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베일에 갇힌 한 여성 시인의 생생한 육성
실비아 플라스만큼 “신화”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가 또 있을까.
아름다운 금발의 유망한 미국 여성 시인이 핸섬한 당대 최고의 천재 영국 시인과 결혼하면서 시작된 현대 영미문학계 최고의 황금빛 로맨스는, 플라스가 남편인 테드 휴즈의 외도와 그에 따른 별거 이후 100년 만에 찾아온 런던의 혹한 속에서 우울증과 생활고에 홀로 시달리다가, 옆방에서 노는 두 아이가 배고프지 않도록 우유와 빵을 놓아두고 가스가 아이 방으로 새어 들어가지 않게 꼼꼼하게 문틈에 테이프를 바른 후, 가스 오븐에 서른 살의 젊디젊은 머리를 처박고 자살을 한 바로 그 순간 완벽한 악몽이 되어 참혹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여성해방운동의 신화적 순교자의 반열로…
그녀의 충격적인 죽음은 그 이름과 함께 수많은 맥락을 타고 신화로 재창조되었다.
있는 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투사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개인적 비극으로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도 상징적이었기에 이 사건은 일약 전설의 반열에 올라 한없이 재생산되고 소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의 신화는 평단과 대중의 매혹에 반사되고 증폭되어, 자연인 실비아 플라스의 진실과는 무관하게, 추상적이고 원형적인 거대한 상징적 존재로서 계속 부풀어만 갔다.
실비아 플라스의 신화화를 그 무엇보다 열렬하게 부추긴 것은, 당시, 즉 1960년대 초반 꿈틀거리며 태동하던 본격 페미니즘의 시류였다. 이 강력한 시대적 조류를 타고 실비아 플라스의 삶과 작품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당장 남성의 세계에 희생된 여성 시인의 전형,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피 흘리는 여신으로 등극했다. 여성의 야망과 성적인 생명력을 용서하지 않은 남성의 세계, 여성적 감성을 난도질한 남성적 이성, 나아가 남편 테드 휴즈의 외도로 상징되는 폭압적 남성성 그 자체에 희생된 신화적인 순교자로 추앙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계관시인까지 지냈던 20세기의 대문호(大文豪) 테드 휴즈였지만, 추상적이고 원형적인 ‘여성’ 그 자체를 대변하게 된 ‘실비아 플라스’의 살인자라는 오명만큼은 평생 낙인처럼 달고 다녀야 했고, 강연이나 시낭독회마다 시위대를 무슨 팬클럽처럼 몰고 다녀야 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무덤 묘비명에 새겨진 남편의 성(姓)인 ‘휴즈(Hughes)’라는 글자들은 새로 새기고 또 새겨도 분노한 실비아의 추종자들에 의해 지워지고 또 지워졌다. 실비아 플라스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폭풍처럼 흥성한 페미니즘의 조류를 예고하고 체현하며, 자기도 모르게 여성해방운동의 신화적 순교자라는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신화 속에 외면당한 그녀의 진실…
그러나 실비아 플라스를 뒤덮은 이 신화들은 매혹적이고 강렬한 만큼이나, 세상의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일방적이고 왜곡되고 폭압적이며, 또한 허구적이었을지 모른다. 총체적이고 삼차원적인 진실 그 자체보다는 그 진실을 읽거나 읽고 싶어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시각들에 대해 더 많은 걸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진정 ‘신화’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소용돌이 같은 죽음과 순교의 신화화 과정에서 상실된 것은, 바로 어머니였고 아내였고 또 투쟁하는 생활인이었던 자연인 실비아 플라스의 피와 살이 덧붙여진 개별성과 인간성이기 때문에. 신화 속에 부재하는 것은 바로 실비아 플라스 자신의 육성이요, 삶이요, 자아이기 때문에.
신화를 극복하는 육성, 공감의 접점을 찾아…
이러한 맥락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아주 특별한 기록이 될 수밖에 없다. 천재시인들의 사생활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멜로드라마에 매혹되는 대중에게도, 가부장제에 희생된 여성 시인의 흔적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도, 플라스의 시학을 연구하는 비평가들에게도, 이 사적이고 내밀한 한 여성의 사적 기록은 저항할 수 없는 매혹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1986년 플라스 작품의 판권을 지닌 테드 휴즈가 프랜시스 매컬로우와 공동 편집해 ‘일기’라는 사적 기록을 책으로 출판하게 된 일은, 실비아 플라스의 경우 대중과 학계 모두에게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은 단순한 대중적 관음주의나 가십 취향을 넘어서 플라스의 작품 성향을 비평적으로 이해하는 해석 행위에서도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통스러운 한 ‘사람’의 기록…
이 일기들을 읽어나가는 건 가끔씩 정말로 고통스럽다. 그녀는 냉혹할 정도로 정직했고, 그 적나라한 솔직함과 무서운 신랄함 때문에 이 일기들에서 드러나는 실비아 플라스는 결코 쉽게 정을 붙일 만한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독자들은 이 일기에 드러나는 플라스의 치사하고 범속한 욕망들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모순 덩어리에다 끔찍스러운 이기주의자. 끝내 소통과 공감에 실패하고 악에 받친 외로운 모래알. 심지어 폭력적으로까지 드러나는 자기혐오와 타자에 대한 공격성. 하지만 결국 그러한 치부는 실비아만의 것이 아니요, 우리 모두가 직시할 용기가 없었던 치부에 잇닿아 있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바로 그 직시의 고통일지 모른다.
결국 독자들은 책장을 덮으며 페미니즘의 순교자를 만나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거대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는 게 아니라,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 눈부신 순간들도 있었지만, 때로는 추하고 때로는 불쌍하고 때로는 표독스럽던, 그러면서도 끝없이 ‘도와달라’고 손을 뻗쳤던 한 ‘사람’의 너무나 사람다운 인생에 연민과 공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다. 이 일기들을 읽으며 결국 우리네 삶의 조건들을 성찰하게 되고, 그로써 그녀가 맞닥뜨렸던 문제, 그녀의 고민에 대한 성찰이 보편적인 인간적(여성적) 경험의 진실과 맞닿는 순간, 어쩌면 그녀를 둘러싼 평면적 신화들, 건강치 못한 관음주의를 극복할 길이 열리는지 모른다.
되살아나는 신화,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의 앞에 다시 서다…
최근 다시 실비아 플라스의 신화가 재삼 첨예한 화두로 대두된 것은 바로 대중의 촉각에 민감한 영화계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테드 휴즈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두 사람의 스토리에 눈독을 들여온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이 앞다투어 영화화 계획을 발표하고 나섰다. 휴즈와 플라스는 생전에 할리우드의 접근을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결국 2003년, 영국의 BBC는 미국 자본과 손을 잡고 미국의 스타 기네스 펠트로를 캐스팅해 두 사람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