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메리 셸리'보면서 여성이 쓴 글이라고 당시 사람들이 믿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책에서 보여주는 프랑켄슈타인은 어떤 내용 일지 읽어보고 싶었고, 뮤지컬'프랑켄슈타인'을 여러 번 보면서 매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달라지고, 내가 읽어내는 등장인물의 감정이 달라져서 책으로 읽는다면 어떤 감정을 느끼고 등장인물에게서 어떤 감정을 보게 될지 궁금해져서 꼭 책을 읽어봐야겠다 다짐했었는데 드디어 이번에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이 처음에는 무명으로 발표됐단 건 알았지만 이후에 메리 셸리 스스로가 굉장히 많은 부분을 고쳐서 재판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과거에 접했던 것은 재판 수정된 것은 한 수정된 것에 가까웠다며 거의 원조에 가깝다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생소함도 느끼고 완전히 새로운 걸 보는 느낌도 얻을 수 있었다. 책의 시작에는 로버트 윌튼이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만 나열되어 있어서 내가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있는 게 맞는지 싶어 표지를 다시 확인했다. 드디어 네 번째 편지에 다달아서야 이방인이 등장하면서, 아 이거 내가 보고 있는 게 프랑켄슈타인이 맞구나라, 이 이방인이 책의 이름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월튼 선장, 내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불행을 겪었다는 건 당신도 쉽게 눈치챘을 겁니다. - 굉장한 자의식 과잉이라고 생각했다. 불행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불행을 겪는 모든 사람들이 그 불행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불행이라 생각하지 나의 불행은 작고 사소한 것이라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내겐 친구가 하나도 없지. 성공에 열광해 기뻐할 때도 나와 함게 기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실망이 엄습한대도 내가 실의 속에서 비티도록 힘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내 생각들을 종이에 남기겠지만 그게 감정을 나누기엔 빈약한 매개체인 건 사실이다. 내게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겠어. 내 눈빛에 그 눈빛으로 답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림이.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창조주여, 내가 그대에게 진흙에서 나를 빚어 달라고 요청했소? 그대에게 어둠에서 나를 끌어내 달라고 내가 간청했소? <실낙원>
영화나 많은 매체를 통해 접해 왔던 <프랑켄슈타인>을 드디어 원작으로 접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시작은 메리 셸리가 1816년 시인 바이런 그리고 몇몇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유령 이야기를 하며 이후 각자 괴담을 쓰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1818년 런던에서 익명으로 첫 출판이 되었고 1823년 프랑스에서 '메리 셸리'라는 본명을 밝히고 두 번째 판이 출판되었으며 1831년 상당 부분을 수정해 개정판으로 내었다고 한다. 새움 출판사 여지희님 번역본은 1818년 출판된<프랑켄슈타인> 초판을 정본으로 삼아 번역한 책이다. 1818년 텍스트에서의 메리 셸리의 철학적 견해가 1831년 개정판에서는 사라졌다고 해서 1831년 번역도 함께 읽어보았다. 1831년 개정판은 줄거리에 큰 차이는 없으나 서사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부분의 말을 다듬었다고 하는데 나는 1818년 <프랑켄슈타인>이 훨씬 좋았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두 판본 중 하나의 번역만 읽어야 한다면 다른 판본 서문이라도 읽어보길 바란다. SF 소설을 읽으며 와닿는 구절이 이리 많기는 처음이다. 필사하다가 그냥 필름 인덱스 붙이는 걸로 대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내가 알고 있던 SF 소설의 편견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작품이었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도 탁월하고 심오한 철학적인 메시지도 명확히 드러나있다. 이런 소설을 메리 셸리가 열여덟에 썼다니, 게다가 200년 전에 이렇게 기발한 상상을 한다는 것이 어찌나 놀라운 일인지.
Frankenstein : Or the Modern Prometheus
이 책의 영문 제목이다.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의 영웅으로 최초의 인간을 창조했고 자신의 피조물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신들에게 속임수를 써 고기와 뼈 중 고기는 인간에게 주고 신이 뼈를 먹게 하여 제우스의 화를 사게 된다. 제우스가 인간으로부터 불을 빼앗아 버리자 프로메테우스는 헤파이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다시 불을 준다. 제우스의 분노를 산 프로메테우스는 높은 산 절벽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게 되는 벌을 받는다. 그렇다면 왜 프랑켄슈타인을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 표기했을까?
당신은, 한때 내가 그랬듯 지식과 지혜를 추구합니다. 당신의 소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당신을 찌르는 독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오. 내 경우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p. 43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월튼에게 했던 대사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연철학에 심취했고, 현실 세상과 관련된 진실을 탐구하는 일에 기쁨을 느꼈고, 생기 없는 물체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커져가는 열망 속에서 인간적 본성이 혐오스럽다고 느낀다. 결국 자연철학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한 재앙이라며 한탄했을뿐더러 자신이 습득한 지식과 열망으로 창조해 낸 피조물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도 프랑켄슈타인도 생명 창조라는 자연의 섭리를 무시한 채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죄를 짓고 벌을 받는다는 점에서 매우 닮아있다.
그들과 공감했고 부분적으로 이해했지만 나는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였어. 의지할 누군가도 없었고 아무 핏줄도 없었어. 내가 떠나온 길은 無였고, 내가 죽는 걸 한탄할 어느 누구도 없었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올랐지만 그걸 풀 수가 없었어. p. 197
괴물(이 책에서 빅터가 창조해낸 피조물은 이름이 없다)은 빅터에게서 버림을 받고 도피자의 삶을 살다가 펠릭스 가족이 사는 집에 몰래 머무르게 된다. 펠릭스 가족을 숨어서 지켜보며 언어도 감정도 스스로 터득한다. 그들은 너무도 가난했지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에 괴물은 감동을 받고 음식 훔쳐먹는 일도 그만두고 숲속에서 열매를 따다 먹는다. 가끔 땔감도 몰래 해다가 집 앞에 가져다 놓기도 하는 선의를 베풀기도 한다. 어느 날 땔감을 해서 집에 가져가는 길에 가방 하나를 줍는데 거기엔 책과 옷들이 들어있었다. 그중 <실낙원>을 읽으며 자신의 상황에 빗대어 본다. 아담은 신의 손으로 세상에 나온 행복하고 축복받은 완벽한 피조물이었고 창조자의 보호를 받았는지만 자신은 불행하고 쓸쓸했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잘 들어맞는 상징은 사탄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괴물은 펠릭스 가족들과 소통하고 싶어 했지만 추악한 외모 때문에 결국 그들에게 배척당하고 만다. 괴물이 창조자인 빅터를 만나 자신이 그동안 도망 다니며 겪었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는 무한한 동정심이 들었다.
"너는 내 창조자이지만, 너의 주인은 나야. 어서 복종해!." p. 259
자신을 창조한 사람은 당신이지만 당신의 주인은 자신이며 복종하라니 너무 끔찍한 발언이다. 이 대사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 같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창조한 기계나 로봇,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는 날이 올 것인가에 대한 공포는 오래전부터 화두가 되어왔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했다면, 나는 산업혁명 시대 속의 인간에 비유해 보고 싶다. 1920년에 쓰인 카렐 차페크의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라는 희곡의 '로봇'이라는 단어를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로봇이 다량 생산되면서 노동력이 남아나고 인간은 아이들을 생산할 수 없게 되고, 로봇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는가 하면 인간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심지어 알뀌스뜨는 과거의 노동과 사소한 근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 기도하며 과학 기술의 발달이 위대한 일이며 인류를 발전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한다. 200년 전, 100년 전 상상 속의 인물은 현재 우리 모습에 반추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몇 해 전, 이 세상의 이미지들이 처음 내게 펼쳐졌을 때, 내가 여름의 활기찬 따스함을 느끼고, 나뭇잎들이 바스락대는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을 들었을 때, 그것들이 내게 전부였을 때 울다가 죽었어야 했는데. 이젠 죽음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야. p. 345
이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의 의지대로 창조된 사람이 누가 있으랴마는 괴물이 원했던 건 그다지 거창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에게 외면당한 괴물은 빅터에게 자신과 함께 살 여자를 창조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분노에 찬 괴물은 빅터를 파멸시키려 하고 빅터는 그런 괴물을 쫓는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괴물이 월튼에게 쏟아내는 서너 페이지 분량의 대사는 일종의 고백성사처럼 느껴졌다. 괴물이 느끼는 불행과 절망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금지된 욕망을 채우며 행복을 추구하려는 빅터의 모습에 분노하여 그는 복수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인류가 자신에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만 유일하게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하는지 되묻는다. 자신의 창조주를 불행으로 모는 데 사용했을 자신의 손을 보면서 스스로를 증오한다. 책 리뷰를 작성하면서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에 붙혀진 이름이 없어 '괴물'이라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악한 인물을 고르라고 한다면 과연 몇이나 '괴물'이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싶다. 책장을 덮으며 문득 떠오르는 문구가 있었다. 유발 하라리가 자신의 저서 <사피엔스>에 썼던 문구를 읽고 겸손하지 않을 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감사합니다^^
|
|
연극 뮤지컬에 완전히 푸욱 빠져서 정말 쉴 새 없이, 이작품 저작품 열심히 봤었다. 그중에 가장 오래토록 강하게 남아있는 작품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뿌리가 같다고나 할까..ㅎㅎ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소설 원작인. 사람이 욕심이든 무엇이든..원해서 숨을 쉬는 존재를 만들어낸 다는 것. 그것이 창조자조차 공포에 질려 버림받았음에도 살아남아 숨을 쉬고,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존재로 바뀌어가는 것. 정말 매력적이면서도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까.
처음 책을 봤을때 표지가 왜이렇게 내용과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무시무시한 괴물의 모습도 아니고, 미치광이 과학자도 아니고. 미술 작품 속에서나 보일 법한 젊은 여인의 우아한 초상화 같은 표지가 무얼뜻하는걸까..빅터의 여인 엘리자베스인가..;; 알고보니 이 섬뜩한 이야기는 무려 200년 전에 여성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고 하지만..정말..어떻게 200년 전에 이렇게 무섭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과학의 힘에 취했고, 스스로의 능력에 취한 빅터는 홀로 연구에 몰두한다. 생명창조라는 것에 몰두해서 빅터가 만들어낸 생명은 스스로도 공포를 느껴 도망가버릴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사람에 의해 태어난 생명, 죽은 시체들에 의해 탄생된..살아있지만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존재. 창조자조차 외면한..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인간들의 감정만큼은 그리 변덕스럽지 않다. 나는 생명 없는 육체에 삶을 불어넣겠다는 목적 하나로 2년 가까이 열심히 일했다. 이것 때문에 휴식과 건강을 빼앗겼다. 정도를 훨씬 넘어선 과도한 열정으로 이것을 꿈꾸었었다. 하지만 이제 마치고 나니 그 아름다운 꿈은 사라지고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가 가슴을 채웠다. " _______P. 81
안타깝게도 빅터에게 능력은 있었을지언정..똑바로 된 양심은 없었던 것 같다. 대체 어떻게 저런 상상을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을까..ㅠㅠ 이렇게 공포를 느끼고 모든걸 던져버리듯 버리고 떠난 빅터. 그러나 그 공포심에선 벗어날 수 없어서 도망친 이후에도 내내 두려움에 떤다.
이후부터 버려진 괴물의 복수가 시작된다. 첫번째는 빅터의 소중한 동생. 살해된 동생을 죽인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저스틴 모리츠. 빅터와 빅터의 가족이 모두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빅터는 그녀가 범인이 아님을 알았지만 사형으로부터 그녀를 구할 순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좌절하는 가족들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본인에 의해 탄생한 괴물이 복수심으로 본인의 가족을 죽였다. 빅터는 괴물을 찾아 없애버리고자 한다. 그러나 괴물은 빅터에 버려진 이후에 홀로 살아남았고 성장했다. 그는 더이상 실험실에 놓여져있던 실험체가 아닌가 하나의 생명체가 된 것이다.
"동정심을 발동시켜봐, 나를 경멸하지 말고. 내 얘길 들어줘. 다 듣고 나서 내가 마땅하다고 보는 동정심을 주든가 나를 버리든가 해. 하지만 내 말을 좀 들어. 인간의 법에 의하면, 기소된 사람들은 아무리 끔찍한 짓을 저질렀어도 유죄판결을 받기 전에 자기를 변론하는 게 허락되지. 내 말을 들어줘, 프랑켄슈타인. 그대를 나를 살인자라고 비난하지. 하지만 그대는 그 잘난 양심으로 그대 자신의 피조물을 파괴하려 하는 거야. 오, 인간의 영원한 정의를 찬양할지어다!"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P. 153
왜이렇게..똑똑하고..불쌍하고..잔인하고..인간적인건지 ㅠㅠ 보는 내내 안타깝고..무섭고..ㅠ
보는 내내 "번역은 고뇌의 산물 같다."라는 역자의 문장이 눈 앞에 왔다갔다했다. ㅎㅎ 와..200년 전에 쓰여진 이 문장들. 번역자에 의해서 어느 정도는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질것도 같은데 그런 재미로 다른 번역자들의 같은 작품을 골라보는 것도 은근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일단! 이 책의 문장 자체가 좀..고급스럽다? 라고 느껴지는 표현들이 좀 있어서; 다른 번역도 보고 싶다는..;;
솔직히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던거와 다르게 초반부터 막 몰입감이 휘몰아치는건 아니다. 그치만 점점점 갯벌에 발이 빨려들어가는것처럼 보다보면 깊숙~하게 책 속에 몰입하게 되는 책이었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
|
프랑켄슈타인은 알지만 정독으로 읽어본 것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작품의 구성과 스토리는 상당부분 달라 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작품의 탄생 배경을 알아 보면서 그 당시와 지금, 그리고 미래를 한 줄로 엮어 보니 동일한 구심점을 가지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
소설은 월튼이 편지글의 형식으로 한 남자를 만난 기이한 경험을 누이에게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부분도 너무 흥미로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주 세련된 방식의 구성이 200년 전의 시도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심지어 메리 셸리는 18세에 이 소설 쓰기를 구상했다고 하니......
월튼은 극지방을 탐험하던 차에 조난당한 몸 상태가 거의 쇼크 상태이 이른 한 남자를 발견한다. 이 조난자가 바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길래 이리도 피폐해진 몸으로 그 어디메까지 와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신의 기구한 삶과 운명을 월튼에게 고한단 말인가.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꿈을 담아 연구를 거듭한 끝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생명을 창조하고 싶었다. 스스로 창조주가 되어 자신이 만들어낸 생명체로부터 존경과 사랑과 애정을 듬뿍 받아 세상에서 유일한 만물의 으뜸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과는 완전히 어긋난 일이 생기고 만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연구는 사실 죽은 시체들을 이용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어서 말그대로 모험일 수 밖에 없었다. 생명이 탄생했지만, 빅터의 야망은 어느새 욕망으로 변질되어 버렸고, 오로지 성공시킨다는 일념하에 끝마친 실험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일로 충격을 받고만다. 괴물은 빅터를 경악하게 만들고 비참한 결과를 곱씹어 자신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비겁한 자로 만들어 버렸다. 괴물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으나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세상에 어울리지 못하고 추하고 두렵고 파괴자의 모습으로 오해를 받는 괴물이다. 괴물은 그렇게 태어난 자신을 원망하며, 외로워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시키려 무단히 노력한다. 괴물은 괴물대로 세상에 소외되어 생명부지에 힘쓰는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프랑켄슈타인에 닿을 생각으로 모든 오해와 편견과 공포를 견뎌내려 애쓴다. 괴물의 측은함이 베어나오는 장면들이 계속 마음 속에 남는다. 괴물의 겉모습과는 별개로 마음은 충분히 순수하고 인간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았지만 매 순간마다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비명이 소름끼치도록 마음에 남았다.
결국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만나 자신의 버린받음을 확인했고,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소중한 사람들을 죽여 간다. 괴물의 살인은 역시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또한 괴물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프랑켄슈타인의 고집스러운 독단과 독선, 그리고 아집은 안타까운 그의 말로를 예상하게 했다. 결국 빅터는 죄의식과 죄책감에 빠져 자신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도 지켜내지 못한 어리석은 하갖로만 남아버렸다.
괴물과 빅터의 갈등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빅터는 괴물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머나먼 극지망까지 추격을 해 온것이고, 괴물은 그런 빅터를 계속 이끌며 빅터에게 마지막까지 인정받고자 기회를 엿본다. 하지만 이 또한 틀어진 운명을 바로 잡아주진 못했다. 결국 월튼 앞에서 빅터는 죽음을 맞이한다. 빅터는 죽는 순간까지 괴물을 부정하고 자신의 피조물이란 사실을 수치스러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괴물은 지켜본다. 괴물은...그러나....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온정을 바쳐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추모한다. 그를 추앙한다. 그를 존경함을 고한다. 어찌보면 괴물의 이중적인 면모일수도 있겠지만, 그의 평생에 걸친 외로움과 고통스러움의 싸움에서 벗어나고자 한 발버둥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듯 하다. 물론 괴물의 살인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괴물은 세상에서 존경받았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인격을 높이 사며 그의 공로들을 인정하며 자신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음에 감사함을 표한다. 그리고 괴물 역시 자신의 마지막 운명의 길인 죽음을 맞이하러 홀로 떠난다.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며 그때의 시대적 고민이 지금의 시대적 고민이며 미래의 시대적 고민이 될 것임을 확인하니 이상한 기분마저 든다. 인간의 영위란 무엇이며, 어떤 삶을 꿈꾸며 살아가는 안위여야 하는지 돌아본 시간들이다.
#프랑켄슈타인 #새움 #메리셸리 #리딩투데이 #리투서평단 #독서카페 |
|
북극을 경유하는 항로를 통해 진행하고 있던 배의 선원들은 멀찍이 보이는,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큰 형체의 존재를 태우고 지나가는 개썰매를 보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얼음덩어리 위에 표류되어 있다고 부르는 게 맞을만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 사람을 본 선원들은 그를 배에 태워 손님으로 대했다. 그 손님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된 후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선원들이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목격했던 형체이자, 이토록 혹한의 기후인 북극까지 쫓아올 정도로 증오하는 그 존재와 얽힌 자신의 이야기였다.
북극에서 발견된 그 '손님'은 놀랍게도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의 학구열이 강한 신사였다. 그 학구열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생명이라는 것에 대하여 연구를 하기 위해 시체 안치소와 납골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열정적인 모습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한없이 광기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탐구에 심취하여 끝없는 연구를 계속한 끝에, 마침내 빅터는 연구의 성과를 내놓게 되었다. 바로 거대한 체구를 지닌, 훗날 그가 증오해 마지않아 북극까지 쫓아가게 될 그 존재를 만들어내고, 이에 생명을 불어넣게 된 것이다. 성공에 대한 기쁨도 잠시 빅터는 금세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의 외형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고, 끝내 이 존재를 실험실에 버려둔 채 뛰쳐나와 도망을 쳐 버렸다. 빅터는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에 대하여 잊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빅터의 의지를 비웃듯, 고향으로부터 들려온 동생 윌리엄의 부고, 정확히는 피살 소식이 그를 현실로 끌어들였다. 이 소식에 정신없이 제네바로 돌아간 빅터는, 그곳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로 보이는 형상을 발견하자마자 그 존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더 나아가 그 존재가 자신의 동생을 죽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억울한 사람이 죄인으로 지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빅터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러나 증오해 마지않는 존재와 대면을 하게 되는데….
『프랑켄슈타인』은 월튼 선장, 빅터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 각각 화자가 되어 이끌어나가고 있는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소설을 완성한다.
이 소설에서 프랑켄슈타인은 호기심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지만 그 창조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고 방치하고 버려둔다. 이것은 생명을 얻은 뒤 사회에 멀쩡하게 적응을 해 나갈 수 있는 존재를 괴물로 만들어 버렸고, 괴물이 되어 버린 생명체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차별하여 없애려는 인간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다. 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생명체는 자신의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소원을 말하고 부탁하고 더 나아가 협박도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다. 그리하여 범죄를 저지르며 진짜 괴물이 되어버리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00여 년 전에 쓰여진 이 소설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통해, 정확히는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만들어낸 이름 없는 존재를 예로 보여주며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 가져다줄 이익과 그에 따른 과학자의 윤리의식과 책임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인류의 미래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활용하는 데 한층 더 신중해야 하며, 과학자들은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신을 성찰해 나가며 윤리적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새움>의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프랑켄슈타인』은 영국에서 출간된 초판을 번역한 것으로 과한 번역을 피하고 원전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다. 작가의 의도를 잘 전달하는 자연스럽고 세련된 번역은 읽는 내내 마치 원서를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고전이 딱딱하고 어렵다고 생각하여 『프랑켄슈타인』을 읽기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
|
1797년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윌리엄 고드윈과 여성주의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사이에서 태어난 저자는 생후 며칠 만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버지는 재혼했고, 계모의 질투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아버지의 서재에서 많은 장서를 독파했고, 당대 최고 사상가들과 아버지가 나눈 대화를 어깨너머로 들으며 지적 허기를 채워 나갔습니다. 1814년 아버지의 제자 퍼시 비시 셸리를 만나 그와 함께 유럽으로 도망쳤고, 1816년 시인 바이런 경, 의사 존 폴리도리, 남편 셸리와 모인 자리에서 괴담을 하나씩 짓기로 약속을 해서 쓰게 되었습니다. 그 결실로 1818년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로 나타났으며, 1826년 "최후의 인간", "로도어", "포크너" 등 여러 소설과 여행기를 출간했습니다. 1851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동생 마가렛이자 새빌 부인에게 보내는 윌튼의 편지로 시작합니다. 그는 북극해 탐험을 결심했고 실행에 옮겨 항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항해는 순조롭지만 친구가 없음에 아쉬워하던 중 7월 31일 어떤 사람을 뒤쫓던 사람을 구조합니다. 성심을 다한 간호 덕분에 그는 회복을 했고 윌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1권의 1장이 시작합니다.
구조한 사람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으로 제네바 출신입니다. 선조들은 명예와 명성을 누리며 나랏일을 맡아 했으며 저명한 가문 중 하나라지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빅터를 맏이로 낳고 7년 동안 유일한 자식이었기에 교육과 건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답니다. 아버지의 누이동생은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낳고 죽습니다. 누이동생의 남편이 새 장가를 가는데 누이가 낳은 자식인 아기 엘리자베스를 맡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빅터의 아버지는 기꺼이 동의했고 엘리자베스를 데려오며 부모님은 빅터의 배후자로 결정했답니다. 이때부터 엘리자베스 라벤자는 소꿉친구이자 벗이 되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빅터의 남동생들은 나보다 훨씬 어렸고, 아버지의 친구의 아들인 헨리 클리벌과 무척 친하게 지냈습니다. 빅터가 17살이 되자 잉골슈타트 대학교에 입학하려고 준비하던 중 엘리자베스가 성홍열에 걸렸고, 어머니도 걸려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대학교로 가서 그는 자연과학 중 화학에 사로잡혀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연구로 인해 뺨은 점점 창백해졌고 수척해졌지만 그는 어쩌면 실현될지도 모를 희망에 매달려 계속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생명 없는 육체에 삶을 불어넣는 그 연구가 마침내 결실을 맺었고, 자신의 손으로 창조한 그 존재를 보는 순간 흉측한 모습에 아름다운 꿈은 사라지고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가 가슴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도망쳐서 밖을 나오니 빅터의 연락이 뜸해진 것을 걱정한 가족의 부탁으로 친구 헨리가 왔습니다. 빅터는 헨리를 보고 마음이 놓였는지 의식을 잃었고 몇 달 동안 헨리가 간병을 했습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안심시킨 후 고향으로 가려고 했는데, 막냇동생이 살해당했다는 편지를 받습니다. 빅터는 서둘러 집으로 갔으나 막상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막냇동생이 죽은 장소에 가봅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자신이 창조한 그 괴물이 있습니다. 그 괴물을 본 순간 자신의 동생을 죽인 살인범임을 느낍니다. 순식간에 괴물은 사라졌고 빅터는 집으로 가서 죄책감을 숨긴 채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일하던 하녀가 살인범으로 지목되고 재판을 받습니다. 증거도 없고 괴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비난받을까 두려운 빅터는 말하지 못하고 하녀는 살인범으로 처형 받습니다.
아픈 사건을 겪은 빅터의 가족은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여행을 왔고 빅터는 혼자 산에 오릅니다. 산 정상에서 그 괴물을 만났고, 괴물은 빅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을 내리라며 2권이 시작합니다. 괴물은 어떻게 살아왔고, 빅터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프랑켄슈타인>에서 확인하세요.
괴물과 동격으로 연상되는 <프랑켄슈타인>을 책으로 읽은 것은 처음입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접해서 그 내용이 다인 줄 알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내용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의 <프랑켄슈타인>은 처음 출간한 1818년도를 정판으로 삼아 번역했습니다. 1818년 런던에서 나올 당시 익명이었고, 1823년 프랑스에서 작가의 본명을 밝혀서 두 번째 판이 출판되었다가 그 후 1831년 많은 부분을 고쳐 개정판을 냈습니다. 1831년 개정판에선 작가가 지나치게 대담해 서사적 흥미를 손상시키던 부분이나 문체들을 다듬어 출판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인지 문체는 유려할지 몰라도 작가 고유의 개성과 견해가 사라졌다는 평도 있습니다. 독자로는 원전으로 읽는 편이 더욱 작가를 느끼기에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덕분에 처음에 나온 작가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책에서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은 한 가족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고민합니다. 그가 느끼기에 인간들이 높게 평가하는 재산은 부와 결부된 고귀하고 순수한 혈통이랍니다. 인간은 이런 이점들 중 하나라도 있으면 존경을 받고, 하나도 없으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부랑자이거나, 선택된 소수의 이익을 위해 자기 능력을 허비하게 운명 지어진 노예로 취급한다고요. 자신은 창조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돈, 친구, 재산이 없고, 모습도 끔찍하고 혐오스러우며 인간 같은 특성도 부족합니다. 아무것도 모를 땐 좋았지만 지식을 얻게 되니 자신이 불행한 것을 알게 되는 괴물, 번민에 사로잡혔고 인간의 배신을 느끼고 알게 되며 더욱 혼자라는 외로움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지요. 그렇기에 아무 연고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존재인 괴물은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괴물을 배척하며 죄를 짓는데 괴물은 생김새로 그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라 인정받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은 당연하게 취급당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기준 밖의 존재들에게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지원도서입니다.
|
|
제목 :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저자 : 메리 셸리 출판사 : 새움출판사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제목과 그 특유의 나사 박힌 괴물 얼굴이 매칭되는건 나뿐만은 아닐 걸로 생각된다(대개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그 무서운 얼굴을 한 괴물이 아니라 그 괴물을 만든 사람이다. 키가 2m 40cm에 이르는 괴물은 그냥 '괴물'이다. 이 소설은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자기 의도와 상관 없이 태어난 불행한 '괴물'과 그 괴물때문에 고통받는 괴물을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이다.
북극해를 항해하는 '월튼'은 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구조한다. 월튼은 그와 항해를 계속 하던 중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이야기가 본론이다.
'그'는 제네바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다. 고대의 자연과학에 심취해있던 그는, 커서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더 탐구하게 된다. 많은 지식을 쌓은 그는 생명이 없는 물체로 생명을 가진 '괴물'을 창조해낸다. 막상 자신이 만들고 그 흉측한 외모를 보고 도망가버렸던 주인공 '프랑켄슈타인'. '괴물'은 태어나자마자 혼자였고, 모든 것을 혼자 배웠다. 사람들 근처로 가려고 하면 자신을 두려워하고 죽이려 하였다.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가지고있던 '괴물'은 사회 구성원에게 다가가고 싶어하지만 누구도 그를 반기지 않는다. 결국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고향을 찾아가 그에 대한 복수로 그의 동생을 살해한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똑같은, 흉측한 외모의 여자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상대도 인간 사회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니 자신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괴물'은 동반자만 만들어준다면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곳으로 떠난다고 한다. '괴물'에게 벗어나고 싶었던 프랑켄슈타인은 또 다른 괴물을 만들려 하지만, 새로운 괴물의 인격과 행동이 두려워 결국 만드는 것을 포기한다. 그런 후 그의 삶은 더 끔찍한 고통이 따라온다.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중에 누가 진짜 괴물일까? 의도치 않게 만든 피조물을 괴물이라 느끼고 계속 두려워하던 프랑켄슈타인. 동반자를 만들어주는 것마저 새로운 괴물을 만들어 아이가 태어나진 않을까 두려워했던 그는 왜 만드는 도중에는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을까? 그렇다면 괴물은? 외모는 괴이하고 흉측하게 태어났지만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고 심지어 그를 만든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마저도 그를 괴물로 취급하며 멀리한다. 그의 행동이 악한 행동이라는 것은 이견이 없지만 그는 괴물이 되고 싶어 되었나?
이 책을 읽다보면 '괴물'은 우리가 사회에서 차별하는 대상을 표현하는 듯 보이기도 하다. 200년 전에는 여성이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지나서는 미국과 서구 사회에서 흑인이나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우리 나라에도 존재하는 외국인 노동자(특히 동남아에서 온)에 대한 차별 등등. 이런 차별의 특징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별 문제 없는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숫자가 늘어나더라도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노예 제도가 폐지된지 15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발간한지 200년도 넘은 도서이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주는 작품은 역시 고전명작이라 부를만하다. 내가 너무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고 줄거리도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읽고 알았으니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후대에까지 생각할 것을 남겨주는 좋은 작품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고전문학의 대표 서적 중 하나라 내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보다 보니 또다른 새로운 느낌이었다. 쉽고 빠르게 읽히는 장점과 더불어 생명의 가치와 윤리라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들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고전이지만 여러 세대를 걸쳐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들에는 이유가 있고, 시대를 앞서 보는 현명한 혜안이 있는 작가의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
|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시리즈 중 한 권이다. 현재 4권까지 나왔다. 1818년 초판본을 원전으로 삼았다. 많은 번역본들이 1831년 개정판을 번역본으로 삼았는데 1818년 판본에서 두드러졌던 작가의 철학적 견해가 개정판에서는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 부분은 나의 영역이 아니라 그냥 넘어간다. 집에 이전에 사놓은 책이 있어 몇몇 비교하니 주인공 친구의 이름이 다르다. 영국식으로 하면 헨리지만 불어로 하면 앙리인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내용도 세부적인 부분에서 낯선 곳이 많다.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주인공이 창조한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인 줄 안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등의 원전에 대한 갈망이 다시 생겼다. 실제 그 괴물을 창조한 인물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다. 괴물에겐 이름이 없다. 이 소설 속 괴물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현재 과학적 기준으로 말도 되지 않는다. 괴물이 집을 떠나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면 모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달아난다. 때문에 괴물은 숨은 채 살아간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말과 글을 배운다. 그가 한 눈먼 노인 가족 곁에서 말과 글을 배우는 장면은 완벽한 자기주도 학습이다.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데 그치지 않고 감정마저 배운다. 그가 바란 것은 자신의 외모와 상관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편협한 시각은 그의 외모에 집착한다. 무섭고 두렵다. 이 감정이 그에게 전달되면서 그의 백지 같은 마음에 악이 스며든다. 이 소설의 백미는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처음부터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좇아 북극까지 가는 과정에 만난 선장의 편지 속에 이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괴물이 말하는 부분을 읽다 보면 얼마나 많은 착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영화의 이미지에 압도되어 실제 내용은 어느 순간 왜곡되고 변했다.
다시 과학을 한 번 돌아보자. 그 당시 과학은 급속하게 발전하는 중이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은 그 시절 인류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기를 통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는 설정은 마법이 곁들여진 판타지에서나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의 창조물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아주 독창적이다. 기존의 자연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과학을 덧붙여 만들어낸 괴물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 괴물이 지닌 놀라운 능력 등은 그 시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런 설정과 모습들이 아마도 후대에 많은 SF 작가와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소설들을 다시 읽는 것은 그 작품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다. 물론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볼 때 다시 영화의 이미지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아주 많다. 예상한 것보다 잘 읽혔고, 재밌었지만 현대 과학 지식을 조금 가진 나에게 솔직히 거슬리는 대목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이라고 불리는 이 소설은 읽을 이유가 충분히 많다. 번역에 따라 호칭이나 이름 등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