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마 전만 해도 나라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하던 나였는데. 그레고어는 다른 지도를 떠올렸다. 막사, 가스실, 소각장, 철도, 인종 기술자로서 가장 화려한 날들을 보냈으며 불태운 시체와 머리칼의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금지된 도시, 감시탑과 가시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곳. 그는 오토바이, 자전거, 자동차를 타고 얼굴 없는 그림자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지칠 줄 모르는 댄디 식인귀. 장갑과 부츠, 눈부신 군복, 비스듬히 눌러쓴 군모. 그와 시선을 마주치거나 말을 건네는 일은 금지되었다. 같은 친위대의 동료들조차 그를 두려워했다. 유럽 전역에서 데려온 유대인들을 골라내던 경사로에서 동료들은 술에 취해 있었지만 그는 맨정신으로 미소를 지으며 오페라 「토스카」의 몇 소절을 흥얼거렸다. 인간적인 감정에 절대 휘둘리지 말 것. 연민은 곧 나약함이다. 전능한 자는 가느다란 막대를 움직여 희생자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왼쪽은 바로 죽일 사람들로 가스실행. 오른쪽은 천천히 죽일, 즉 강제 노역장이나 실험실로 보낼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큰 실험실에, 그는 매일 도착하는 수하물에서 〈적합한 인간 재료〉(난쟁이, 거인, 불구자, 쌍둥이)를 골라 주었다. 주사, 측정, 채혈, 절단, 살인, 해부. 여기야말로 그의 맘대로 할 수 있는 모르모트용 동물원이다.
(……)
아우슈비츠, 1943년 5월부터 1945년 1월까지.
그레고어는 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 박사이다.
--- p.22~24
독일과 이탈리아가 패전하자 아르헨티나는 그들을 계승했고 페론은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실패한 바로 그 지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과 미국은 원자 폭탄을 얻어맞아 머지않아 소멸할 것이다. 언젠가 일어날 제3차 세계 대전의 승자는 아마도 지구 반대쪽에서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아주 멋진 패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페론은 냉전이 수렁에 빠지기를 기다리면서 위대한 넝마주이가 되었다. 그는 유럽의 쓰레기통을 뒤져 가며 거대한 재활용 사업을 계획했다. 페론은 역사의 잔해들을 가지고 역사를 지배할 것이다. 그는 수많은 나치, 파시스트, 그 협력자들에게 나라의 문을 활짝 열었다. 군인, 기술자, 과학자, 전문가와 의사들. 전범들은 제방, 미사일, 원자력 발전소를 만드는 일에, 아르헨티나를 초강대국으로 변신시키는 일에 초대되었다.
--- p.51
그레고어는 영사관에 가서, 전쟁이 끝난 이래 전력을 다해 감추려고 했던 모든 정보들을 제출해 가며 자신이 바로 요제프 멩겔레임을 입증했다. 그레고어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이후 가짜 신분으로 살아왔음을 밝혔을 때 영사관 직원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해당 서류를 본으로 발송하는데 거기서는 어느 누구도 추적중인 전범 목록을 들춰 보지 않았다. 어쩌면 뮌헨에서 그레고어는 괜한 일로 공포에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서독은 나치즘을 단죄하지만, 옛 나치 관료와 하수인들을 복직시키고, 유대인에게 보상은 해주지만 그들의 살인자들이 남미와 중동에서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정치적 실수〉를 할 수 있는 권리의 인정, 〈탈나치화의 희생자들〉을 위한 사면, 민족적 단결, 대사면……. 이제 그레고어와는 작별이다. 1956년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독 영사관은 요제프 멩겔레에게 신분증과 출생증명서를 교부했다.
그는 이제 아르헨티나 당국의 행정에 맞추어야 했다. 법원에 출두하고 경찰에는 지문을 제시했다. 그가 했던 거짓말에 어떤 행정관도 화를 내지 않았고, 추적도 징벌도 실행되지 않았다. 수많은 독일인들이 최근에 기억을 되찾은 것이다. Benvenido, senor Mengele (환영합니다, 멩겔레 씨).
--- pp.109~110
이곳 농가는 사방으로 뚫려 있어 오직 크루크와 낡은 발터 소총과 쇠스랑 몇 자루만으로 버텨야 하니 전투력 막강한 모사드의 살인자들과 맞선다는 것은 정말이지 웃기는 소리다. 그래서 멩겔레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는 어디서도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낮이건 밤이건 턱수염을 잘근잘근 씹어 대고 유리컵의 함정에 빠져 질식할 위험에 처한 말벌처럼 뱅뱅 맴을 돌았다. 몇 알의 수면제를 복용한 뒤 새벽 3~4시쯤 잠이 들어도 조그만 소리, 삐걱대는 마루 판자 소리, 하찮은 벌레 소리에도 벌떡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자기 정체가 드러났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서독 정부는 멩겔레의 머리에 2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그는 마침내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 pp.149~150
우리는 독일의 이름으로 독일을 위해 우리 소중한 국가의 위대함을 빛내기 위해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배은망덕한 독일은 우리를 조리돌리고 최악의 적들이 우리를 멋대로 처치하도록 방치하고 있다. 이 세상 어느 나라가 가장 열렬한 종복들과 최고의 애국자들을 징벌하는가? 아데나워의 독일은 제 자식들을 삼켜 버리는 식인귀이다. 우리 가엾은 자들은 하나둘 차례로 모두 죽어 나갈 것이다…….
폭우가 치던 그날 밤에 멩겔레는 어느 때보다 외롭다고 느꼈다.
--- p.188
1964년 초반, 멩겔레는 끔찍한 소식을 접했다. 마르타의 편지를 읽어 나가던 그는 단검이 늑골을 쑤시고 들어와 심장에 박히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취득한 모든 대학 학위가 취소되었던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위반했으며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와 뮌헨의 대학들은 의학과 인류학에 대한 그의 박사 자격을 철회했다.
그토록 많은 노력과 희생이 알지도 못하는 관료들에 의해 허사가 되어 버리다니……. 멩겔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무수한 훈장에 빛나는 야심만만한 국민적 외과 의사, 우생학 연구의 위대한 희망이었으나 이제 가장 귀중한 보물, 가장 큰 자랑거리를 빼앗기고, 모든 경험이 백지화되어 하찮은 돌팔이 의사가 된 것이다!
--- pp.207~208
멩겔레는 그토록 경쾌하게 움직이는 곤충들을 부러워했다. 놈들은 십계명도 형법도 모르고, 원자 폭탄도 견뎌 낼 거라고 한다. 그는 독일 바퀴벌레가 가장 해롭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만족스러워했다.
---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