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난 단지 도둑일뿐이오. 그냥 즐기는 거지.'
이치타로는 우뚝 선 채로 망연자실해졌다. 그대로 냉동된 것 같았다.
'여보! 뭐해요? 빨리 잡아야지!'
유리코가 이치타로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이치타로는 이미 공포로 덜덜 떨고 있었다. 아내의 촉에 도러보에게로 다가갔 지만, 동작은 건전지가 거의 다 소모된 장남감 로봇처럼느리기만 했다. 그는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다, 덜덜 떨며 걷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공포영황에 나오는, 얼어서 새하얗게 굳은 시체, 좀비에 가까웠다. 도로보는 그런 이치타로를 비웃었다. 아주 도전적인 자세로 그를 기다렸다. 드디어 이치타로는 도로보앞에 도달했다. 그렇다 맞서야 할 대상 앞에 도달한 것이다. 기차가 느리게 역에 도착헤 기염을 토하듯이 뻣뻣해진 팔을 들어 도로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p.156
요쿄하마 어느 구청의 직원 식당.
한남자가 식당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아내가 싸준 '초호화판'도시락이 놓였다. 오늘의 도시락 메뉴는 상하이 요리풍의 수입 게조림. 남자는 도시락 안에 들어 있는 '오늘의 대결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걸 어떻게 해치울까? 표정은 그야말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처럼 아주 진지했다. 게조림은 먹을 수 있으면 재주껏 먹어보라는 듯이 남자를 비웃는 것 같았다. 커다란 중국식 부엌칼로 가차없이 내리쳐 조각은 냈지만, 단단한 껍질때문에 먹기 어려워 보였다. 도대체 이 수입 게요리를 어떻게 먹어치워야 한담? 남자는 미간에 있는 힘을 다 주며 묘책을 짜내는 중이었다.
요컨대 이 정도밖에 고민거리가 없는 행복한 남자. 그가 바로 이제부터 시작될 광기와 시련 속의 주인공인 39세의 타다노 이치타로다.
'좋아. 좀 창피해도 당당하게 남자답게 빨아먹어야지.'
이치타로는 일단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하고 게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때,
사랑하는 건 둘째치고, 날 남편으로, 이 집 가장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로 존중하기는 할까? 내 존재는 그녀에게 뭐지? 우리가 함께 살아온 10여 년의 세월은 또 뭐였단 말인가! 갑자기 실의와 번민과 회의와 슬픔이 밀려든다. 사는 게 이런 것인가? 하지만 이렇게 아파한다 해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은 때론 고통스러운 법. 그래. 참자. 화내 봤자 더욱 비참해질 뿐이다.
--- p.96
도난 소동이 일어난 후 2주일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타다노씨 가족은 도난 사건을 거의 잊어버렸다. 그런데 세 번씩이나 도둑이 들다니, 도저히,도저히... 어이가 없었다. 이치타로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유타는 아침식사를 하며 그 상황을 즐겼다. 유타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게임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유일하게 개구쟁이 유타만이 어떻게 하면 좀더 멋지게 지금 이 상황을 즐길까 들떠서 설쳐댔다.
'굉장하잖아. 도둑은 어떻게 생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