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嚴肅認眞, 周到細緻, 穩妥可?, 萬無一失.”
(엄숙진지하고 주도면밀하며, 신뢰성을 확보하여 만의 하나라도 놓치지 말라.)
독자 개발한 둥펑 2호를 개량한 둥펑 2호갑 유도탄과 핵탄두의 결합 실험에 돌입할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지시한 ‘16자 방침(十六字 方針)’이다. 중국은 국내외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조기에 독자적인 핵탄두 유도탄 개발에 성공했고 전 세계가 중국의 실전용 전술·전략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 p.61
중국은 1960년대 초, 유도탄 개발의 ‘3단 발전(三步棋) 원칙’을 확정했다. 이는 장기 계획을 수립해 동일 시기에 탐색 연구, 설계 및 시험 생산, 제식화와 초기 생산 3가지를 모두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1965년 3월에 ‘1965~1972 지대지 유도탄 발전 계획(약칭 8년 4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명확한 목표와 단계별 전략을 가진 중국 최초의 유도탄 개발 장기 계획으로 모든 목표를 달성하여 중국 유도탄 개발 사업의 이정표가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해 대형 엔진 개발과 연료 체계 및 구조 재료 개선, 다단 연결과 4개 엔진 연동, 유도 체제 개선 등을 이룩하여 관련 기술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 p.71
“自力更生, 艱苦奮鬪, 大力協同, 無私奉獻, 嚴謹務實, 勇于攀登.”
(우주 전통 정신 : 자력갱생, 간고분투, 대력협동, 무사봉헌, 엄근무실, 용우반등)
중국의 초기 우주 발사체 대부분은 군용으로 개발된 장거리 유도탄을 전환한 것이다. 장거리 유도탄의 대출력 엔진과 복수 엔진의 결합, 단 연결과 분리, 유도 제어기술 등을 활용해 쉽게 우주 발사체를 개발할 수 있었고, 도태되는 유도탄을 활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주 발사체를 보유한 국가들이 대륙간탄도탄(ICBM) 개발 역량을 보유했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은 중거리 탄도탄인 둥펑 4호를 개량해 최초의 우주 발사체인 창정 1호를 개발했고, ICBM인 둥펑 5호를 활용해 현재의 주력 우주 발사체인 창정 2호와 창정 3호, 창정 4호 시리즈를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군수와 민수 수요를 모두 충족하면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개발 경비와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중국은 ‘우주 전통 정신’과 같은 훌륭한 기풍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 p.107
1965년 말에 열린 중국과학원의 651회의(인공위성 개발회의)에서 국방과학기술위원회가 중앙정부의 의사를 전달했다. 정치적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첫 위성 발사에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소련, 미국의 첫 번째 위성보다 성능이 더 앞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위성의 이름을 마오쩌둥의 찬가인 ‘둥팡홍(東方紅)’으로 하고, 소련 최초 위성이 간단한 부호 송신에 그친 것을 넘어 둥팡홍 노래를 송신하기로 했다.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위성의 목표는 ‘올라가서 궤도에 진입하고, 소리를 들으며 위성을 본다(上得去, ?得住, 聽得到, 看得見)’는 12자였다.
--- p.123
“軍民結合, 保軍轉民.”
(군수와 민수를 결합하고, 군수 기술을 민수로 이전한다.)
1978년의 개혁 개방과 냉전 해소로 중국 우주산업이 거대한 격변기를 맞게 되었다. 중국은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고 합리적 발전을 도모하며, 뒤떨어진 기술의 재생산을 멈추고 세계적 추세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군수 일변도에서 벗어나 민수와 경제 발전에 기여하며, 고립에서 빠져나와 국제 시장 진출과 수익 창출에 매진했다.
중국은 863계획(첨단기술 개발계획)을 세워 차세대 발사체와 유인우주선, 우주정거장 개발을 추진했고, 문화대혁명의 혼란에서 벗어나 교육을 정상화하면서 청년 인력들을 대거 육성하고 과감하게 기용했다. 또한 제3세계를 중심으로 국제 위성 발사 시장에 진출해 수익을 창출하면서 국격을 높였다. 이로써 중국이 명실상부 국제 우주 경쟁에서 미국, 러시아와 겨루는 강력한 주자로 부상했다.
--- p.143
“熱愛祖國, 無私奉獻, 自力更生, 艱苦奮鬪, 大力協同, 勇于登攀.”
(양탄일성 정신: 열애조국, 무사봉헌, 자력갱생, 간고분투, 대력협동, 용우등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주개발 중 발생하는 가장 큰 위험을 사고라고 생각한다. 폭발성 연료를 사용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점에서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여기에 중국은 문화대혁명과 3선 건설을 거쳤다. 적지 않았던 폭발 사고들도 이것들에 비하면 어려움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뜨거운 눈물과 회한, 고통을 안겨준 대사건들이었다.
핵무기 개발자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은 앞서 소개한 양탄일성 정신으로 이를 극복한 과학자들의 정신력과 투지를 높이 평가하고 찬양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합리성 결여와 압력, 가족과 정든 고향과의 이별, 불투명한 미래를 수반하는 것들이었다. 중국의 우주개발 체계는 이러한 여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중국 우주개발 체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할 수 있다.
--- p.165
1986년 3월, 미국의 전략방어계획(스타워즈 계획) 추진에 위기감을 느낀 4명의 원로 과학자 왕간창(王?昌), 왕다헝(王大珩), 양가지(?嘉?), 천팡윈(?芳允) 등이 「세계 첨단 기술을 따라가는 데 관한 건의」를 제안했다. 이에 덩샤오핑이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지시하면서 ‘선도기술연구계획(863계획)’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핵무기와 우주의 두 가지 국방 기술을 포함하여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어서 1992년 1월 말에 당시 중국항공항천부에서 「중국 유인 우주기술 발전에 관한 건의」를 덩샤오핑에게 전달했다. 덩샤오핑은 “내 평생에 하지 못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싼샤(三峽)댐이고 다른 하나는 유인우주선이다. 앞으로 이 일들이 잘 추진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동의했다고 전해진다. 드디어 중국의 유인우주선 개발 사업인 921공정이 시작되었다.
--- p.215
“繞, 落, 回.”
(달궤도에 진입하고, 착륙한 후, 돌아온다.)
인간을 달에 보내는 것은 중국인들의 오랜 염원이자 꿈꾸어 오던 소망이었다. 이런 염원은 베이징우주의학공정연구소 전 소장이며 ‘921공정’의 부총설계사였던 선리핑(沈力平)의 회고록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1988년, 닐 암스트롱이 연구소를 방문했던 때, “인류 최초로 달에 가는 꿈을 꾼 사람은 아름다운 중국 여성이었다. 그러나 최초로 달에 간 사람은 미국인이고 그 사람이 바로 나다”라는 말에 큰 도전을 받았다고 했다. 암스트롱이 말한 여성은 중국의 고대 전설에서 서왕모(西王母)의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났다는 창어(상아, 항아, 嫦娥)이다. 과거에는 빛나는 영광이었지만 빛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상황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우주개발에 더욱 분발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중국은 지구궤도 위성과 유인 우주 단계를 넘어 화성과 심우주 탐사로 개척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