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 해제(無門關)(解題)
『무문관(無門關)』은 갖춘 이름으로는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다. 중국 남송 중기의 임제종에 속하는 거장 무문혜개(無門慧開)의 저작이다. 불교에는 이론이나 교설에 떨어지지 않고, 불타의 핵심되는 사상 자체에 투입하여 이를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인식하는 한 유파가 있는데 이것을 선종이라 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 선종에서는 불타나 조사들이 불교 진리의 오묘한 도리를 언구言句나 행동 등으로 보인 것이 전해 온다. 이것을 고칙 또는 공안이라 하여 수행인은 이 고칙을 요달하여 통과하느냐가 첫째의 과제이다. 따라서 많은 조사들이 평생을 두고 공안을 들어 문제삼고, 모든 선수행자들이 이 공안 통과를 향하여 전 생명을 건다.
당대(唐代)에 대두했던 선사상은 송조(宋朝)에 와서 난숙기에 들었고 이웃인 우리 나라와 일본에 전파되어 지금은 거의 세계를 덮는 거대한 사상의 조류를 이루게 되었거니와, 당?송 일대에는 그동안 이 고칙을 모은 공안집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시 것으로 지금에 전해 오는 대표적인 것이 『벽암록』, 『종용록』과 여기 소개하는 무문관인 바, 『벽암록』, 『종용록』이 각각 본칙 백칙에 송과 단평, 평창 등이 붙은 대부의 것이고, 또한 『벽암록』은 설두중현(雪竇重顯)과 원오극근(圓悟克勤)의, 『종용록』은 굉지(宏智), (天童正覺)와 만송행수(萬松行秀)의 공저이고, 『무문관』은 48의 본칙에 무문이 짤막한 평과 송을 붙인 불교 선사상의 결정적 집약판이다. 그런 만큼 무문 자신이 말하듯이 일자 일루 군말이 없다. 골수를 찌르고 가슴에 파고드는 짤막한 언구 속에 불조의 정혼이 넘쳐 있고 광휘의 생명력이 팽팽하다.
『무문관』의 저자인 무문혜개는 남송 효종(孝宗)의 순희(淳熙) 10년(1183)-우리 나라 고려 명종 13년-중국 항주抗州 양저(良渚)에서 태어났다. 언제 출가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처음 천룡굉(天龍肱)에 참례하고 제방 존숙을 찾다가 마침내 평강 만수사(萬壽寺) 월림사관(月林師觀)을 찾았다. 월림은 임제 양기파 7세손, 그 기봉이 고준하기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조주의 무자 공안 앞에 맞붙는다. ‘만약 조는 경우가 있으면 이 몸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맹세하고 머리를 기둥에 부딪치는 등 분지책려하기 6년, 하루는 식사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통밑이 빠지는 소리가 있었다. 게송을 짓기를 ‘청천백일 울리는 한 우레 소리에 산하대지 온갖 중생 샛별눈이 밝았는데, 삼라만상 한결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수미산은 뛰어 올라 3대台를 뛰어 논다’ 하였다. 월림과 불꽃을 튀기는 문답 감변을 거쳐 마침내 인가를 받고 그후 안길산 보국(報國,) 융흥(隆興)의 천녕(天寧) 등 여러 곳을 역임하고 순우(淳祐) 6년1246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를 개산하였다. 다음해 이종(理宗)의 청으로 입궐 설법하고 금란법의와 불안(佛眼)의 호를 받았다. 만년에는 서호(西湖) 가로 은퇴, 암거하였으나 역시 참학자가 끊이지 않았고 경정(景定) 원년(고려 원종 원년) 4월 7일, 사세(辭世)의 송을 짓기를 ‘허공 나지 않았고 또한 멸하지 않네. 허공을 증득하면 허공도 별것 없다’ 하고 붓을 던지고 세연을 닫았다. 세수 78세. 탑은 호국인왕사 뒷산에 세웠다.
『무문관(無門關)』성립 시기
표문·자서·후서를 보건대, 무문이 동가의 용상사(龍翔寺)에서 지낸 조정 원년(1228년, 고려장경 판각하기 11년 전) 여름에 대중을 위해 초록 집성한 것이 그해 7월 10일이고, 동년 11월 15일에 판각 완성하여 다음해 1월 5일 이종(理宗)에게 제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보면 『무문관』은 무문 46세의 저작이다. 그러나 『무문관』이 무문 일대의 온오의 결정임을 생각할 때 그 배후에는 무문이 보인사에 출세한 이래 10년간의 사상적 축적의 성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문관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면 『무문관』은 과연 무문 자신이 말했듯이 고칙의 잡연한 집성은 아니다. 무문은 자서에서 “이 한 개의 무자(無字), 이것이 종문의 첫째 관문이다. 이에 이를 이름하여 선종무문관이라 하였다.” 하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조주 무자는 이 한 권을 일관하고 있는 중심 사상이며 동시에 무문의 전면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문은 이 무 한 자의 전개 형식으로 일단 고칙 48칙을 염제(拈提)하여 본서를 이루어 놓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문관』 에 담긴 고칙 공안은 그 대개가 『전등록』, 『오등회원』, 『선문염송집』에 실려 있어 지금껏 우리나라 종문에 널리 행해지고 있는 것이나 『무문관』 은 필자 비재의 탓으로 불행히도 아직 국내 유통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다만 괄목할 사실은 고 설봉(雪峰) 노사가 『무문관』 각 칙에 평송(評頌)을 가한 것이 노사 생존시에는 운무에 묻혔더니 근년에 와서 사의 고제 금산(金山) 선백에 의하여 범어사 내원선사에서 간행을 보았다. 우리 나라 종문의 성사로 기록할 일이다.
『무문관』의 의의
진리를 대상 관계에서 구하고자 하는 사상은 이제 종말의 대단원에 오지 않았나 한다. 진리를 설정하고 그를 대상화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대상 속에서 진리를 얻고자 하는 태도는 인간에게서 주체적 창조성을 빼앗고 비소에의 타락과 인생의 공허와 방황과 충동을 끝없이 되풀이하게 한다. 그렇다고 일체를 부정하고 부정도 부정하여 마침내 바닥부터 방하(放下)하는 슬기도 없다. 여기에 어쩔 수 없이 악몽의 반복을 굳세게 믿고 나아가야 하는 현대가 안은 고민이 있다. 이를 불교의 지자들은 미망(迷妄) 전도(顚倒)라고 부르거니와, 슬프다 어찌하여 우리는 자존(自存)하는 자신의 구원(久遠)의 햇빛에 착안하지 못할까? 일체 희론(戱論)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 엄연한 실상 현실을 외면하기 바쁠까?
겁전 이후의 결정 요인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도 밖으로 밖으로 종속과 공허를 되씹기에 내달아야 할까!
여기에 선의 가르침이 있다. ‘이것이 꿀이다’ 하고 눈앞에 들이대고 입 안에 넣어 준다. 이론이나 말이 아니다. 어느 종교의 교설과도 상관없다. 바로 인간과 존재의 해명이며 정면 제시다. 인간과 역사의 본연 동력이며 궤도이다.
그래서 『무문관』은 현대인에게 이 문이 없는 진리의 문으로 인도하는 적절한 길잡이이며, 또한 성자의 곡진한 자비와 지혜에서 이루어진 무한공급에의 문이라 하겠다. 이 『무문관』 한 권이 전해지는 영광을 충심으로 기리는 바이다. 혜개의 『무문관』은 이와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졌으나, 그보다 중요한 점은 당시(송나라)의 중국의 불교사상을 비롯해서 그 성쇠의 과정과 선종(禪宗)에 대한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송나라의 송태조(宋太組) 5대 중에서 후주(後周)의 무장(武將) 조광윤(趙匡胤)이 후주의 선(禪)을 받아서 왕위에 오르자, 개봉(開封)에다가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송이라 했던 것이다.
송나라 시절의 중국 불교는 겨우 당조(唐祖)의 불교를 유지하는 현상에 불과했고 발달한 점은 별로 없으나, 『대장경』의 출판 사업만은 괄목할 만한 점이 많다고 하겠다. 남송(南宋)의 고종(高宗), 1127~1163 때 출세한 대혜(大慧, 1089~1163)는 그 당시의 선법(禪法)이 극도로 쇠퇴했음을 개탄한 것으로 보아 그 시절의 불교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송나라 말엽에 이르러서는 쇠퇴한 정도가 아니라 극도로 타락에 빠졌던 것이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도첩(度牒) 또는 도연(度緣)이라고 불리는 승니(僧尼)가 출가할 때에 조정에서 세금을 면하기 위해서 주는 허가증을 매매(賣買)하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가 하면, 도첩의 공채화(公債化), 도첩의 매가(賣價), 승민과세(僧民課稅,) 면역전(免役錢,) 면정전(免丁田) 등 불도(佛徒)들의 타락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송대에 있어 불교가 이와 같이 쇠퇴해진 반면에 유교는 나날이 부흥해 갔다. 이로 인해서 두 교 사이의 반목과 질시는 날로 심해져서 유교인들의 불교 배척은 극심한 상태에 이르러 이에 대한 방위를 위해서 여러 가지 서적이 나왔던 것이다. 명교계숭(明敎契崇, 1017에 입적함)의 『보교편(補敎篇)』은 구양수(歐陽修)의 『본론(本論)』에 장기영(張高英)의 『호법론(護法論)』과 『삼교평심론(三敎平心論)』은 모두 배불(排佛)의 화살을 막고 있는 논들이다. 뿐만 아니라 휘종(徽宗, 1101~1125)도 불교를 배격하고 도교를 신봉했던 정도였으니 가히 그 당시의 양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끝으로 선종에 관한 다소의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선종’은 일명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하며, 달마 대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처음 전교한 종지이다. 교외별전을 종(宗)의 강격(綱格)으로 하고, 좌선으로써 내관자성(內觀自省)하여 자기 스스로의 심성을 철견(徹見)하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한 경지를 체달함을 종요(宗要)로 삼는 종파라 하겠다. 선종이란 말은 부처님의 설교를 소의로 삼는 종파를 교종이라 함에 대하여 좌선을 닦는 종지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나라 말엽부터 선종과 교종의 세력이 대립하여 교 밖에 선이 있다는 치우친 소견을 내고 교외별전의 참뜻을 잃게 되어, 도리어 선종이라는 명칭을 배척하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종은 석존에게서 정법의 유촉을 받은 가섭으로부터 달마 대사까지의 28조가 있고, 제28조인 보리달마가 520년(양의 보통 1년) 중국에 와서 혜가에게 법을 전함으로부터 제5조 홍인 대사에 이르러 그 문염에서 혜능(慧能)을 제6조로 하는 남종과, 신수를 제6조로 하는 북종으로 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북종은 오래지 않아서 후손이 끊어지고, 혜능의 일류(一流)만이 번성하여 5가 7종을 냈던 것이다. 그 후, 원과 명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종파가 모두 쇠퇴하게 되었으나 이 선종만은 오히려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