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전적인 깡충거미는 짝짓기도 매우 위험천만한 방식으로 한다. 암컷 깡충거미는 수거미를 만나서 맘에 들지 않으면 즉석에서 잡아먹어치운다. 그래서 수거미는 목숨을 걸고 사랑 도박을 한다. 목숨을 보존하려면 암거미의 맘에 들어야하는데, 이를 위해 이들은 본능적으로 희한한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바로 현란한 춤을 추는 것이다. 수놈 깡충거미는 멀리 떨어져 춤을 추면서 암거미의 동태를 살핀다. 긴 다리 두 개를 하늘로 치켜세우고는 지휘자가 지휘를 하듯이 리드미컬하게 휘젓고 박자에 맞추어 서로 부딪친다. 그리고 배를 접어 하늘로 향하게 하고는 부채를 흔들 듯이 흔든다. 춤이 현란하면 할수록 암거미는 수거미의 접근에 관대하다. 그러나 언제든지 암거미는 수거미의 몸에 독니를 꽂을 수 있기에 수거미는 거리가 좁아질수록 더욱 현란하게 춤을 춘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에 접근하면 갑자기 몸을 떨면서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 진동은 암거미에게 최면을 걸어 기절시키려는 수작이다. 진동이 격렬해지면 암거미는 실신을 한다. 이때 수거미는 잽싸게 암거미에게 달려들어 씨를 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이 와중에 암거미가 깨어나면 바로 즉석요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깡충거미는 목숨을 걸고 춤을 추며 접근하고 마침내 최면을 건다. 최면은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기술이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라포르rapport를 건다고 한다. 우리는 라포르를 신뢰관계의 뜻으로 사용하지만 원래 라포르는 최면술사와 상대 사이에 생기는 일방적인 심리적 교류를 의미했다. 그러나 점차 상호 심리적 교류로 확대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제 라포르가 생겼다는 말은 서로 마음이 통하고 감정교류가 원활하여 공감하는 상태를 말한다.
라포르가 생기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끌림으로도 가능하지만, 종종 깡충거미가 보이는 바와 같은 엄청난 저돌적 행동과 노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공감능력이 최고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시대, 우리는 과연 어떻게 깡충거미보다 더 뛰어난 라포르의 대가가 될까? 공감의 결여는 젊음의 상실을 의미하는 다른 말이고, 꼰대라는 국제통용어를 만들었다. 적어도 꼰대는 되지 말자는 다짐을 하는 시대, 라포르를 위한 깡충거미의 현란한 춤과 진동은 결국 우리의 말과 글이 아닐까? 공감은 소통을 요구하고 소통은 말과 글로 이루어지니,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말의 사람, 글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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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지루함을 견디는 것을 힘들어 할까? 왜 지루함은 견뎌야만 되는 대상일까? 누구나 지루함으로 괴로웠던 경험이 있기에 그것이 견디기 힘들다는 것은 서로 공감하지만 본인이 견뎌야 했던 지루함의 실체는 각자 다르다. 어린 시절의 지루함은 더욱 견디기 힘든 형벌이다. 틈만 나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이를 하는 것은 지루함을 쫓기 위함이었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그만 놀고 저녁 먹으란 소리는 밤의 지루함이 다가온다는 소식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기분은 불쾌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아이들의 놀이는 대부분 불안한 지루함을 즐기는 것으로 구성된다. 술래에게 잡힐 때까지 숨조차 죽이며 숨어 있는 시간 동안,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더불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감각이 주는 지루함이 압박한다. 이 놀이에서 술래가 하는 역할은 이 지루함과 불안감이 주는 스트레스를 끊어내어 배출시켜 주는 일이다. 숨어 있는 아이를 찾아내거나 결국 주어진 시간을 넘겨 놀이를 끝내는 순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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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스벤센의 지루함에 대한 생각과 달리, 우리가 어린 시절 느낀 천천히 가는 시간과 나이 들어가면서 느끼는 빨리 가는 시간 감각은 지루함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여기서 다소 겸연쩍은 마음이 들지만 개별적인 지루함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보자는 생각에서, 어릴 적 시간이 정지했던 것 같았으며 매우 고통스러웠던 지루함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어릴 적 군사분계선 근처 마을에서 자랐고, 당연히 마을에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기에 늘 심심했었다. 그 심심함에 덧붙여, 어른들이 일하러 나간 사이 어린아이 혼자 있는 시골집은 아이의 인지 영역에 비해 매우 큰 공간으로 다가와 외로움을 더해주었다. 문제는 이런 대낮에 한센병 환자들이 동냥을 오는 것이다. 당시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겁주느라 한센병 환자들이 병이 나으려면 어린아이 간을 빼먹는다는 말을 해놓은 터라, 이 상황은 숨바꼭질 놀이와는 차원이 다른 생명을 놓고 벌이는 숨바꼭질이 된다. 마루 밑에 숨거나 쌀뒤주에 들어가 있기도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쌀뒤주에 숨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밥을 구하러 다닌 것이니, 너무 배가 고프면 쌀뒤주라도 털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 밀폐된 공간에 숨어서 멀리서 들리는 인기척, 발자국소리를 듣는 동안의 시간은 왜 그리 천천히 흐르는지 거의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긴장으로 사지가 오그라들고 등이 흔들렸다. 고립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는 시간이 언제 지나간 줄 모르게 즐거운 순간과는 거리가 멀었고, 너무나 고통스러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지고 몸서리가 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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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시간과 말에 대한 성찰에서 우리는 단 한 가지의 고귀한 깨달음을 얻어냈다. 그것은 그 말의 내용이 어떠하든 적어도 우리는 말하는 동안 시간을 점령하고, 그 시간을 현재로 고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존은 많은 말을 할수록 길어질 것이다. 더욱이 어거스틴은 말의 중간에 형성되는 단절에도 주목했다. 그 단절은 생각의 이탈과 새로운 생각의 유입, 심지어 신의 영감 어린 계시조차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인식했다. 그렇다면 말을 한다는 것은 전 우주가 참여하는 거룩한 시간으로 구별될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즉 아무 생각 없음으로 시간에서 존재를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을 이어가는 것으로 우리는 심리적 시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시간의 연금술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선한 존재로서 혹은 악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시간 역시 선한 말을 하는 동안과 악한 말을 하는 동안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덩어리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과거로 지나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얼마든지 매순간 창조해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은 타인과의 대화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혼자 하는 말이다. 그것은 ‘생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또렷하지 않은 형태로도 생각할 수 있기에 수사학자 어거스틴의 심리적 시간관념은 얼마든지 생각의 시간 덩어리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소통과 공감은 젊음의 묘약이다. 동시에 소통과 공감의 시간은 오롯이 우리가 현재를 늘려 실존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 젊음으로 실존하게 하는 특효약임에 틀림이 없다.
--- pp.5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