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를 주는 손을 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며, 자금을 공급하는 사람들의 최신 유행을 거스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기업적인 사고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상황은, 기업적인 사고가 사회변화에 도움을 줄 때와 도움을 주지 못할 때를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을 주었다.(9쪽)
박애사업과 기업적인 사고를 접목하는 현상을 내가 ‘사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간략하게 말하면 이렇다. 기업적인 사고는 사회를 변혁하는 데 필요한 더 깊은 변화를 외면하게 만들고, 의사결정을 적절하지 않은 손익계산의 문제로 축소하며, 기업적 사고를 박애사업과 시민사회로 확장할 때 소요되는 비용과 교환 조건을 무시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p.10 「머리말」
빌 게이츠, 워런 버핏, 카를로스 슬림, 래리 엘리슨 등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이 네 사람 모두 박애자본가들이다. 이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1350억 달러로, 나이지리아나 방글라데시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가난한 나라들의 국내총생산(GDP)보다 훨씬 많다.--- p.24 「1장 : 비이성적 풍요 _ 박애자본주의의 유행」
오늘날 형태의 자본주의는 불평등과 개인의 소외를 조장한다. 박애자본가들은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것은 타당할까? 예컨대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과 돈 많은 개인들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우리 삶 곳곳에 시장이 너무 깊이 침투했으며, 공공 서비스와 시민참여의 오랜 전통이 퇴색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자본주의가 대중의 신뢰를 잃어가자마자 빌 게이츠가 주장하는 ‘창조자본주의에 대한 논의가 곧바로 튀어나온 것은 이런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p.29 「1장 : 비이성적 풍요 _ 박애자본주의의 유행」
박애단체들의 활동 자금은 거대 재단의 기부금이나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하는 갑부들의 은총과는 거의 무관하다. 박애단체의 활동 자금은 대부분 개인과 작은 공동체와 가족기금에서 나온다. 특히 공동체와 가족의 기부 비율은 전 세계적으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가정 70퍼센트 정도가 매년 시민사회에 기부하며, 이 금액은 2008년에 3070억 달러에 달했다. 2008년부터 3년 동안 1억 75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던 구글닷오르그의 계획과 빌 게이츠가 살아 있는 동안 1000억 달러를 기부할 것으로 보이는 게이츠재단과 비교해보라. 이들이 발표한 수치들은 분명히 매우 인상적이지만, 개인들이 사회변혁을 위해 기부하는 금액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pp.63-64 「2장 : 좋은 기업, 나쁜 기업, 이상한 기업 _ 기업적 사고가 사회변화를 이끌어 갈 때와 이끌어 가지 못할 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거대한 로켓을 쏘아 올리는 사업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선도적인 박애자본가들은 대부분 소프트웨어와 무선통신 분야에서 광범위한 독점 구조를 만들어 벌어들인 엄청난 돈의 극히 일부만 사회적 대의를 위해 사용한다. 예컨대 카를로스 슬림은 200여 개 회사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 회사들의 주식 가치는 멕시코 증시의 40퍼센트에 육박한다. 부의 분배를 이처럼 크게 왜곡하면서 그나마 찔끔 베푸는 행위를 찬양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소수가 아닌 다수가 직접 혜택을 누리도록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pp.71-72 「2장 : 좋은 기업, 나쁜 기업, 이상한 기업 _ 기업적 사고가 사회변화를 이끌어 갈 때와 이끌어 가지 못할 때」
세계보건기구와 세계발전센터(워싱턴 D. C.에 있는 독립적인 싱크탱크)의 보고서에 따르면, 결핵이나 말라리아, 에이즈를 치료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는 그것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에게 약을 제공하고, 이런 약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유통할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기업들이 접근과 유통이라는 단기적인 문제에만 너무 집중하기 때문에, 이런 투자는 오히려 장기적이고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갖춰야 할 보건 시스템을 약화시킨다.--- pp.83-84 「3장 : 사라진 증거 _ 박애자본주의가 이루지 못하는 변화」
기부자가 기업에서와 같이 성공의 지표로서 속도, 규모, 숫자에 집착하면 결핵과 말라리아가 더 저항력을 갖게 될 때 새로운 의약품은 무용지물이 된다. 녹색혁명은 오히려 농민들과 그 가족들을 더 힘들게 하고 불평등을 심화하며, 학교에 학생들을 많이 모을수록 교사, 책상, 교재가 부실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넘기기 쉽다. 탄자니아의 교육자 라케쉬 라자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끔은 아이들을 학교에 무조건 구겨 넣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p. 85 「3장 : 사라진 증거 _ 박애자본주의가 이루지 못하는 변화」
박애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에너지와 자원은, 실제 돈과 열정이 솟아나는 사회적 기업에 유리한 현재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제도를 꿈꾸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시장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기업들이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압박하는 시민사회의 능력은 약화된다. 그리고 비영리단체가 전문화하면서 회원들의 소속감을 뿌리칠수록, 풀뿌리 민주주의의 훈련장이 되고 회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전달하는 채널의 역할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시민의 자발적 행동을 상품화한다.--- p.108 「3장 : 사라진 증거 _ 박애자본주의가 이루지 못하는 변화」
오늘날 기부금을 모금하는 방식은 통장으로 계좌이체를 하거나 키바나 글로벌기빙과 같은 웹사이트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만으로 돈을 송금하게 만듦으로써, 선의에 기여하는 데 들어가는 수고를 줄여주었다. 그러나 이런 모금 방식은 기부자와 수혜자가 한데 어우러져 협업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약자들을 배제하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키바와 같은 웹사이트를 통해 손쉽게 기부하는 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급격히 상승하고 거기다 기부금도 조금 더 늘어날 수 있으니 그런 현상을 비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부금 중개는 공동체 참여의 중요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이미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성을 왜곡한다. ……
미국에서 40년 동안 시민사회를 연구해온 시드니 버바는 참여하지 않고도 기부할 수 있는 모금 방식을 ‘참여의 정크푸드’라고 부른다. 포만감은 느껴지지만 장기간에 걸쳐 강한 공동체를 구축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불량 식품이라는 뜻이다.--- pp.137-138 「4장 기업적 사고가 가져온 높은 대가 _ 인간적 가치와 시장의 가치가 섞이지 않는 이유」
RNA 종양 바이러스 치료제를 나눠주는 것은 HIV 환자들에게 분명히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약값 자체를 비싸게 만드는 특허보호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어떨까? 마이크로소프트가 컴퓨터를 나눠주고 교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칭찬할 일일까? 그렇다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사용을 장려하는 인도 케랄라 지역처럼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주거나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은 비난해야 할 일일까?--- p.140 「4장 기업적 사고가 가져온 높은 대가 _ 인간적 가치와 시장의 가치가 섞이지 않는 이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박애운동은(적어도 재단으로 제도화된 박애운동은) 기이한 토대 위에 있다. 박애자본가들은 먼저 비용이 매우 많이 들고 갈등을 유발하는 부를 창출하는 시스템을 개발한다. 그 다음, 이 시스템에서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가져간 혜택의 일부를 내놓으라고 부탁한다. 이것은 아마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더 근본적인 변화를 지원할 수 있도록 시스템 자체를 개혁하는 것은 어떨까?--- pp.170-171 「5장 사회변혁은 다양성에서 _ 박애자본주의의 쇠퇴와 시민박애주의의 부상」
박애단체에 기부하는 사람에게 국가가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것은, 곧 그만큼 공익을 위해 정부가 활용할 재원이 줄어든다는 의미다(2006년에만 미국에서 세금 감면액은 400억 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미국인이 기부한 돈의 11퍼센트만이 사회정의를 다루는 단체로 들어갔다.
--- p.172 「5장 사회변혁은 다양성에서 _ 박애자본주의의 쇠퇴와 시민박애주의의 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