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열 시 반쯤 정읍역에 내리니, 순임 님 사는 산외면 사가마을 가는 버스는 오후 두 시 이후에나 있다. 버스로도 한 40여 분 가니 택시를 탈 수도 없고. 심란해진 맘으로 그에게 전화한다. “왜 그리 먼 곳에서 살아요? 버스는 오후 두 시 이후에나 있대요.”
“아이고 선생님, 정읍이시구나. 제가 집을 띠메고(떠메고) 정읍으로 지금 갈게요.”
집을 떠메고 오겠다는 그의 말을 듣자, 웃음이 나오면서 복잡하던 머리가 시원해진다. 시원해진 머리로 잘 알아보니, 칠보까지 버스(자주 있음)로 가면 거기서 사가마을 가는 택시가 있고, 택시비는 만 원. 조금 기다리다가 칠보행 버스에 오른다. 칠보에서 택시로 바꿔 타고 사가마을에 내리니, 순임 님이 나와 있다.
나를 보자마자 그가 막 웃으면서 말한다. “선생님, 집을 띠메고 갈라고 하니 집이 안 떨어져요, 안 떨어져.”
--- p.15
숙소 주인 내외분이 댁에 있는 커피 봉지들을 내놓는다. 그중 하나를 내가 들고 보니 알 수 없는 영어로 써 있어서, 커피 박사인 김 목사님에게 묻는다.
“이게 무슨 커피라고 씌어 있어요?”
“먹어도 괜찮은 커피라고 써 있네요.”
“그래요. 하하하….”
내가 한바탕 크게 웃자, 처음 만나서 약간 서먹하던 주인과 손님 사이가 확 어우러진다. 사람 사이의 낯섦이나 어색함, 긴장을 풀어 주는 말 한마디는 양약과도 같다.
외나로도에서도 내가 무슨 일로, 새 양말에 씌어 있는 영어를 보이면서 “여기 뭐라고 씌어 있지요?” 하니, 김 목사님이 대답하신다.
“신어서 편안한 양말이라고 써 있네요.”
나는 또 막 웃는다. 막 웃는 웃음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다.
--- p.67
포항 길거리에서 본 어느 차 뒤에 붙어 있는 알림 글이다. ‘아이 엠 초보(初步, 나는 초보다).’ 보자마자, 내 속으로 하는 말이 ‘나야말로 늘 인생의 초보다’ 하면서 그 말이 내 말처럼 여겨진다.
인간관계에 늘 익숙하지 못하고 초보 단계인 나. 내가 인생살이에 얼마나 자신이 없느냐 하면, 며느리가 결혼해서 처음 우리 집에 온 날, 내가 밥 안칠 때 한 말이 이렇다.
“얘야, 나는 누가 보면 떨려서 밥물도 잘 못 본다. 네가 밥물 좀 봐 줄래.”
며느리는 웃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나는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면서도 만나기를 두려워하면서 떨고 말문이 잘 막힌다.
인간이란 신묘막측하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신성을 가진 신의 자녀들이다. 떨며 말문 막히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 p.88
그날, 나는 명애 님과 경주에 갈 예정이고, 포항 내 숙소 주인인 미자 님은 마침 그날이 노동절이고 결혼기념일이라, 부부 일일 여행 간다고 서두른다.
아침을 든 후, 미자 님 남편이 먼저 밖으로 나간 지 상당히 지났는데도 미자 님이 안 나가고 있어서, 내가 친정 엄마처럼 한마디 거든다.
“미자 님, 남편이 기다릴 텐데요….”
“지금 산책하고 있을 거예요… 미인은 기다려야지요.”
담담하게 한마디 하고, 조금 더 있다가 나가는 미자 님. 하늘거리는 실크 원피스 차림. 연한 미색 바탕에 잔 꽃무늬가 그의 날씬한 몸매에서 아련하게 흔들린다.
--- p.96
요즘 기일혜 님 수필집을 계속해서 읽고 있다.
(중략)
그런데 읽다 보니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
나도 기일혜 님이 가는 대로 따라가서 만나는 사람들과 같이 앉아 있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제는 비가 쏟아지는 화죽마을(정읍)에 같이 가서 사나운 비에 옷도 젖고 마중 나온 홍순임 님 집에 들어가 자기 집처럼 편안해하시며 누워 있는 기일혜 님을 보곤 웃기까지 했다. 홍순임 님이 하시는 착한 며느리 이야기도 마치 나한테 하는 이야기인 양 들으며 웃고 미소 짓고 감탄하며 행복해하는 것이다.
--- p.144∼145
그날 노가리댁, 박이순 님, 나 셋이서 캔 고구마 열 부대를 내가 머리에다 이어 날랐다. 점심때 지나고 오후 두 시가 넘었다.
손 씻으러 간 수돗가 붉은 플라스틱 통에 가득 널부러져 있는 흙투성이 면장갑, 양말, 바지 등. 지나칠 수가 없어서 빨고 있는데, 두 노인들(노가리댁 86세, 박이순 님 88세)은 강사인 나 일 시키고, 자기네들은 점심때 지나 구풋하니까(시장하니까), 찐 밤 까먹으면서 하야하야 웃고 있다. 내가 빨래 다 빨고 가서 하는 말.
“나는 고구마 캐서 다 이어 나르고, 빨래 다 빠는데 당신들은 하야하야 웃으면서 밤 까먹고 있소?”
웃으면서 투정하듯이 말하자, 박이순 님이 하신다는 말씀. “강사님은 이녁 식구 같아.”
--- p.172
문득 내 가난한 집이 그리워진다.
볼거리, 먹을거리 없는 가난하고 맑은 내 집으로 가야지.
종일이라도 흐르는 적막 속에 생각이 흐르고 무언가를 아파하는 울먹임이 흐르고 있는.
모든 것이 잔잔하게 흐르는 내 집으로 어서 가야지.
가서 청빈하게 살아야지. 그림을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소식(小食)을 하면서 살아야지.
가난한 친구를 만나고 주님 말씀 듣고 글을 쓰면서 살아야지.
(중략)
‘선생님. 비가 오는 날은 나를 생각하세요.
그리고 내가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아셔요.’
‘…네에 알겠어요.’
정다운 대화가 있는 그곳으로 가야지.
오래된 흙같이 삭아서 편안한 늙은 남편이 있는.
내 집으로 가야지. 어서 가야지.
--- p.174∼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