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엄마, 행복한 엄마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을 하느냐’에서 ‘무엇을 안 하느냐’로 질문을 바꾸어 ‘엄마의 본질’과 ‘끝내야 할 말과 행동’을 찾아보는 것이다.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엄마, 엄마인 나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가는 엄마, 자녀의 본질을 탐구해 가는 엄마, 그래서 철학적인 엄마가 되어 보는 것, 썩 괜찮지 않은가?
--- 「제1장 엄마와 철학_철학적으로 질문 바꾸기」 중에서
“넌 어쩜 그리 멍청한 것도 니 아빠를 닮았니?”라는 말을 하는 엄마의 르상티망은 무엇일까. 남편을 향한 분노이다. 남편에게 쏟아내지 못하는 마음의 소리를, 엄마 마음대로 남편과 동일시해 버린 자녀에게 상처가 되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엄마 스스로 깨달아야만 남편과 자녀를 각각의 인격체로 분리해서 “조금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 보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 「제1장 엄마와 철학_르상티망」 중에서
“니나 내나 참, 우찌 살아왔는지 모르그따.”
엄마의 전화다. 매번 엄마 삶의 넋두리만 늘어 놓았는데, 오늘은 대뜸 나도 끼워주는 선처를 베풀었다. 엄마와 다른 산에서, 떨어뜨리기도 하고 받치고도 있던 나의 바위가 엄마에게 보였나 보다.
“그래도 내가 엄마한테 비교가 되나?” 나는 조금의 진심만 빼고 답했다.
20여 년간 어렴풋이 지켜보았던 엄마의 바위가 나에게, 살다 보면 살아졌던 마법의 주문이 되어주었듯 내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바위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지금의 바위를 더욱 내 것으로 삼아본다. 3대째 내려가게 될 시시포스의 바위, 이까짓 것 뭐, 내 인생으로 쳐 주겠다. 이런 각오가 행복이라면 행복이기도 하니.
--- 「제1장 엄마와 철학_3대의 시시포스의 바위」 중에서
내가 [런닝맨]을 좋아하고 공유를 좋아하듯,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들.
엄마를 물 먹이려는 게 아니라, 게임에 집중하면 주변의 어떤 소리도 못 듣는 아이들.
남편의 말에 언젠가는 내가 텔레비전을 끄고 밥 준비를 하게 되듯, 엄마의 말에 언젠가는 게임을 끄고 책을 읽게 될 아이들.
아이들은 가르침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인격체이기도 하기에, 아이들은 원래 이런 사람들이고 나 역시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이해해 보려 한다. 게임을 꺼야 하는 순간마다 끄세요, 끄삼, 끄셩, 꺼라, 고장 난 레코드처럼 계속 이야기하면서.
--- 「제2장 엄마와 양육_고장 난 레코드가 되어」 중에서
아들이 세수만 하고 로션을 바르지 않아 볼이 짝짝 갈라지는 느낌으로 학교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안경에 묻은 먼지와 지문 흔적에 신경 쓰느라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아 선생님께 혼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픈 부위를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새끼발가락이 짓물러 있음을 알게 된다면, 내 마음은 어떠할까.
잔소리를 정지하고, ‘어중간한 경과 조치’로 오늘 아침 조용히 내뱉었던 ‘새끼’라는 단어에 쓰담쓰담을 보내는 바이다. 백미정, 잘했어. 그러니까, 한 번 더 내뱉어도 돼.
“새끼…….”
--- 「제2장 엄마와 양육_어중간한 경과 조치」 중에서
‘고단하고 두렵고 벌거벗고 저주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엄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 감정들을 마주했던 순간, 엄마로 탄생되었던 것처럼.
달갑지 않은 이 감정들이 글을 쓸 수 있는 시작점이 된다. 엄마의 슬픈 감정들은 글 쓰는 방법과 글을 써도 괜찮다는 용기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슬프면 슬픈 대로 잘 살아왔지 않은가. 그래서 할 말이 많고 쓸 글이 많을 수밖에 없다.
만약, 엄마의 슬픈 감정들을 글로 쓰지 않은 채 방치한다면, 여러 가지 다른 감정들과 삶이 나를 버릴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다.
--- 「제3장 엄마와 글쓰기_엄마의 슬픈 감정들」 중에서
시장바닥 가 보아라.
투박한 말투와 욕으로 웃을 수 있는 데드풀,
천 원을 깎기 위해 박카스 한 통과 맞먹는 에너지를 발사하는
원더우먼,
시커먼 가뭄 길 닮아 갈라져 있는 손끝의 아이언맨.
히어로는 전쟁터에서 탄생되는 법이니
나의 숨겨진 초능력이 발사될 때까지
잘 살자.
살
떨리고 아픈 마음 좋아하는 이 어디 있겠나
다
들 그리 오늘을 떠안는 것이다
--- 「제4장 엄마와 시(詩)_초능력」 중에서
‘행복한 엄마’와 더불어 ‘훌륭한 시민’도 될 수 있도록 국가와 엄마는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서로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 보았음 한다. ‘용산 참사’든 ‘엄마 참사’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서로가 지혜롭고 윤리적이게 고민하고 행동했으면 한다.
국가, 알겠습니까?
--- 「제5장 엄마와 사회_‘엄마 참사’가 되지 않기 위해」 중에서
한 번씩 나는 삶이 힘들다 느껴질 때면 더 가혹한 현실을 상상해 본다. 평생 남편 병간호를 하게 되었다, 남편 없이 아들 셋을 키워야 한다, 엄마가 죽었다, 삼시 세 끼 중 한 끼만 먹을 수 있다, 전쟁이 났다, 무거운 말들로 나를 조금 고문한다.
예측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불안과 동행해야겠지만, 이 또한 ‘사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리라. 좋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잘 살아내기 위한 목적임을 잊지 않는다. 뭉크처럼 80세 넘도록 살지 않아도 좋으니 뭉크처럼 온갖 것이 아프지 말았음 한다. 삶이 힘들어질 때면 뭉크의 작품들을 보며 죽음 비슷한 느낌을 한 번씩 떠올려 보는 행위. 이건 ‘삶의 행위’임을 다시금 각인시켜 본다.
--- 「제6장 엄마와 존엄_뭉크처럼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중에서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죽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구나. 존엄이든 본질이든 사랑이든 책임이든 정체성이든 그러해야 되는 거구나. 쉬운 게 없다. 내가, 그대가, 엄마가 되지 않았어도 쉬운 건 없다. 그러니 그래서 받아들이련다. 죽도록 지켜가야 하는 ‘엄마의 정체성’을.
아랫입술 쭈욱 내밀어 입김으로 앞머리 불어가며 ‘목적격 나’인 ‘Me’보다 ‘주격 나’인 ‘I’가 승리하는 횟수가 많아지도록 말이다.
--- 「제6장 엄마와 존엄_Me보다 I」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