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Voltaire)
볼테르는 1704년부터 1711년까지 예수회가 운영하는 리세 루이르그랑(Lycee Louis-le-Grand)에서 신학(theology)을 비롯해 라틴어(Latin)와 수사학(rhetoric)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볼테르는 레전트(Regent)에 대한 풍자시로 인하여 1717년 5월 16일부터 1718년 4월 15일까지, 약 11개월간 바스티유 감옥(Bastille Prison)에 ‘최초’로 투옥되었습니다. 볼테르는 창문조차 없는 감방에서 글을 썼고, 이후 출간된 그의 데뷔작 오이디푸스(Œdipe)(1718)가 대중적으로 흥행하면서 작가로써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시절 비극(悲劇) 오이디푸스(Œdipe)(1718)를 시작으로 서사시(敍事詩), 철학, 역사서, 우화, 수필 등 분야를 막론하고 숱한 작품을 집필하며 왕성하게 활동하였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출판이 어려운 작품을 비밀리에 출간하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Bruxelles), 네덜란드 헤이그(The Hague), 프랑스 루앙(Rouen) 등을 직접 발로 누비며 출판업자와 만났고, 이 덕분에 그의 명성이 종교와 사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프랑스 밖’에서 먼저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아르테미르(Artemire)(1720), 마리암네(Mariamne)(1725) 등 몇몇 희곡의 잇따른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가로써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고, 가히 ‘볼테르의 시대’라 불리는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명예 못지않은 부는 기본!
“It is dangerous to be right in matters on which the established authorities are wrong.” "기득권층이 잘못된 문제에 있어서 옳은 것은 위험합니다.”
1726년 귀족 체발리어 드 로한차봇(chevalier de Rohan-Chabot)은 볼테르를 조롱하다 못해 폭력배까지 동원해 그를 겁박하였고, 급기야 볼테르를 재판조차 없이 바스티유 감옥(Bastille Prison)에 처넣었습니다. 귀족의 부당한 횡포에 직면한 볼테르는 평생 갇혀있을 것을 두려워해 영국으로의 망명을 탄원했고, 결국 칼레를 거쳐 영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당시의 경험은 볼테르가 ‘부당한 권력에 대한 분노’를 자각하게 한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활동하며, 프랑스 군주제와 상반된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작가라는 신분 덕분에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존 게이(John Gay),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메리 워틀리 몬타구(Lady Mary Wortley Montagu), 사라(Sarah), 말버러 공작부인(Duchess of Marlborough) 등 영국 상류층과 교류할 수 있었고 이에 자극받아 영어로 집필한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Those who can make you believe absurdities, can make you commit atrocities.” "부조리를 믿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잔학행위를 저지르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프랑스로 귀국한 볼테르는 영국에 망명할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종교관, 문학, 과학 등에 관해 호의적인 에세이 Letters Concerning the English Nation(1733)을 출간하였고, 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즉각적으로 탄압을 받아 또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볼테르는 1733년부터 1740년까지 프랑스 동북부에 위치한 시레이 성(Chateau De Cirey)에 머물렀습니다. 시레이 성은 국경에 가까운 외곽 지역으로 프랑스 정부의 체포를 피해 달아나기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당시 볼테르는 유부녀 에밀리 뒤 체틀렛(Marquise du Chatelet)과 불륜 관계였고, 그가 관리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그녀의 남편이 소유한 시레이 성(Chateau De Cirey)에 체류할 수 있었습니다. 도피 생활이 길어지면서, 볼테르는 2만권 이상의 책을 수집하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과학실험을 하는 등 연구와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I don’t know where I am going, but I am on my way.”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지금 가는 중이에요.”
1750년에는 그의 열렬한 팬을 자처한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의 초청으로 프러시아(Prussia)로 이주하였습니다. 공로훈장(the Order of Merit)과 연간 2만 리브레(20,000 French livres)의 연봉을 보장받으며, 작품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금융인 아브라함 허셜(Abraham Hirschel)과의 사기 사건, 과학자 마우퍼투이스(Maupertuis)와의 논쟁 등으로 프러시아 생활은 막을 내렸습니다.
“?Life is a shipwreck, but we must not forget to sing in the lifeboats.” "인생은 난파선이지만 구명보트에서 노래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759년 볼테르는 스위스와 인접한 프랑스 페르니에 토지를 구매했고, 페르니 성(Fernie Castle)(1759)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렀습니다. ‘페르니의 명망가’로써 그는 자신의 저택에서 제임스 보스웰(James Boswell), 아담 스미스(Adam Smith), 지아코모 카사노바(Giacomo Casanova), 그리고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과 같은 당대의 유명인들을 접대했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철학 사전(Dictionceet philosique)(1752)을 완성하였습니다. 그가 종교의 탄압으로 스러진 칼라스 사건(The Calas affair)(1762)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 시기의 일입니다. 볼테르가 숨을 거둔 스위스와 인접한 프랑스의 소도시 페르니는 현재 페흐네-볼떼흐(Ferney-Voltaire)라고 명명되었습니다.
“Cherish those who seek the truth but beware of those who find it.” "진실을 찾는 사람은 소중히 여기되 진리를 찾는 사람은 조심하십시오.”
1778년 25년 만에 고령의 나이로 5일간 파리를 다녀온 후 병이 났고, 같은 해 5월 30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평생 기독교를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파리의 교회와 묘지에서는 그의 매장을 거부하였기에 그의 지인들은 그의 시신을 Abbaye Saint-Pierre d'Hautvillers에 몰래 묻었습니다. 13년이 흐른 1791년, 그의 시신은 백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프랑스 최고의 영예인 팡테옹(Pantheon)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뒤늦게나마 ‘프랑스 전제정권의 반항아’가 아닌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a forerunner of the French Revolution)로 인정받은 셈입니다.
“Now, now my good man, this is no time to be making enemies." “이제 나의 선한 자여, 지금은 적을 만들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