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말하는 사람’(homo loquens)이면서 동시에 ‘읽는 사람’(homo legens)입니다. 하루도 읽지 않고 그냥 보내는 날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도로 표지판을 읽고, 휴대폰을 통해 들어온 메시지를 읽고, 책을 읽습니다. 문자가 아니어도 사람의 표정을 읽고 날씨나 지형을 읽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는 듣고 말하고 쓰는 것 못지않게 읽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것으로나 먹고사는 것으로만 우리 자신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읽고 무엇을 듣는가에 따라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갑니다. 어떤 이야기를 읽고 어떤 이야기를 듣는가, 무슨 책에 감동되고 누구를 닮아 가고자 하는가가 나의 정체성(identity)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가 중요합니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칸트는 읽기에 관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합니다. “무엇을 읽을 때, 남의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언제나 자기 눈으로 보려고 애쓰십시오.” 저는 성경을 읽는 사람도 이 충고를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눈으로 읽고 남의 생각으로 받아들인 말씀은 나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나의 눈으로, 나의 지성으로, 나의 생각을 말씀 앞에 내어놓고 씨름하며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장 ‘읽는다는 것’에 대한 물음」중에서
현대 문화를 형성하는 온갖 문자들은 원초적 의미를 상실한 채, 끊임없이 타인들에 의해 소비되기 때문에 원래의 의미에 대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각 행위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문자는 플라톤의 비유를 빌리면 ‘아비 없는 자식’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사생아를 끊임없이 산출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자 이전에 ‘영혼에 새겨진 것’을 후설이나 플라톤은 추구하였다고 하겠습니다. 후설과 플라톤의 경고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은 무시하고 문자만을 고집하거나 문자는 무시하고 영만을 고집하는 태도는 문자와 관련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탓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2장 문자와 읽기에 대한 부정적 태도」중에서
기독교는 책과 문자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전통입니다. 이 점에서 플라톤이나 근대의 데카르트 전통, 그리고 선불교와 노장 전통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유교 전통은 불교 전통에 비하면 경전과 주석서에 훨씬 높은 가치를 두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유교가 섬기는 ‘주제천’(主帝天) 개념의 ‘하늘’(天)은 공자가 자공의 물음에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라고 대꾸한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말하지 않고 자신을 알려 주지 않는 하늘입니다.…이와는 반대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마르틴 루터가 강조했듯이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입니다. ---「3장 기독교 전통에서 문자와 성경」중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을 때 우리의 눈은 문자로 쓰인 텍스트에 고정됩니다. 언어를 이해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눈은 한 단어에서 다음 단어로,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옮아갑니다. 하얀 종이 위에 검게 찍힌 활자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과정에는 폴라니가 말한 암묵지의 세 가지 측면과 우리의 지성과 상상력,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는 전통과 이해의 역사, 곧 우리가 소속된 하나의 해석 공동체가 이해의 가능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주어진 텍스트를 제대로 읽었다면 텍스트에 담긴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게 됩니다.
---「4장 읽기의 현상학과 해석학」중에서
스콜라적 읽기 방식은 논리를 가지고 주장하거나 생각을 논박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당연히 비판적 읽기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 방식은 지적인 문제를 다룰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읽기 방식입니다. 중세 대학 제도에서는 일반 교양 학문과 신학, 의학, 법학처럼 전문 직업 영역과 관련된 학문 분야의 교육과 연구에 이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도원 중심으로 발전된 렉시오 디비나는 ‘대학의 읽기’와는 달리 ‘사람의 성품을 형성하고 삶을 빚어내는 읽기’입니다. 오늘날 익숙한 용어로 말하자면 ‘영적 형성’(Spiritual formation)을 위한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 읽기의 윤리학: 주희의 독서법과 렉시오 디비나」중에서
여기서 우리는 삼중 읽기 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소리 내어 읽고, 다음에는 눈으로 읽고, 마지막에는 마음으로 읽는 방법입니다. 소리 내어 크게 읽는 방식은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부터 중세 수도원 전통을 이어 계속 내려온 매우 오래된 전통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동아시아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중세 전통의 읽기 방식은 거의 언제나 ‘소리 내어 들으면서 읽기’였습니다. 소리 내어 읽으면서 듣고, 들은 것을 다시 몸과 마음에 담는 읽기 방식입니다. 서책 필사 작업을 많이 했던 중세 수도원의 필사실을 ‘벌집’에 비교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6장 우리들교회의 성경 읽기와 묵상 방법」중에서
성경은 성경의 문자 자체로만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가 말하고 가리키는 현실 또는 실재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강한 문자주의자들처럼 문자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문자가 가리키는 현실을 바라보아야 성경을 읽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기호로 사용되는 문자가 그렇듯이 문자들의 집합인 성경도 문자 바깥의 현실, 문자보다는 훨씬 더 큰 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7장 성경을 어떤 책으로 읽어야 하는가」중에서
성경은 한 개인에게 준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준 책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 읽기와 듣기, 공동 묵상과 읽은 말씀에 바탕을 둔 나눔과 기도가 한 개인과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공동체 읽기와 읽은 말씀으로 함께 드리는 기도는 성경 읽기의 객관화와 주관화를 막고 오히려 공동체를 세우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8장 객관적으로 읽어야 하는가, 주관적으로 읽어야 하는가」중에서
모든 행위는, 심지어 생각조차도 신체를 통하여 일어나지만, 사람은 생각 없이 움직일 수 없고, 무엇을 전혀 알지 못하고서는 행동할 수 없습니다. 알아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결정해야 하고, 이것들을 몸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생각과 앎은 몸과 분리되어 있고, 몸도 한 개체로서 타인을 포함한 주변 환경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숙고와 결정과 선택에 이르는 데에는 일정한 과정이 필요하며,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선택이 실행되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개입됩니다.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알게 된 바를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9장 성경 읽기와 삶의 거리를 어떻게 좁힐 수 있는가」중에서
레비나스는 책이 단지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일 뿐 아니라 “우리의 존재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책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자료나 도구, 설명서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레비나스는 강조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자고, 생각하고, 예배드림이 우리 인간에게 단지 생존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이듯이, 책을 읽고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정보를 주고받는 수단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세계 내 존재’일 뿐 아니라 “책으로 향한 존재”라고 레비나스는 단정합니다.
---「10장 다시 하는 질문: 왜 읽어야 하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