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상식’에 대하여
1장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화두가 된 ‘흙수저, 금수저’ 논란부터 앎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국정교과서 문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면서 ‘취향 존중’을 내세우는 행태까지, 우리가 아는 ‘상식’과 보편적인 윤리가 더는 통하지 않게 된 현실을 세심하게 살핀다.
우리 사회에서 사과의 의미는 타락 일로다. 나 같은 사람은 알아듣기도 힘든 부패 뉴스(예를 들면, 검사의 주식 대박)의 주인공이 여론에 몰리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억지 멘트가 사과다. 대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하는데 어이가 없다. 국민들은 그들을 걱정한 적이 없다. 분노할 뿐이다. 사과해야 할 사람이 바뀐 경우는 더 억울하다. 피해자나 약자가 사과할 것을 강요받는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사과는 정의나 시비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문제가 되었다. 사과는 ‘갑’의 자기 합리화와 마음의 평화를 위해 혹은 숨겨진 죄의식을 덜어주기 위한 제도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목숨 걸고 사과하기」중에서
내 관심사는 여성과 말의 관계다. 수천 년 동안 가부장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은 인간 행동에 대한 차별적 평가에 있다. 폭력, 언어, 성(性)에서 두드러진다. 흔히 이중 잣대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이 세 가지는 남성에겐 지나치게 관대해 거의 무한대로 허용된 반면 여성에게는 근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가정 폭력 상담을 하다 보면 남성은 열 대를 때려야 폭력 남편으로 인식되는데, 여성의 정당방위는 단 한 대도 폭력으로 간주된다. 성의 이중 윤리는 말할 것도 없다.
---「잠자는 공주의 통치」중에서
2장 말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의 정치학’을 살펴본다. 예를 들어, “차별이 줄었다”라는 말은 차별의 가해자가 할 때와 피해자가 할 때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또한 ‘여혐 대 남혐’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강자(남성)가 사회적 약자(여성)를 통제하기 위해 쓰는 도구로서 말, 그리고 언어에 숨은 권력 관계를 깊이 들여다본다.
분노와 혐오는 반대말에 가깝다. 혐오는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훼손한다. 악플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분노는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에 대한 정당한 판단이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존중하는 힘이다. 이처럼 혐오와 분노는 이유, 양상, 효과가 전혀 다른 인간 행동이다. 다른 사회 운동에 대입해봐도 ‘남혐’은 어불성설이다. 구의역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애도가 서울시(민)에 대한 혐오인가?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이 비장애인에 대한 혐오인가? ---「강자의 혐오, 약자의 분노」중에서
단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공론장이 필요한 이유다.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의 의견은 어떤 입장에서 출발했나요? 그 입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요? 의미는 사회적 논의 과정, 화자(말하는 사람)와 청자(듣는 사람) 사이의 힘의 관계에 따른 일시적인 개념이다. 누가 하는 말인가에 따라 성희롱일 수도 있고, 유머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다. …… 강자(주류, 서구, 남성, 서울……)가 자신의 주장을 표현의 자유라고 말할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테러이며 테러라고 불리는 저항(폭력)을 초래한다.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누가 약자인가, 그것을 누가 정하는가부터가 정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표현의 자유인가?」중에서
3장 부끄러움에 대하여
저자는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대변하는 인간성으로 ‘뻔뻔함’을 꼽는다. 미국의 ‘트럼프 열풍’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형의 득세가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 흐름임을 보여준다. 3장에서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보통 사람들의 심리를 비롯해 이런 변화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짚어본다.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은 막무가내 캐릭터다. 뻔뻔함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세 캐릭터다. 돈과 힘을 숭배하고 약자를 짓밟아야만 쾌감을 느끼며 후안무치가 주는 강력한 자아의 느낌을 즐기는 사람들. 미국의 저소득, 저학력 백인 남성들은 이것을 욕망했다. …… 뻔뻔함은 ‘악’을 모르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의 법칙이다. 그들은 죄의식과 불편 없이 전진한다. 반면,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사람은 뻔뻔해질 수도 없고, 뻔뻔한 세상을 감당할 수도 없다. ---「뻔뻔한 시대」중에서
정치는 자원의 분배를 결정하는 책임이고 선거는 그 대리인을 뽑는 첫 과정이다. 우리는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대표자가 아니라 ‘되고 싶은 사람’, 즉 자신이 욕망하는 인물에게 표를 준다. …… 대중의 선망을 받는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독재자보다 더 잔인한 면이 있다. 부도덕하고 무능한데도 단지 유명하고 돈이 많다는 이유로 사랑받는다면? 그런 사람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이들에게 잘해줄 이유가 있을까. 선망(羨望)은 ‘양(羊)의 고기를 보고 침을 흘리다’라는 뜻이다. 자기가 부러워 침을 흘리는 사람을 누가 존중하겠는가. 이때 통치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선망과 대의 정치」중에서
4장 고통에 대하여
4장에서는 권력(국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고 축소하기 위해 피해자를 악마화하고 타자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희생양’과 ‘필요악’이라는 말의 숨은 뜻, 강자들이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며 각자도생을 권하는 이유, 약자를 혐오하는 정치를 분석하고, 나아가 이러한 강자들의 전략 앞에서 약자들이 부정의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해본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타인의 기쁨은 시기와 스트레스를 부르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짜증이 난다. 슬픔은 소비의 적이다. 권력은 희로애락에 관한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 시민만을 보호한다. 이처럼 기쁨과 슬픔을 자율적으로 나눌 수 없게 될 때,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피해를 특정인의 몫으로 치부하지 않고 ‘바로 당신의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혹은 다수가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다. ---「함께 고통 받기」중에서
우리는 도덕 불감증이 아니라 도덕의 개념 자체가 바뀐 시대에 살고 있다. 세월호는 ‘도덕의 재구성’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새로운 언어는 여야가 혹은 정부·여당이 유가족과 세월호특별법을 ‘협상한다’는 말이었다. …… 유가족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과 협상은 다르다. 협상은 동급 행위자 간의 일이지, 가해자와 피해자 그것도 일방적 피해자에게 선심 베풀 듯 제안할 일도 아니고, 피해자가 쟁취할 사안도 아니다. 유가족은 아무런 의무가 없다. ---「협상?」중에서
5장 남성에 대하여
여성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남성 중심 사회가 동원하는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 프레임을 비롯해 성매매, 외모주의 문제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여전한 성차별 현실을 확인한다.
남성과 남성이 갈등하면 대리와 과장의 싸움이 되지만, 여성 상사와 여성 부하의 갈등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남자의 적도 남자다. 남성들의 투쟁은 여성의 그것보다 더 격렬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노사 갈등’이거나 ‘국제 정치’지, 같은 성별 간의 질투로 비하되지 않는다. …… 성차별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여성의 존재를 시민, 노동자, 지식인, 공무원 등 그들이 직접 수행하고 있는 다양한 역할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의 성 역할’로만 제한하는 규범과 제도이다.
---「대통령과 소설가가 남자라면」중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조선 시대에 비하면 지금 여자들은……”인데, 나아졌는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내 의문은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거지’든 왜 이들의 처지는 항상 과거와 비교되는가이다. ……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하는가.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가난한 남성과 비교하는가. 현대 여성의 지위는 현대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하는가.
---「어느 시민 단체의 후원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