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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무한 경쟁의 시대다. 입시와 취업은 물론이고, 자기계발과 인간관계, 심지어 휴식마저도 효율과 성과의 언어로 평가받는다. 조금만 뒤처져도 탈락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더 나아지기보다 먼저 버티는 법을 익히게 된다. 질문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살아남기 위한 태도만이 몸에 남는다. 이처럼 생존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김홍중의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 사회에서 생존은 어떤 의미를 가져왔는가’ (20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생존) 김홍중은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에서 이러한 감각을 개인의 불안이나 태도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 근대를 하나의 ‘성취의 역사’로 읽는 대신, 끊임없이 살아남아야 했던 시간의 연속으로 재구성한다. 전쟁과 냉전, 급격한 산업화와 외환위기를 거치며 한국 사회는 언제나 선택의 여지보다는 생존의 압박 속에 놓여 있었고, 그 경험은 하나의 사회적 태도로 축적되었다. 김홍중이 말하는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란, 바로 이처럼 생존이 일상이 된 근대의 얼굴을 가리킨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책의 1·2장에서 영화와 문학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저자는 박완서의 <나목>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경유하며, 20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생존이 어떤 성격을 띠었는지를 탐구한다. 여기서 생존은 능동적으로 쟁취되는 상태라기보다, 파국 속에서도 감수되듯 지속되는 삶에 가깝다. 다시 말해, 소멸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삶은 끝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해당 대목을 읽으며, 한국 사회 속에서의 ‘파국’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20세기 한국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은 분명 엄청난 성취를 낳았지만, 그 이면에는 필연적으로 상처와 상실이 함께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국 속에서 죽음만이 아니라, 끝내 견뎌내고 쟁취해낸 삶 역시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 사회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파국을 단순한 붕괴의 순간이 아니라, 삶이 끝까지 남아 있던 자리로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꿈으로서의 근대) 보통 꿈이라고 하면 추상적이고 막연한 존재를 떠올리기 쉽다. ‘몽상’이라는 표현이 내포하듯, 꿈은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꿈이란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한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고 믿어왔다. 꿈 그 자체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여겼고, 꿈은 행동을 장식하는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홍중은 이 책에서 꿈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한다. 그는 꿈을 수동적인 희망이나 추상적인 상상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지닌 능동적 개념으로 바라보며 ‘꿈으로서의 근대’를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는 합리와 이성만으로 성립한 시대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집단적 몽상이 현실을 밀어붙이며 형성된 시간이었다. 해당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책은 발터 벤야민의 사유를 예시로 든다. 벤야민은 근대를 하나의 꿈으로 보았는데, 유럽에서 근대 문명이 도래할 수 있었던 배경 역시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 즉 꿈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몽상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의 행위와 선택을 이끌며, 사회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동한다. 3장이 특히 인상 깊었던 이유는, 꿈에 강력한 행위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역사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세대의 의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우리는 꿈이란 단지 개인의 희망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갔는지를 드러내는 집단적 동력이 됨을 깨닫게 된다. 책에서 언급되듯, 19세기 유럽인들이 꿈꾸었던 진보의 이상은 20세기 초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라는 파국적 사건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냈다. 이처럼 역사 속 파국은 단절의 순간인 동시에, 이전 세대가 품었던 꿈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는지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파국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그 이전에 존재했던 꿈의 형상을 거슬러 살펴보는 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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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이음출판사 서포터즈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살아남았다.", 생존이 삶의 가장 큰 목적이 된 세상은 마치 평화로운 일상과 동떨어진 세계를 그릴 수밖에 만든다. 『눈물을 마시는 새』(이영도)의 제사에서 나오듯이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우리는 쓸쓸하고 황량한 세계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혹은 피와 살점이 낭자하는 폭력의 전쟁터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지금 설명하는 이야기는 전술한 두 가지 사례가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있음에 생존이라는 단어가 지배하고 있다.『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의 저자 김홍중 교수는 20~21세기 근대 한국인은 "생존주의자"라며 한국을 비평·분석한다. 나는 이렇게 본다. 한국 근대의 고유한 사상 형태는 하이데거적 '존재'론도 아니고 사르트르적 ‘실존’주의도 아니다. 한국 근대의 간판 사상은 '생존'의 사상이다. 한국인들의 뇌리를 떠난 적 없는 강력한 질문, 영원히 회귀하면서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을, 죽음의 방식을, 존재와 체험의 틀을 만들어간 그 서글프고, 야비하고, 모질고, 집요하고, 잔인한 질문. 살아남는다는 것, 생존한다는 것. - 8p 저자는 한국의 근대성이 서구의 근대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기원을 갖는다고 진단한다. 서구의 근대가 계몽과 이성에 기반한 ‘진보의 꿈’을 꾸었다면, 한국의 근대는 식민지배와 전쟁이라는 거대한 파국을 겪어내며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의 꿈’으로 형성되었다. 유럽의 근대는 진보의 꿈, 발전의 꿈, 문명화의 꿈으로 특징지어지는 반면에 한국 근대의 지배적 꿈은 유럽 근대가 폭력적으로 부과한 파국적 생존위기를 벗어나는 것, 한마디로 말해서 생존의 꿈이었다. -66p구한말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한 국권 상실의 위기, 전 국토를 초토화한 한국전쟁, 그리고 IMF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체험. 20세기 한국인에게 삶은 고상한 실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사느냐 죽느냐, 이 이분법적 공포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기에 근대 한국인들은 세상을 약육강식의 정글로 파악하고 힘을 길러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그런 독특한 마음의 습관, 즉 ‘생존주의’는 한국인의 내면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처럼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깊숙이 박힌 생존주의의 징후는 한국의 문화 예술 작품 곳곳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이러한 생존주의의 모습을 포착하여 비평한다. 이러한 생존주의자의 면모는 비단 평범한 소시민만의 것이 아니었다. 한국 근대를 이끈 주요 인물들 또한 이 거대한 생존의 욕망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비상상황에서 힘을 길러 안보와 성장을 도모한 생존주의적 통치성의 설계자였다. 한편, 정주영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무한한 발전을 현실화한 생존주의적 자본가의 화신이었다. 생존주의의 관점하에, 저자가 포착한 한국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바로 '생존주의의 역설'이다. 20세기 동안, 한국인들은 전쟁과 가난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국가와 국민 모두가. 그 처절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하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정작 현재의 한국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차 위협받는 곳이 되어버렸다. 20세기의 팽배했던 파국(전쟁과 가난)의 위협들로부터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주의의 성공이 만들어낸 현(現) 사회를 수많은 한국인들은, 인간다운 생존이 지극히 어렵고 심지어는 불가능한 사회로 인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생존주의가 오히려 생존을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생존주의가 생명이 아닌 죽음을 생산하고 있다. 이것이 생존주의의 비극적 역설이다. -91p이러한 역설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각자도생의 정글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현대인은 끊임없이 스펙을 쌓고 자기를 관리하며 스스로를 ‘생존주의자’로 주체화한다. 그러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은 역설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다른 가능성들을 스스로 거세하게 만든다. 생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꿈을 유예하고,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단절하며, 오직 효율성만을 쫓는 과정에서 정작 삶의 본질적인 생명력은 고갈되어 간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내면이 피폐해지는 ‘자기 착취’의 굴레, 이것이 저자가 진단하는 현대 한국인의 초상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는 대안적 삶에 대한 꿈을 자발적으로 제한한다. 너무나 도덕적인 동시에 너무나 비윤리적인 이 삶은 생존의 극한적 추구 속에서 역설적으로 생명력의 소진을 향해 간다. - 219p 여기서 생존을 다시 한번 짚고 가자. 대체 생존이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생존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상태가 아니다. ‘-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은 '주체가 혼자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저해하거나 방해하는 어떤 대상을 뚫고 나가는 것, 그렇게 생존함'(23p)을 시사한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혹은 전쟁의 생환자들이 증언하듯, 극한의 비상상황에서 나의 생존은 종종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타자의 희생으로부터 나의 지금은 내게 주어질 수 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 죽어야 했다면, 나의 ‘존재’는 그의 ‘소멸’과 교환된 것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살아남았음’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다. 우리는 부끄러움에 휩싸여 자신의 생명을, 실존을, 존재를, 생존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 27p그렇다면 이토록 처절하고 비윤리적인 생존 경쟁의 끝에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저자는 지난 세기를 지배했던, '코나투스(Conatus)’의 논리를 멈춰 세운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힘을 키우고 영역을 확장하여 살아남으려 하는 무한한 성장과 자기 확장을 추구했다. 이러한 코나투스의 시대는 끝났다. 인류세라는 전 지구적 위기를 목도했음에도 인류가 여전히 자신의 힘(코나투스)을 계속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바로 생존의 실패, 공멸뿐이다. 여기서 저자가 제시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생존 원리는 역설적이게도 힘을 빼고 자기를 비우는 '케노시스(Kenosis)', 즉 ‘자기-비움’이다. 생존하기 위해서 존재의 축소를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존재의 강화(코나투스)가 생존을 불가능하게 하며 오히려 존재의 삭감(케노시스)이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 337p케노시스란 본래 기독교 신학에서 신이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신성(神性)을 비워낸 '자기-비움' 혹은 창조를 위해 신이 스스로를 침줌(Zimzum, 축소)한 사건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신학적 개념을 인류세의 생존 윤리로 과감하게 확장한다. 기후 위기와 공멸의 위기 앞에 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반대의 방향, 즉 스스로의 힘을 빼고 존재를 삭감하는 방향이다. 인간의 케노시스, 인간성의 케노시스를 향해. 가이아와 마주하며. 인간 문명이 스스로를 비우고, 스스로를 제한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스스로를 감축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이 신성을 비우고 십자가를 졌다면, 인류세의 인간은 인간성을 비우고 가이아로 내려가야 한다. 인간의 케노시스, 인간성의 케노시스다. -345p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는 "우리는 생존주의자이다"라고 말한다. 이 생존주의에 대한 화두로 시작하여 20세기를 분석한다. 그리고 21세기 한국 모습과 인류세에 대하여 어떻게 생존주의를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지 제안한다. 오늘날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고 힘을 빼는 것. 생존을 위해 타자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워 타자와 연결되는 것. "살아야 한다"라는 문장은 우리 주변을 여전히 떠돌고 있다. 우리는 이를 인식하고 새롭게 바꿔야 한다. 이러한 사유를 담아낸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몹시 훌륭했다. 저자는 들뢰즈의 언어를 사용하여 한국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물들을 심도 있게 비평한다. 각 장의 내용들은 독립적인 완결성을 지니면서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때로는 비선형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거대한 흐름을 형성한다. 서평을 쓰기 위해 거시적인 흐름 위주로 짚어보았으나, 사실 이 책이 보여주는 비평의 세세한 결들은 읽을수록 감탄할 만한 통찰로 가득하다. 일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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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특유의 성장 지향적인 분위기를 싫어했다. 빠르게 위를 향해 올라가는 대열에서 벗어나 그들을 바라보니, 그저 돈 버는 데에 급급하고 인간성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악착같음이 추해 보이기만 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도 그러한 나의 한국 사회를 향한 부정적인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같은 걸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나의 사고 방식이 굉장히 오만했음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그저 보이는 것을 비판하기에 급급했지, 비판 대상이 그러한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당장 오늘, 바로 지금을 살아가기에 급급한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세상이 정글처럼 보이고,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게 위협처럼 느껴질 것이다. 믿을 수 있는 건 노력으로 쌓은 나의 역량 뿐일 것이다. 경멸하는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 비단 사회학 연구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하물며 경멸하는 대상이 자신이 속하고 있는 집단이라면 말이다. 한국인들의, 한국 사회의 이유 있는 악착같음을 싫어했던 사람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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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이 질문을 붙잡고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를 읽는 동안, 내내 한국 사회는 무엇을 욕망해왔는가라는 물음이 뒤따라왔다. 책이 제시하는 대답은 비교적 분명하다. 김흥중이 말하는 생존주의는 한국 근대를 밀어붙인 가장 강하고도 확실한 동력이었다. 그것은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이상이나, 어떤 고결한 가치의 선택이라기보다, 오늘 하루를 버텨내려는 깊고도 자연스러운 욕구에 가깝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개인의 사유와 감각을 사로잡고, 그 강박이 사회의 집단 심리로 굳어져 역사의 방향까지 바꿔놓는다는 통찰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 내가 살아온 한국의 풍경 자체가 그 문장을 증명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생존은 단지 생물학적 의미의 생존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압박이고,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태도이며, 무엇보다도 “살아남는 방식”을 둘러싼 규율이다. 한국 사회에서 생존은 종종 미덕으로 포장된다. 버티는 사람, 참는 사람, 효율적으로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는 사람. 하지만 그 미덕이 강조될수록, 다른 방식의 삶은 조용히 비정상으로 밀려난다. 생존주의는 이처럼 한 사회가 무엇을 정상으로 설정하고 무엇을 탈락으로 규정하는지까지 설명하는 개념처럼 느껴졌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민주화 운동조차 단지 정치적 이상의 언어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물론 그 이상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아래에는 생존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 안전의 문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문제가 늘 함께 있었다. 자유나 권리라는 말은 공중에 떠 있는 구호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실제로 흔들리는 기반을 붙잡기 위한 언어이기도 했다. 그래서 생존주의는 어떤 특정 계층이나 시기의 병리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 한국이 선택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길 위에 생존이라는 단어가 깔려 있었고, 그 단어는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현실적인 언어이자 가장 강력한 동원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생존이 너무 오랫동안 견딤의 형식으로만 이해되어 왔다는 데 있다. 살아남는다는 말이 곧 견뎌낸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굳어졌고, 그 결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 쉽게 개인의 실패로 처리되어 왔다. 책이 날카롭게 짚는 또 하나의 지점은, 한국 근대의 성장이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의 심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성장의 서사는 늘 낙관적 역사관을 전제한다. 인간은 계속 발전하고, 사회는 더 효율적이고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은 개인을 앞으로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재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더 나아져야 하고, 더 올라가야 하고, 더 확보해야 한다는 요청은 어느 순간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삶의 형식을 지배한다. 그런데 실제의 인간은 그렇게 직선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존재는 필연적으로 실수하고, 반복하고, 때로는 퇴보한다. 삶에는 계획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이 있고, 노력과 무관하게 무너지는 순간도 있다. 한국 사회가 고속 성장의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성취한 것들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인간소외가 부작용 수준이 아니라 구조적 한계로 굳어졌다는 감각은 이제 많은 사람에게 공통의 체감이 되었다. 무엇을 얻었는지 말하는 건 쉽지만, 무엇을 잃었는지 말하는 순간 분위기가 바뀐다. 경쟁 속에서 관계는 도구화되기 쉽고, 성과가 삶의 가치를 대신할 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도 멀어진다. 성장의 언어는 그 잃어버림을 자꾸만 뒤로 미뤄왔다. 지금만 견디면, 이번만 버티면, 다음 단계에 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다음 단계는 늘 또 다른 다음 단계를 부르고, 그 과정에서 소외된 것들은 너무 많아졌다. 마음의 건강, 느리게 살아갈 권리, 실패를 회복하는 시간, 돌봄의 가치, ‘쓸모 없음’의 여지 같은 것들이 계속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래서 이제 필요한 건 더 버티자가 아니라 어떤 생존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재정의다. 특정 사회 시스템, 성장과 경쟁과 효율에 과도한 가중치를 둔 채 달려온 결과, 삶의 다양한 층위가 평가절하되었다. 돌봄, 관계, 취약함, 실패, 쉼 같은 것들은 늘 나중에로 밀렸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그 나중에를 현재로 끌어와야 한다. 생존을 단지 개인의 인내나 근성으로 떠넘기지 않고,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조건으로 다시 사유할 때, 생존은 더 이상 강박만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와 제도의 방향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생존을 “탈락하지 않기”가 아니라 “회복할 수 있기”로 바꾸는 일, 경쟁에서의 안전이 아니라 실패 이후의 안전망을 더 중심에 두는 일, 성장의 속도보다 삶의 지속 가능성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일이 그 시작일 수 있다. 결국 이 책이 내게 남긴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으려 하는가. 한국 근대가 생존주의의 엔진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미래의 한국 사회는 그 엔진을 더 큰 속도로 돌리는 대신, 다른 방식의 생존을 상상해야 한다. 생존을 견뎌냄에서 살아냄으로 바꾸는 일. 나는 그 전환이 거창한 선언 하나로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규범들, 버티는 것이 미덕이라는 믿음, 경쟁이 곧 공정이라는 착각, 효율이 인간성을 대체할 수 있다는 환상을 하나씩 의심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심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이 덜 불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상상하고 요구하는 순간, 생존은 강박에서 가능성으로 바뀔 수 있다. 그 전환이야말로, 역사에 대한 통찰이 오늘의 삶으로 번역되는 방식일 것이다. |
| 생존이라는 특정 키워드로 한국사회에서의 생존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책입니다. 한국의 역사, 한국의 예술작품에 기대어 생존주의의 의미, 나아가 한국에서의 새존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생존주의에 대해 다소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생존주의를 모더니즘으로 한 한국의 사회가 현재에 있어 어떤식으로 작용되고 있는지, 앞으로 한국 사회의 생존주의의 모습이 어떻게 성장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그 문제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잘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민중이 아닌 살아남게된 한국 사회의 민중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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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한국적 생존주의를 풀어내어 비전공자인 저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통해 생존의 이유와 경쟁의 본질을 자문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경쟁에 지친 분들이 읽어보시면 더 와닿을 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생존주의는 사회적 가치를 억압하는 면도 있지만 오히려 성장의 추진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생존주의만의 특이성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한국의 생존주의가 어떻게 작용하고 변화할지에 대한 물음을 남긴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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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교수의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는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한국 사회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책에서 말하는 '생존주의'는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본능을 넘어, 한국 사회가 겪어온 역사와 기억이 만들어 낸 하나의 결합, (어셈블리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서바이벌'이라는 제목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책이 말하는 생존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저자는 사회가 정해준 역할에 갇히지 않고, 외부의 압박 속에서도 나를 지켜내는 것을 '생존'이라고 봅니다. 이는 남이 정해준 목표가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는 주체적인 노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철학적인 개념이나 여러 작품 이야기가 나오는 초반부는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함께 책을 읽은 독서모임에서도 처음에는 다소 막막하고 배경지식이 필요하다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분명 초반부에 주장이 담긴 평론성의 글은 순서상 앞쪽보다는 후반부가 적합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업이나 이직처럼 삶의 중요한 변화를 앞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한국 사회의 독특한 모습을 '생존주의'라는 말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