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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은 동화작가로 알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당연히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크 트웨인은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라는 책도 떠올려볼 수 있다. 부끄럽게도 오래전에 한 번 읽었을뿐이라 내용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크 트웨인의 풍자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얼마나 날카롭게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느낌은 강하게 남아 있다.
"나는 13세기 후의 미국이 떠올랐다. 남부의 '가난한 백인들'은 노예주들에게 늘 무시를 당했으며 수시로 모욕을 당했다.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이 근본적으로는 노예제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노예제를 지지하고 영속시키자는 모든 정치적인 운동에서 항상 무기력하게 노예주 편을 들었으며, 결국에는 자신들을 타락시키는 그 제도의 붕괴를 막기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어깨에 총을 메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애처로운 역사와 관련해 위로가 될 만한 사실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가난한 백인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노예 소유주들을 증오했으며 스스로를 수치스러워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런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고 적절한 상황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표출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 의미가 있다. 아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왜냐하면 비록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아서 왕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354) 얼간이 윌슨에서의 주인공은 제목에 나와있는 윌슨이 아니라 톰과 록시일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록시겠지. 책의 내용을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노예 하녀인 유모 록시가 겉모습으로는 주인집의 아기와 구별하기 힘들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무도 모르게 두 아기의 운명을 뒤바꿔버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미국의 노예제가 시행되고 있던 때이다. 이미 다른 책을 통해서도 알고 있겠지만 재산으로 여겨지는 '깜둥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 있었고 그것은 그 사람의 성품과 행위, 심지어 외모와도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아가게 될 뿐이다. 백인과의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깜둥이가 대를 거치면서 겉모습으로는 깜둥이가 아닌 백인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피부가 하얀 법적인 깜둥이의 이야기는 노예제의 실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모순되는 것들을 찾아보게 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가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단지 노예라는 이유만으로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해 감옥에 가두지 않는 이야기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주인집의 아기와 노예하녀의 아기가 비슷하게 자라나고 있을 때 두 아기의 옷만 바꿔버린다면 겉모습으로는 뒤바뀐 아이의 운명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노예'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물론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곳곳에 늘어놓으면서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얼간이 윌슨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끝을 낼때까지는 솔직히 그런 느낌없이 이야기자체에 빠져들었을 뿐이니까. 뒤바뀐 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명문가의 자제로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협박하며 살아갈 궁리를 하는 록시의 삶은 어떻게 될지, '얼간이'로 조롱받는 윌슨의 지혜는 그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을지...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정직하게 복선처럼 깔려있는 것이 이 책을 탐정소설처럼 읽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이미 마크 트웨인의 결정적인 반전을 보여주는 이야기 형식에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장면이 연출될지를 미리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결말에 이르를수록 이야기는 더 재미있어졌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 내용들을 다시 곱씹어 보면, 마크 트웨인이 인용하고 있는 '얼간이 윌슨의 책력'에 담겨있는 글들이 더욱 심오하게 느껴지게 된다. 물론 '당신이 굶주린 개를 구해서 잘 살게 해준다면, 그 개는 당신을 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개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다'같은 글처럼 읽는 즉시 동감하며 웃게 되는 그런 글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심지어 이런 글조차도 한번 더 읽어보면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지 않는가.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기에는 이미 너무 오래전에 씌여진 글이라 정말 재미있는 추리소설, 시대문학처럼 읽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시대에 이 책을 읽는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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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에는 거의 백인일지라도 흑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이면 흑인, 즉 노예가 되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여러 면에서 백인과 흑인의 삶을 대조한 문장들이 놀라웠다. 또한 세월이 흘러 자신의 진짜 신분인 백인 귀족이 되었지만 이미 흑인 노예로 살아온 탓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진짜 상속자의 모습도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자신의 아들을 '주인님'이라고 부를 만큼, 훗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다시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할 만큼 간절했던 록시의 모성애를 지켜보며 뭐든 지나친 것은 독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윌슨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평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떠도는 의견에 자신의 의견을 편승해 버리는 대중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언제나 말을 바꿀 수 있으며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크게 개의치 않으며 지나간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가 지금 느끼는 평등과 자유는 당연한 것이 아니며 과거 누군가는 이를 위해 고군분투했음을 상기시켜 본다. 그리고 누구도 '얼간이'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의 일들에 올바르게 반응하고 판단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게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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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데이비드 윌슨이 도슨스랜딩 마을에 온다. 그는 변호사이자 토지 측량사, 회계사이지만, 마을에 온 첫날 뱉은 말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얼간이로 취급받는다. 그의 취미는 손금보기로, 유리판에 마을 사람들의 지문을 채취한다. 노예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강아래(남부 지역)로 팔려가는 것이다. 노예 록시는 자신의 아이도 강아래로 팔려갈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의 아이(톰)와 주인의 아이(체임버스)를 바꿔치기 한다. 톰은 그렇게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아버지 퍼시가 죽고 나서 퍼시의 형인 드리스컬 판사에게 맡겨진다. 록시는 자유인이 되어 증기선 객실 담당 하녀가 되었다. 톰은 알콜과 도박에 빠졌으며, 그만큼 빚을 졌다. 톰은 빚을 갚기 위해 여자로 변장하여 절도를 하고 장물을 취급하여 빚을 갚으려한다. 자유인이 되었던 록시는 돈을 저축했던 은행이 파산하면서 무일푼이 되었다. 그녀는 약간의 온정을 기대하며 톰을 찾아갔으나, 톰은 그녀를 냉대하고, 록시는 톰에게 아이가 뒤바뀌었음을 알린다. 한편, 도슨스랜딩 마을에 이탈리아 형제가 왔다. 드리스컬 판사는 톰이 이 형제들과 싸움을 하지 않고 꼬리를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톰 앞으로 작성한 유언장을 찢어버리고 이 형제들에게 대신 결투를 청한다. 판사가 결투 전에 유언장을 다시 작성한 사실을 알게 된 톰은 얌전히 지내기로 하고, 록시를 속여 강아래에 노예로 팔아 빚을 갚는다. 하지만, 록시는 살아 돌아오고, 톰은 노예 주인에게 돈을 돌려줘야 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절도를 하려다 판사를 죽인다. 하필이면 그 자리에 있던 이탈리아 형제들이 죄를 뒤집어 쓰게 된다. 형제들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얼간이 윌슨은 자신이 채취했던 지문을 바탕으로 두 아이가 뒤바뀐 것을 밝혀낸다. 체임버스는 주인의 자리를 찾고, 톰은 강아래로 팔려간다. 생각들 [얼간이 윌슨]이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톰과 록시이다. 특히, 록시는 아이를 바꿔치기 하고, 톰을 협박하고, 톰에게 속아 노예로 팔렸지만 다시 살아오는 인물로 엄청 끈질김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는 것은 교회 뿐이다. 두 아이의 운명이 바뀌는 부분에서 [왕자와 거지]가 떠오른다. 물론, 그 외에 노예제도와 흑백주의가 가미되어 있다. 톰의 실제 아버지는 백인 대령이고, 톰의 얼굴은 거의 백인에 가깝다. 하지만, 삽십이분의 삼십일이 백인이어도 법과 관습에 따라 깜둥이이다. 록시에게서 아이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톰은 자신 속의 '깜둥이'를 느꼈고, 체임버스 역시 나중에 주인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게 되었을 때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이 그저 노예의 모습을 보인다. 마치 노예라는 본성이 피와 학습에 의해 지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노예제의 한계나 종말을 보여줄 생각이 있었을까. #얼간이윌슨 #마크트웨인 #창비 #창비세계문학리뷰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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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이 인종차별 자체만을 두고 이 작품을 썼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얼간이 윌슨]의 작품해설에도 실려 있지만, 링컨 대통령만 해도 인간 존엄의 차원이 아닌 정치적인 목적에서 노예제 폐지에 선 인물이었고 남북전쟁 후 미국사회는 노예제가 폐지되고 인종에 대한 국민 의식이 양화되는 방향으로는 결코 흘러가고 있지 않았다. 창비세계문학 시리즈 중에 하나인 [미국의 아들]이 발표된 1940년까지도 아주 집요하고 완고한 인종차별 의식이 미국의 뿌리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얼간이 윌슨]이 발표된 1894년의 상황이야 말해서 무엇하리.
그런 상황에서 인종분리에 대한 진정으로 균형 잡힌 시각은 적어도 백인들 사이에선 존재할 수 없었다고 본다. [헬프]가 영화화되었을 때 어느 흑인 비평가가 노예제의 참상을 백인의 시선으로 그린 망작이라고 비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 자체가 맞는 말이라기보다 피해자의 심정을 가해자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한계의 측면에서 저 비판에 일부 공감했다. 노예제를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이 아무리 민첩해도 그 아이러니를 고발하는 날렵함은 흑인 작가를 능가할 수 없다는 건 [빌러비드]나 [미국의 아들] 같은 작품까지 예로 들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얼간이 윌슨]은 더구나 그 속에서 흑인을 가리키는 표현들로 논란의 소지까지 있었다고 하니(작품 해설 참조) 마크 트웨인이 인종문제만을 주제로 [얼간이 윌슨]을 썼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록시 그리고 그녀의 아들 톰(록시가 바꿔치기 해서 백인이 되었다가 윌슨의 증명으로 다시 노예 신분이 되는 비운의 사나이)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종 아이러니의 핵심은 ‘돈과 체면’이다. 현재도 천민 자본주의가 ‘생각의 정전停電’을 불러오고 덕분에 (창비 출판사가 쓴대로) 문학은 날로 날로 변방으로 밀려가는 중이다. 행복하게 혹은 의미 있게 살고 싶다고 입을 모으면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 아이러니의 탄생은 아마 마크 트웨인이 [얼간이 윌슨]을 집필하던 그때부터 시작되었나보다. 마크 트웨인이 [얼간이 윌슨]에 그린 도슨스랜딩을 비롯한 미국의 도시들은 품위, 명예, 재산 등으로부터 비롯된 블랙코미디의 주인공들이 사는 세상이다.
문학은 사료로서 읽힐 수 없다. 문학은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은 때로 역사 기록보다 치밀하고 본질적으로 시대를 기록한다.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켜 생각과 동감의 확장이라는 수확을 거두는 게 문학의 기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학은 지나간 시대를 생생히 고발하는 목소리로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짧게는 수십 년 전에 발표된 소설들을 찾아 읽는다. 사료가 채 담지 못한 그때의 공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타임머신은 소설의 다른 이름이다.
초중반부는 막장극, 중후반부는 추리극으로 이야기의 가지를 뻗어나간 [얼간이 윌슨]은 어떻게 보면 참 시시한 작품이다. 중간 중간, 이야기의 맥이 끊어진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최첨단 과학 수사니 심리 수사니 하는 추리물, 수사물이 드라마와 영화로 난무하는 우리 시대에 지문으로 범인을 증명하는 윌슨의 변호는 퍽 유치하게도 보인다. 도슨스랜딩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따라서 읽어나가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인물들의 특징과 선택을 따라 읽어나가면 무대 극본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 뭐 하나라도 괜찮게 볼만한 그런 인물은 하나도 없고 다들 저마다의 약점과 악점을 적당히 감추거나 드러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있는데 이걸 패러디해서 도슨스랜딩을 표현하자면 ‘약한 놈, 나쁜 놈, 비열한 놈’이라고 하고 싶다.
“그런데 이 사람은 우리가 이십년 이상을 얼간이라고 불러온 사람이야. 그는 이제 그 지위를 사직했네, 친구들.” 우리가 선출되지 않았나.”
[얼간이 윌슨]은 참 희한한 소설이다. 아, 풍자의 대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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