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가 큐 사인을 던지자 재형이는 촬영 감독과 스텝이 준비해 온 원서를 한 권 한 권 읽기 시작했다. 재형이는 내 평생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문자를 술술 읽어내려 갔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재형이가 읽을 수 있는 언어는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베트남어, 미얀마어, 터키어, 이집트 상형문자, 로마어, 인도네시아어, 필리핀어, 크로아티아어, 네덜란드어였다.
“재형이는 어떻게 그걸 또박또박 읽을 수 있어?”
사회자가 묻자 아이가 대답했다.
“그냥요, 책에 나와 있는 발음기호랑 철자 읽는 방법을 몇 번 읽어 보면 저절로 말하게 돼요.”--- pp.18~19
“재형아, 있었던 일을 날마다 기록하니까 계속 반복되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 네가 느낀 걸 쓰면 어떨까?”
“제가 느낀 거요?”
“응, 기쁜 것도 좋고, 슬픈 것도 좋아. 또 하고 싶은 이야기나 앞으로의 계획을 그림으로만 표현해도 좋고. 일기장은 네가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니까.”
아빠의 이야기가 좋았던지 재형이의 두 볼이 상기되었다.
“정말이요? 정말 내 맘대로 해도 괜찮아요?”
“그래. 일기란 꼭 어떻게 쓰라고 정해진 게 없어.”
하루는 오랜만에 재형이의 일기장을 들춰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글도 아니고 외국어도 아닌 이상한 문자가 공책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재형아, 외국어로 쓰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옆에 한글로 해석도 해주면 안 될까? 아빠가 전혀 읽을 수가 없어.”
“안 돼요.”
재형이의 태도는 사뭇 단호했다.
“아빠가 그랬잖아요. 일기장은 저만의 거라고요. 그러니까 제 비밀을 읽으면 안 돼요.”
그렇게 재형이는 세 살 때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다. 일기라는 개인 공간에서 마음껏 놀이를 즐겼고 아이는 몰라보게 성숙해 갔다.--- pp.35~37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완전한 문장’으로 말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물!’ 하는 식으로 말하면 아이를 불러다 앉혀 놓고 ‘다시 잘 말해 보자.’ 하면서 제대로 할 때까지 짚어 주는 것이다.
“물 주세요.”
“다시.”
“목이 말라요.”
“다시.”
“엄마, 저 목이 말라요. 물을 마시고 싶어요.”
이렇게 완전한 문장이 입에서 나오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아이가 좋아하는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아내는 심부름 하나를 시켜도 정확하게 지시했다.
“엄마 방 서랍 위 오른쪽에 있는 리모컨을 가져와라.”
그래서일까, 재형이는 말을 하고 알아드는 속도가 또래에 비해 빨랐다.
사실 정확한 발음과 완벽한 문장에 관한 나의 집착은 가족사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청각장애 1급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어머니와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눈빛과 몸짓만으로 의미를 짐작해야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완벽한 소통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 가정을 꾸리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최우선으로 했다. 가족이 속을 터놓고 대화하는 것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은 것이다.
아이는 엄마, 아빠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어떤 어휘를 써야 할지 알게 된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단어 선택, 재미있는 단어를 통한 반복 학습이 중요하다. 언어 전문가는 내가 아이에게 정확한 어휘를 쓴 것이 아이의 사고력과 언어 능력에 보이지 않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pp.89~91
재형이의 우울증은 한 달쯤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기발한 제안을 했다. 일종의 역할극인데 재형이에게 말이 통하는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주자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밤 열시가 되면 재형이의 새로운 친구가 엄마의 몸을 빌려 나타나는 ‘친구 타임’이 시작되었다.
“재형아, 안녕? 난 안드로메다에서 온 M-320이라고 해. 우리 친하게 지내자. 응?”
아내의 연기는 정말 그럴 듯했다.
“엄마, 왜 그래요?”
“아니, 아니! 난 엄마가 아니라 M-320이라니까. 우리 친구하자, 친구. 응?”
아내의 집요한 연기에 재형이도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안녕, 나는 멀리 안드로메다 은하계에서 왔어.”
나는 아내와 재형이의 대화를 흥미롭게 경청했다. 전혀 입을 열지 않던 아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일단 안심이 됐다.
그렇게 아내의 ‘친구 타임’은 날마다 계속되었다. 덕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재형이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 pp.10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