워낙 복잡했던 터라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심장이 압박을 이기지 못해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와 나는 여러 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곤 했다. 그는 사랑하는 애인을 자랑했고, 화려한 결혼을 꿈꾸며 훨훨털고 일어날 날만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의 죽음을 똑똑히 목격해야만 했다. 내 옆자리이기도 했지만, 워낙 급작스럽게 죽음이 진행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그는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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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내의 갸냘픈 얼굴이, 그 목소리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숙명의 메시지를 담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선명한 시그널로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젊은 소위의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 내 짧은 스물 일곱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망하게 죽어간 그 소위에 대한 내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회개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석재야, 너는 꼭 목사가 되어야 한다.”
--- pp.6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