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누구랄 것도 없이 은규의 한마디에 모든 시선이 동하에게로 고정되었다. 아무렴 몰라도 저렇게 모른단 말인가.
자신을 몰라보며 아리송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은규를 보며 동하는 실망한 눈빛이었다. 20년을 하루같이 만나겠다는 일념하나로 기다려온 사람인데 만나자마자 누구냐고 물으니 섭섭한 마음이 큰 건 당연했다. 하지만 동하는 이내 섭섭했던 실망의 기색을 지우고 은규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세월이 기억을 어렴풋이 지운 거라고 생각하며 동하는 동하만의 살인적인 미소를 날리며 크고 넓은 손을 은규에게 쭉 뻗었다.
“나한테 원수, 언니를 우상처럼 떠받들며 따라다니던 어떤 나쁜 놈, 세상에 한 놈밖에 더 있어?”
은규는 은결의 말을 듣다가 귀엽고도 해맑은 어린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20년 전, 자신의 동생을 하겠다며 당당하게 선언하던 귀여운 아이, 그 뒤로도 자신만 보면 예쁘게 보조개를 만들며 웃던 꼬마아이, 그와 동시에 자신의 동생인 은결과는 엄청 싸우며 하루도 바람 잘날 없이 지냈던 한 남자아이, 그 남자아이가 은규의 기억 속에서 필름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뜬 은규가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 * *
“뭐야? 그래도 누나는 누나거든?”
그래서 지금 따지시겠다! 그런데 어쩌냐? 어쩜 따지는 것도 내 눈에는 귀엽게 보이기만 하니. 투정부리고 어리광부리는 사랑스러운 여자로 보이는데 어쩌냐, 지은규. 그런 모습까지 다 사랑스러운데.
‘세상 길가는 남자들한테 물어봐. 사랑하는 여자한테 코 꼈는데, 콩깍지까지 씌었는데 나이가 많다하여 누나라 부르겠냐고. 혹여, 엄마뻘 나이가 되도 아무개 씨라고 부르는 사람 없다. 결론은 자기 여자한테 누나라고 부르는 남잔 없다는 소리다. 코흘리개 같아서, 남자답지 않아서 여자들도 싫어한단다. 내가 누나라는 호칭을 쓴 건 마지막 편지를 쓸 때였어. 마지막 편지를 쓰게 하고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눈덩이처럼 부풀리게 한건 너야. 그 이후에 가졌던 지은규에 대한 내 마음은 누나가 아닌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마음이었어. 너에게서 답장이 끊긴 후에 지은규에게 누나라는 호칭은 내 생에 영원히 안녕이야. 그렇게 만든 사람, 지은규 너니까. 그 이후에 널 그리워하며 기다려온 내 마음, 그로인해 널 사랑해온 내 마음은 이제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하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누나라고 불러. 안 부르면 가만 안 둬. 그리고 이 누나를 물로 보는 모양인데 누나는 언제까지나 누나다. 지은규? 까불지 마. 내가 다른 사람한테는 지은규로 불려도 너한테만큼은 꼭 누나 소리 들을 거다.”
은규가 동하를 뒤로 하고 가방을 가지고 일어나 가려하자 동하는 여유있는 말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두고 봐. 지은규라고 불러도 흥분 안 하게 될 날, 내가 꼭 오게 만들 거니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난 절대 그 호칭은 안 써. 초등학교 6학년 때가 마지막이었어. 곧 죽어도 그 호칭은 절대 들을 수 없을 거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