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소스라치게, 섬광처럼 그의 손길이 억세게 유라의 가냘픈 몸을 낚아챘고, 유라는 반쯤 비스듬히 누워 그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 속과 귓불에 뜨겁게 키스해 오는 순간 유라는 갑자기 입술 끝과 전신을 타고 쏟아지며 흐르는 별들의 향연에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순간 뇌리는 혼미하기만 했고, 의식은 살갗을 타고 흐르는 전류처럼 찌릿하면서도 달콤하기만 했다. 여름이었지만 서늘한 밤바람이 열 오른 살갗 위에 심한 자극처럼 느껴졌다. 밤하늘은 이상하리만치 똑똑히, 강한 빛을 쏘아 댔다.
--- p. 38
유라는 이 거리 한 모서리에서 차디찬 체온으로 분열된 심장의 열기를 희망이라는 액자에 콜라주하고 몽타주하려 애쓴다. 가슴 한구석에 스민 재스민 향기가 은은히 새어 나온다. 저열한 본능의 그림자와 고고한 지성의 물줄기가 그녀의 내부에 함께 도사리고 있다. 아니라면 지고한 본능의 광채와 내밀한 지성의 음지가 그녀에게는 공존하고 있다. 그녀는 걸음의 균형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 도도히 걷는다.
…… 유라는 로데오 거리 옷가게를 몇 군데 들러 본다. 가게마다 봄옷을 사려는 여인들이 제법 끊이지 않는다. 유라는 일 층과 이 층 계단을 오가며 구경하기도 한다. 부티크의 정제된 유리 상자 안에 있는 그녀 자신이 바깥 사람에게는 박제 인형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옷 앞에 정지해 있다. 한순간 유라는 마네킹이다!
--- p. 63~64
늘어진 금발, 빛나는 잿빛 눈동자, 섬세한 뼈대, 그는 리듬을 타고 서 있다. 고조된 숨결, 창백한 살결, 윤기 흐르는 머릿결, 유라는 긴장되어 있다. 그녀는 질감을 전혀 주지 않는 가벼운 시스루슬립을 입고 사뿐한 음의 통로를 따라 빨려 들어간다. 색소폰의 아련한 선율이 드디어 규칙적인 드럼의 강렬함과 혼합될 때에는 무언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뛴다. 그 거친 박동은 즉시 희열로 바뀌고, 자유로운 상상과 꿈의 세계에서 그녀의 영혼과 육신은 슬슬 움직여 나간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한복판에서, 위태로운 절벽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나는 창공의 한 지점에서, 그녀는 맨발로 전신을 비틀고 있다. 풍경, 로맨스. 보드라움. 감촉……
--- p. 137
여름엔 은은한 향보다 톡 쏘는 시원한 향이 좋을 것 같아 에스티로더의 ‘뷰티풀’과 플로럴코롱의 ‘클라멘스’와 코코 샤넬 세 개만 놓아두고 나머지는 유리 상자 안에 넣는다. 립스틱도 보라색과 형광색, 트로픽 오렌지와 빨간색, 핏빛과 자주색은 남겨두고 밤색과 갈색 계열의 것은 따로 분리해 둔다. 여름이 되면 가장 필요한 파우더를 한 통 털어서 휴대용 케이스에 가득 채워 놓은 뒤 녹색 마스카라와 보라색 마스카라를 찾기 쉬운 곳에 꽂아 놓는다. 귀걸이, 반지, 목걸이 중에서 금제품은 넣어 두고 시원스레 보이는 은제품과 마카사이드 액세서리를 골라 놓는다.
--- p. 168
온다던 태풍은 오지 않고, 여전히 살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팔월의 첫째 날 오후, 유라는 민규를 자신의 작업실에 두 번째 초대했다. 그리고 열기와 습기가 가득한 지하 작업실에서 그녀는 그와 첫 키스를 했다. 길지 않은 시간,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 민규와의 입맞춤의 여운은 오래도록 유라의 가슴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다음 날, 거짓말처럼 찾아든 새로운 태풍은 갈증으로 타는 도시에 많은 비를 뿌려 주었다.
--- p. 284~285
유라가 눈을 떴을 때, 단비는 누운 자신의 머리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아마 이 시간쯤 눈뜰 주인을 줄곧 지켜보다가 잠시 시선을 돌렸을, 그 강아지는 잠시 후 유라가 눈을 뜬 것을 보고 반갑게 귀를 쫑긋거리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는 자기 주인이 몸을 움직여 자신을 끌어안거나, 하다못해 자신은 도외시한 채 그냥 스스로의 몸만 일으켜 세울 때까지라도 먼저 다가와 장난을 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다시 잠들지도 모를 주인의 안락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배인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 최근 들어 단비에게는 새로운 즐거움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주인과 함께 주인이 호의를 품은 한 남자를 마중 나가는 일이었다. 유라는 민규를 만날 때 단비를 자주 데려갔다. 장미아파트 사거리 옆 보도블록에서 유라와 함께 그를 기다리다가 민규가 가까이 다가오면, 단비는 유라를 반길 때처럼, 아니 어쩌면 자기 주인이 좋아하는 이 남자에게 보다 더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 열렬히 세찬 동작으로 펄쩍펄쩍 날뛸 정도였다.
--- p. 322~325
언젠가 너는 내게 말했다. 밤이었고, 주황색 가로등 아래 벤치였지. 너는 다리를 뻗고 누운 나의 얼굴을 무릎 위에 베고, 다가와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민규야! 이 세상은 어쩌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랑하게 되어 있을지 몰라.’ 그때 가로등 불빛 아래 촉촉이 젖어 있던 너의 자애로운 눈길을 나는 잊을 수 없다!
--- p. 392
“난 연희 언니가 보여준 팔꿈치와 무릎 위의 흉터와 함께, 그 말이 가끔 떠오르곤 해.”
유라가 말하자, 유리잔에 남은 와인을 마저 비우며 미지가 물었다.
“무슨 말?”
“남자 위에서 여성 상위 자세로 섹스하던 도중, 손으로 곡선을 그리며 아라비아풍 춤을 추었다는 얘기.”
“…….”
“그건 아마.” 유라도 자기의 와인 잔을 다 비운 뒤 말을 이었다.
“절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 p. 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