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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책은 말했듯이 ‘신천 학살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 많은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신천 학살사건’.. 북한은 미국의 학살이라 설명하고 있지만, 과연 그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책을 손에서 뗀 뒤, 가장 먼저 찾아 본 것은 ‘신천 학살사건’에 대한 내용 이었다. 이 사건은 무려 35,000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최근에도 유골이 발굴될 정도로 정확한 피해가 예상되지 않는 상황이다. 대략적으로 이 사건의 개요를 들어보자. 수 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 신천 학살사건은 해방직후 진행된 토지개혁으로부터 시작한다. ‘무상 몰수, 무상 분배’방식으로 진행된 토지개혁은 많은 땅을 소유한 지주계층에게 강한 반발을 받게 됐다. 크게는 마르크스주의자와 기독교세력간의 대립이 됐으며, 서로간의 대치가 테러를 동반할 정도로 수위가 높아져 갔다. 교회는 문을 닫고 기독교인들은 지하실이나 산속으로 들어가 은신하며 삶을 이어갔는데, 이 후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봉기를 들게 된다. 공산당의 관서를 접수하고 무기고를 빼앗아 무장을 하며 공산당 가족들을 잡아 살해하거나 가둬놓고 불을 붙여 태워 죽이는 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공산당원에게 땅을 빼앗기고 억압된 삶에 대한 복수였지만, 한 마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들이 보여준 행동으론 너무나 잔인하고 몰인정 했다. 소설엔 당시 기독교세력에 합세하고, 많은 사람을 학살한 요한이 등장한다. 요한의 눈앞엔 당시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한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귀신 같은 존재가 되어 등장하게 된다. 동생 요섭은 형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빌라 말하지만(하나님께) 요한은 그 시절은 다 그랬다며 당시의 행동을 잘못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다 요한에게 찾아 온 불시의 죽음, 장례식을 마치고 북한을 방문하게 된 요섭의 손엔 형의 뼛 조각 하나가 들려있었다. 요한의 눈앞에 나타났던 마을 사람들은 요한까지 더해져 요섭의 눈앞에도 등장하게된다. 이들은 사건의 중심이었던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귀신들이며 잔인하게 죽어간 신천 학살사건의 피해자들이다. 당시 해방 이후 개화의 물결로 받아들여진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서로의 합일점을 찾을 수 없었다. 신은 인간 염원의 투사에 불과하다는 종교관을 이어받은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와 함께 공존할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교육의 끈이 짧았던 양민들이 주축인 공산당은 이념보단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희망과 친일파에 대한 적개심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들이 요한의 눈앞에 수시로 나타나 예전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던 것은, 매듭짓지 않고 떠나간 요한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된다.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쓰여졌다는 <<손님>>은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세기를 시작하자는 것에 작가 황석영의 본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회계하지 못했던 요한, 죽은 자들의 넋과 산 자들을 위해 한판 굿을 하듯, 이들은 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끝내는 화해와 용서에 도달하게 된다. 개화의 열풍에 따라온 손님인 기독교와 마르크스 주의. 천연두가 무서운 손님이었던 것처럼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한 두 이념이 빚어낸 쓰라린 상처는 지금도 이산가족 방북 신청도 하지 않을 정도로 피해 의식이 극명했다고 한다. 앞으로 신천에 남아 살고 있는 이들과의 화해는 가능한 것일까? 요한은 죽음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의 손을 잡게 됐고, 요한의 아들 단열은 아버지의 뼈를 보고, 요섭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족을 버리고 고향을 떠난 아버지를 용서했는데, 아직도 풀리지 않은 매듭을 가진 신천의 또 다른 사람들과 많은 넋들 에게는 어떻게 화해의 손길을 던져야 할까. 홀아비 죽어 하무자귀야 총각 죽어 몽달귀야 너두 먹구 물러가라 무당 죽어 걸립귀야 소경 죽어 신선귀야 너두 먹구 나가서라 과부 죽어 탄식귀야 처녀 죽어 호구귀야 너두 먹구 가게서라 산에 올라서 낙락장송 늘어진 가지 목맨 귀신 물루 내려서 만경창파 둥실 빠진 물귀신 낳구 가구 배구 가구 밥사발을 손에 들구 허튼 머리를 빗어 꿰구 청치마 옆에 끼구 거적자리를 옆에 들구 .. 왼갖 잡색 객사귀 원귀야 오늘 많이 먹구 걸게 먹구 모두 먹구 나가서라 오늘 다 이 터전에 터주루 있던 귀신 집주루 있던 귀신 많이 먹구 이러니 말이 없구 저러니 탈이 없어 오늘은 고픈 배 불리구 마른 목 적셔 가구 진 거는 먹구 가구 마른 거는 싸가지구 질빵 걸어 메구 가구 여귀는 똬리 바쳐 이구 가구 동자귀는 오질 앞에 싸가지구 인정 받구 노자 받구 좋은 데루 천도를 허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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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창작과비평사/2003.7.31. sanbaram
<손님>은 작가의 1989년 방북경험을 바탕으로 그곳에서 살았던 목사의 증언을 토대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 내용은 재미교포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 방문의 일정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12주제로 구성 된 것은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씌여졌다고 한다. 교회 목사인 요셉이 미국에서 고향방문단 신청을 하고 장로인 형을 찾아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형이 죽고, 형의 고향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부터 형의 헛것과 대화를 하게 된다. 고향 신천을 방문하는 요셉의 회상과 형과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따라서 말투 또한 황해도 사투리로 진행되기에 읽기가 수월하지는 않다. 이야기의 전개는 주인공인 요셉을 비롯해서 등장인물들의 시점으로 기술하는 것이 일반 소설과 다른 점이다. 이 소설의 제목인 ‘손님’은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상징한다고 한다. 저자 황석영은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화 했다.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장길산>, <무기의 그늘> 등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들을 발표하였다. 그 외 여러 권의 중단편전집을 내었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황해도 신천이 고향인 류요셉 목사가 고향방문단 신청을 하고 형을 찾아 갔다. 형과 옛날이야기를 잠깐 하고 돌아온 뒤, 방문단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 형의 부음을 들은 요셉은 장례를 치르고 형의 유품을 받았다. 화장할 때 도장만한 형의 뼈도 하나 챙겼다. 고향방문단의 일행으로 비행기를 탔다. 요한형의 영혼이 보였다. 고향 찬샘골에 같이 가고 싶어서라고 한다. 엘에이에 도착해 형의 수첩에 이름이 있었던 박명선 할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요한 형이 그 집 사라들을 전부 죽였다고 했다. “내가 왜 용서를 빌어? 우린 십자군이댔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새끼들이야. 사탄의 무리들이다. 나는 미가엘 천사와 한편이구 놈들은 계시록의 짐승들이다. 지금이라두 우리 주께서 명하시면 나는 마귀들과 싸운다.” “형님, 성령의 싸움과 인간들끼리 세상에서의 싸움은 다른 겁니다.” “허튼소리 말라. 그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서.” (p.22)
황해도 지방의 개신교 선교역사와 요셉의 집안 할아버지부터 개신교를 믿게 된 사연을 형의 영혼과 함께 듣게 된다. 평양에 도착해 시내구경과 밤에 교예극장에 갔다가 속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나와 대동강변에서 옛날 순남이 아저씨 이야길 들었다. 처음엔 고향에 친척이 없다고 하다가 결국 요셉은 가족의 인적사항을 넘겼다. 이튿날 점심 때 형의 아들인 조카가 왔다고 하여 만났다. 그리고 가족들의 상황을 물었다. 다음날 고향방문을 하게 되었다. “신천이 강점된 다음날인 시월 십팔일에 미제 살인귀들은 미리 계획한 대로 이전 신천군당 방공호에 삼백여명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구백여명의 인민들을 가두어넣은 다음 휴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는 집단적인 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여기 관람이 끝나면 인차 그 장소에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p.102)
신천읍에 도착해서 박물관을 견학했는데, 그곳에선 그들이 조작한 6.25때 미군이 민간인 집단학살을 한 것을 전시해 놓고 설명하였고, 그 현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었다. 행사가 끝나고 조카 류단열이 와서 초대소에 도착했다. 초대소에서 조카와 함께 목욕을 하고 잠을 잤다.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깨어보니 불이 켜지지 않았고, 형과 순남이 아저씨 귀신이 나타났다. 형이 우파인 교인들 편에서 저승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다며 옛날 해방과 그 후의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순남이 아저씨는 좌파 노동자 편에서 보고 듣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형은 토지개혁으로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과 아버지를 이찌로인 박일랑이 잡아가고 과수원 일꾼 순남아저씨가 위원장이 되어 했던 일을 이야기 했다. 동무들 봉건이 뭐이오? 왕이 저를 지켜줄 한줌도 안 되는 신하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또 그 아래 벼슬아치들과 양반을 시켜서 백성들에게 소작하도록 하는 제도요. 왕이 일본에서 손들고 식민지가 되자 천황과 총독이 왕 자리가 되고 양반은 친일파가 되어서 옛날보다 더 못해졌소. 땅 벗고 배운 것도 없는 동무들은 고향에서 고용살이와 빈농으로 대대로 일을 제일 많이 하면서도 아무것도 받지 못했소. 동무들이 동네에 돌아가게 되면 이제부터 자기 몫을 되찾아야 합니다. 땅은 어디까지나 농사를 짓는 이들의 것이 되어야 하오. (p.139)
이튿날 형수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선물을 샀다. 형수님과 조카네 식구를 만나 간단한 잔치를 하고 형수와 이야길 나누었다. 요한 형이 열 명도 넘는 마을 사람을 죽이고 남쪽으로 가는 바람에 남은 식구들이 10여 년간 많은 고생을 했다는 말을 했다. 형수에게 형의 뼈조각을 보여주고 고향 땅에 묻으려 한다고 했다. 형수와 이야길 하고 잠을 자는데 비 오는 밤에 형의 헛것이 다시 찾아왔다. 이튿날 아침, 형수는 제사상을 차리고 식구들에게 절을 하게 했다. 그리고 조카 단열을 낳을 때 썼던 형의 속곳을 주면서 함께 태워 묻어달라고 하는데……. 나넌 평생에 누굴 미워해본 적이 없대서. 기래두 입성 얻어입구 좋언 날 되문 고봉 밥얼 얻어먹구 군입 소리 듣디 않을라구 땅을 파대구 또 파댔넌데. 그러티만 내 눈앞에서 식구덜 죽넌 거를 보구야 알았다. 제 속이 깨이디 않으믄 숲속으 짐승이나 한가디라구. 나넌 그냥 멀거니 공기구멍 사이루 조금씩 뵈넌 파란 가을 하널얼 올레다보았디. 한데 무슨 물기가 줄줄 쏟아제. 또 누구레 맘성 깊언 이가 지나다가 물을 부어주넌 줄 알구 사람덜이 머리럴 헤싸집으멘 들이대넌데 입을 벌리구 받아먹은 치가 소릴 질렀디. “이거이 까소린이다!” (p.224)
해방되고 있었던 일을 외삼촌의 회상을 통해서 해방과 전쟁 속에서 주민들의 좌우익의 갈등과 집단학살 등을 알게 된다. 그리고 찬샘골의 산기슭에 요한 형이 단열을 받아냈다는 속옷을 태우고 형의 뼈조각을 땅을 파서 묻었다. 요한이 아우에게 말했다. 이제야 고향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두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간다. 잘들 있으라.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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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고 책을 읽으려고 북커버에 책을 끼우고 포스트잇을 준비한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남거나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이 나오면 포스트잇을 붙인다. 다 읽으면 북커버를 벗기고 책의 앞과 뒤를 다시 보고 포스트잇을 붙인 곳을 다시 훑어보면서 내용을 다시 되새긴다. 떼면서 정리를 하고 책은 책장에 꽂힌다. 이게 내가 책 읽는 과정이다. 간혹 북커버에 그냥 넣어둔 채 다른 책을 읽는 경우도 있다. 리뷰가 쓰기 싫거나 쓰기 힘들 때 그러는데 이 책이 그랬다. 까만 표지에 그림자처럼 어둠 속의 나무들이 보인다. 마치 입체적인 느낌으로.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마당을 기본 얼개로 한 ‘손님’은 반가운 손님이 아닌 천연두를 일컫듯 (마마, 손님)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작가의 말) 1989년 방북시기에 방문했던 황해도 신천과 그곳에 있는 ‘미제 학살기념 박물관’ 그리고 그가 만난 류목사에게서 들은 한국정쟁 당시의 황해도 사정을 듣고 자료를 모았는데 투옥되고 손님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제목은 참 반가운데 내용은 조금 불편하다. 브루클린의 한 허술한 아파트에 사는 부유하거나 친일했던 사람들은 모두 남쪽으로 달아나지만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남고 공산당과의 갈등이 시작되는데, 기독교측은 성전을 위한 싸움과 순교라고 생각하고, 공산당측은 인민을 위한 계급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를 둔 소설이겠지만 읽는 내내 다른 사건들이 더 많이 생각났다. 그들만 아는 진실들.. 그들 모두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작가의 방북체험으로 그곳의 호텔과 시골의 모습이 힘들지 않게 눈에 그려진다. 그들 스스로의 진지노귀굿 그리고 떠나야 할 사람들. 등장인물들의 말이 누가 했다라는 언급 없이 이어져서 분위기상 누구의 말이구나 짐작하면서 읽고, 북한 사투리가 많이 나와서 어떤 대사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모음이 많이 다르고 낯선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으원 아이덜 그렁허다 데켄 (저쪽)) 힘들고 가슴 아프게 읽었지만 그 시대의 한 부분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요즘 유행어로 '불편한 진실'들이 많이 나온다. 이 책을 받은 사연: 작년도 아니고 재작년 2010년 창비 이벤트로 받은 책이다. (2010년 8월 [강남몽] 리뷰대회 수상자 및 스크랩 이벤트 당첨자 발표) 난 스크랩 이벤트로 손님을 받게 되었는데 그게 참 안 오는 거다. 그것도 한 달 반 만에 아주 힘들게 받았다. 그렇게 힘들게 받아서인가 모셔두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까이 있으면 어떻게든 봤을 텐데 책상 위 책장이 아닌 다른 책장에 꽂아두니 안 보면 멀어진다고 그렇게 내게서 멀어져 갔다. 그러다 책장을 정리하다 만났다. 한국작가의 책이 아니었으면 절대 안 봤을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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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북한 사회는 3대 세습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곳이다. 남한의 관점으로 보면 참으로 황당한 공간이다. 자유 민주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인 것이다. 나는 그 곳을 왕조라 생각을 한다. 그곳은 조선 왕조가 이어져 내려오다가 일제시대로 나라가 일본의 통치 속에 들어가 버렸고, 그것을 김일성이란 사람에 의해 회복되면서 그가 그곳의 지도자 즉 왕으로 된 것이다. 민중들의 의식 속에는 정치 세력에 대한 거부 반응이 거의 없다. 일부 지각 있는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당연하게 세습을 수용하고 인정을 한다. 그것은 왕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북한 사회가 3대 세습이란 희한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할 수가 있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 시회가 그렇게 왕조로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우리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북한 사회가 통제되어 있고, 남한에서는 관련자 외에 그것을 아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방 후에 어떻게 권력이 움직이고, 민중들은 어떻게 그 일에 대처했으며, 어떠한 일들이 그곳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은 잘 모른다. 어떻게 6.25까지 그들이 살았으며, 깨어 있었던 자들은 그 사회에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분단 후에 직접 그곳에 가보고, 그곳의 이야기를 들은 작가에 의해서 그곳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이 ‘삼포 가는 길’의 작가 황석영씨의 ‘손님’이다. 황석영씨의 ‘손님’은 북한 사회에서 해방 직후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글이다. 우리는 해방 직후 남한 사회만을 이야깃거리로 삼아왔다. 그리고 6.25 동란을 기점으로 해서 이루어진 남쪽 사회의 좌우익 대립과 분단의 비극적인 상황들을 많이 알고 있다. 같은 마을에서 서로 정을 나누었던 사람들끼리 죽창을 겨누고, 생명을 빼앗고 했던 일들이 북쪽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많이 자행되었고, 그것에 대한 보복적인 행위들이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다. 나라가, 민족이 양분되어 죽음과 고통의 현장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적의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싸움에 의해서 상해를 입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런 힘이 없고, 저항 능력이 없는 서민들이 거대 세력에 의해 당했던 역사는 참람함을 보여 주는 일이다. 남한의 거창 신원사건들이 그러한 것 중의 하나다. 북한 쪽에서도 이런 일이 자행 되었던 듯하다. 이 글은 북한에서 해방 전후 어린 시절을 보내고 탈출한 한 사람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미국에서 살면서 목사가 되어 있는 주인공 요셉이라는 사람이다. 그의 형은 요한인데, 장로다. 이야기는 요셉 목사가 형 요한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형인 요한은 북쪽 고향에서 탈출할 때 많은 생명을 앗는 일이 벌어지고. 그것이 다시는 고향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다. 고향에서 그를 원수보다도 더한 악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은 북한 방문단에 끼어 북한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런 가운데 형 요한이 미국에서 죽게 되고, 형의 유골 한 조각을 챙긴 요한은 그것을 가지고 북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고향에 묻으면서 죽은 자들의 화해를 시도할 목적으로 그렇게 한다. 형이 북쪽에서 탈출하기 전에 죽인 자들의 이야기는 요셉이 북쪽에서 가족들을 만나는 상황에서 망자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형의 망자(귀신)는 요셉을 따라 북으로 같이 간다. 그러면서 수시로 요셉의 앞에 나타난다. 형의 북쪽의 가족들은 죽었다는 전제 하에 요셉이 북쪽으로 가더라도 만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북쪽의 사람들의 선전 목적에 의해 가족 관계 파악이 이루어지고 형수와 다니엘(단열)로 이름 지어진 조카 가족을 만나게 된다. 형수에게 형의 유골을 보여 주고 조카에게 형의 입장을 얘기한다. 그런데 조카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아버지가 그들을 버리고 떠났고, 그곳에서 그렇게 문제를 일으켜 그 가족이 눈총을 받고 살 지 않을 수 없었음을 되새긴다. 죽음은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것으로 그려진다. 죽은 자와 죽인 자들의 환영이 요셉에게 같이 나타나면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아간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해방 직후의 상황을 풀어낸다. 이야기는 다양한 시각으로 이루어진다. 요셉의 시각으로, 요한의 시각으로, 외삼촌의 시각으로, 단열의 시각으로 다양하게 왔다갔다 한다. 이야기를 잘 쫓아가지 않으면 그곳에서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또 망자들이 나타나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서로의 문제를 매듭짓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 위해 이렇게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문제의 핵심에 가깝게 찾아들어 간다. 문제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일어난 상황이다. 공산주의에 반발하는 행동이 기독교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공산당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그들은 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은닉하게 되고, 더러는 구월산으로 들어가 집단의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은 산이나 집 등에 피해 살아가면서 때를 노리게 되고, 그의 가족들은 그들 때문에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유엔군의 인천 상륙 소식이 들려오고 이들은 집단적으로 봉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들이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주하게 되자 북쪽의 군대들이 도망가는 와중에 일어나 치안을 장악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젊은이 중에 형 요한도, 그리고 형의 친구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피해 있을 때에 자신과 가족들을 괴롭힌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피의 보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마을에 늘 같이 살았던 북쪽에 가담했던 사람들도 죽이게 되고, 나중에서 사적인 이익을 탐하게 되면서 서로의 이익에 위배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죽이게 된다. 북쪽에 조금이라도 동조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그 가족까지 전부 찾아내어 가두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 가운데 요한과 함께 나타나는 망자들도 10여 명이 있다. 그들은 소설 속에서 그들의 입장을 이야기해 나간다. 또 요셉이 북쪽에 갔을 때의 북쪽 상황을 통해 지금의 북쪽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북쪽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작가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모든 생활들이 너무나 통제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제시해 놓고 있다. 그 통제가 아마 북한을 지켜 나가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북쪽 방문단의 신상에 대해서 너무나 잘 파악해 있다. 밝히지 않는 것이라도 자세하게 알고 있고, 미리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해주겠다고 생각하면서 준비를 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요셉이 단열을 만날 생각이 없었는데, 그들은 만날 준비를 시켜놓고 대기하고 있다는 등 말이다. 그들은 방문단이 움직일 때 꼭 사람을 붙인다. 그리고 어디 가 있는지 늘 파악해 놓고, 가족이 상봉할 때도 동행을 한다. 좋게 말하면 보호고 나쁘게 말하면 감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 현재의 북한 사회임을 이 글을 통해서도 보여 진다. 글은 서로 죽고 죽인 망자들이 하소연하고 그 진실을 밝히면서 화해의 무대를 마련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떠난다. 산 자들은 그들을 배웅하고,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행해 그들의 운신의 폭을 넓힌다. 작가는 이곳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주인공이 목사라는 것도 그렇고, 이 세상에서 맺혀진 원한 관계는 이 땅에서는 풀기 어렵고, 다른 세상에서야 풀어낼 수 있음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화법과도 관계가 있고, 그의 의식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글을 통하여 아팠던 우리의 과거를 치유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자락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글은 북한이 권력을 어떻게 형성시켜 나갔는가? 어떻게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그들만의 세력을 이룰 수가 있게 되었는가? 그들이 타 세력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잘 읽어 볼 수가 있다. 북한 사회 그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기독교와 관련시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그는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손님을 이 둘,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이라 한다. 마음에 다가오도록 만드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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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 소설이라지만, 문학 사조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이 눈치만 있는 나로써는 유령이 왔다갔다 하는 본 작품이 다소 황당하게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그 어떤 역사 서적보다도 한반도에 들어온 두 손님-기독교와 맑시즘-의 대립이 실감나게 전해왔다.(물론 이런식의 '실감'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약간 경계하는 편이다.) 동방예의지국이라 그런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손님'대접하느라 간도 쓸개도 다 빼주고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실 '종종 있다'고 말하기도 참 뭐한 것이 우리가 지금 사고하고 있는 것들 중 우리의 것이라 내세울만한 것이 무어 있기나 한가?? 기독교와 맑시즘이라는 손님대접하느라 가족도, 옛정도 마다하고 잔인하게 싸운 우리들, 소설속의 조상들은 유령이 되어서라도 서로 화해했지만, 살아있는 우리들은, 정작 싸움의 당사자도 아니었던 우리들은 언제쯤에나 화해와 용서가 가능할런지. 언제쯤 우리들은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 손님들을 맞이 할 수 있을 것인지. |
| 미국에 있었을 때,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던 인디언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머릿결, 휑하니 빠져버린 앞니들. 인디언들은 이제 더 이상 미국을 구성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져버린,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사회 내에서 위협적인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회 내에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서 머물러 있는 것이 용인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인가 인디언 한 명이 약에 취한 듯이 텅 비어버린 눈으로 나를 흐릿하게 쳐다보며 다 빠져버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그러한 웃음을 보면서 울컥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까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인디언들이 나와, 혹은 동양인들과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흐릿한 눈동자에 내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북미 대륙을 발견했을 당시에만 해도 천만 명이 넘는 인디언들이 북미 대륙에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채 200년이 지나기도 전에 900만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러한 엄청난 유럽인들의 살육의 배경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북미 대륙에 처음으로 도착했던 청교도들은 야만인들인 인디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문명화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러한 인디언들의 선교 희망은 인디언들의 독특한 생활 환경과 사회 여건으로 무산되었고, 그러한 좌절된 희망은 인디언들의 땅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아이러니한 근거가 된다. 인디언이 하느님의 진리를 거부하였으며 그들의 선교 사명을 방해하였고, 또한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토지를 충실하게 개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북미대륙을 '소유'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류요한 목사가 이산가족 상봉추진회의 주선으로 그의 고향이 있는 북한을 '손님'의 자격으로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12장으로 나뉘어진 소설은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열두 마당과 동일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지노귀굿이 망자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일종의 '넋굿'이듯, 소설은 중심인물인 류요한 목사와 그와 연관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넋을 흘러가듯이 옮겨다닌다.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맑스주의'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남한의 '기독교'를 대비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p. 261)임을 지적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기독교가 들어온 지 30 여년 만에 전국민의 30%이상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버렸다. 인디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완전하게 북미대륙에서 씨가 말라 사라져 간 것과 비교해보면 한국 사회는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빨리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내재화하여 왔던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했듯이 '식민지인들이 문화적 헤게모니에 종속될 때, 그것은 제국에 대한 자발적 복종으로 이어지게 된다.' 더욱이 강력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 자체를 불경한 것으로 간주하게 하는 강력한 문화적 헤게모니로서 우리사회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은 미국이 효과적으로 남한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소설은 미국 내에서 살고 있는 '류요한 목사'와 '류요섭 장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재의 남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하에 있는 남한 사회가 미국이라는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목사'와 '장로'라는 기독교 성직자의 신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버린 한국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들의 이름이 기독교의 신화적인 인물들에서 따 온 것은, 서구적 담론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는 우리들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그 동안 맑스주의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비판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에 반해, 기독교는 '성스러운 종교'의 이름으로 무비판적인 복종을 강요해 왔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수많은 인물들의 의식 속을 자유롭게 넘다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맑스주의'와 '기독교'의 극단으로 나뉘어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분법적 기준으로 나누고 서로서로를 죽고 또 죽임을 당했다. 두 개의 부분적인 진실과 전체적인 모순. 그러한 모순적인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손님마마님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곰보투성이의 상처가 남겨지듯이. 그리고 그러한 상처는 더 이상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우리 모두의 비극적인 역사였을 뿐이였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렇게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다드는 의식은 사람들의 상처받은 넋을 위로하며 감싼다. 식민지 시대에서 군대와 같이 식민지에 가장 먼저 전파된 것은 '기독교'였다. 종교를 개종시키고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식민지인들의 의식 내부에 그들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심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900만 명이 넘는 인디언들을 죽여버리는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기독교는 한국전쟁 당시에, '빨갱이'라고 불리던 '루시퍼'들과의 '성전'에 뛰어들게 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선과 악'으로 대표되는 이분법적 사고가 어떠한 무서운 그리고 비극적인 역사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독교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아무런 비판적 성찰 없이 절대적인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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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나에게 반가운 단어이다. 반가움, 즐거운 만남, 기대, 설레임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책의 표지는 왜 그러 어두울까? 검은 바탕에 새빨간 글씨.
이 책은 처음부터 음산하고 우울하다. 내 기억에 이 책에서 누구도 즐겁게 웃은 것을 못 봤다. 그냥 그저 쭉 우울모드다.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끔찍한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 누가 '손님마마'의 방문을 받고 싶겠는가?
이 책의 기본 줄거리는 예전에 황해도 신천 찬샘골에 살았던 어떤 할아버지가 남북 고향방문단에 가서 자신의 고향을 둘러보는 것이다. 이 할아버지의 이름은 류요섭, 미국에 살고 목사님이시다. 북한은 고향방문단을 감시하고 자신들의 선전내용을 홍보하기도 한다. 그 중에 미군이 6.25때 수많은 일반양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이 류요섭 할아버지는 그 부분에서 땀이 비오듯 나고 매스꺼운 이유가 뭘까?
예전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하다. 1860년쯤에 중국을 통해 서양 선교사들이 왔다가 한문으로 된 성경을 건네주고 가기도 하고 일부는 같이 살기도 했단다. 이 곳이 중국과 가까운 황해도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특히 황해도 지역에 기독교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6.25때 공산당은 지주들의 재산을 압수하여 소작인에게 나눠준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억울한 죽음들이 많았을 것이다. 눈치빠른 친일파나 대지주들은 남쪽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작은 지주들은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북쪽에서 공산당에게는 지주=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순전이 이 책의 내용으로 보면).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무참하게 당했다. 그리고 다시 기독교인들의 보복이 시작되었다(북한은 나중에 미군의 짓이라고 선전한다).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으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찬샘골에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진다. 서로 죽고 죽인 대상은 품앗이하고 같이 밥먹던 동네사람들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서 류요섭이 자신의 고향을 방문했을 때에서 함부로 이 당시의 일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읽기에 좀 햇갈린다. 현재와 6.25당시 찬샘골의 상황이 번갈아 나온다. 게다가 이북 사투리들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등장하고 산자와 대화한다. 류요섭의 형인 류요한에게도 등장하고 류요한이 죽은 후에 류요섭도 죽은 자들을 보고 대화를 한다. 이 책의 분위기가 어두운데다 죽은 자들의 등장으로 더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죽은 자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말하고 맺힌 한을 풀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아닐까?
누구나 살면서 다른 이를 가슴아프게 하는 것이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의도했건 아니건 그 일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후에 평생 가슴에 묻고 혼자만 아파하는 마음 속 상처가 되기도 한다. 특히, 용서를 구할 수 없는 경우에는.
우리나라에서 토지란 무엇일까? 사람의 목숨보다 토지가 더 소중한 걸까? 공산당은 기독교인들을 지주라고 죽이고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을 사탄이라고 죽이고. 결국 그렇게 죽고 죽인다. 죽일 만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은 건 고통스런 기억뿐. 이것을 단순히 손님마마가 휩쓸고 지나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핑계로 용서가 될까? 아니면 지나고 나니 너무도 황당한 일들이라 마마가 지나갔다고 핑계를 댈 수 밖에 없던 것일까?
마음이 무겁다. 손님마마라고 하기엔 너무도 무섭다. 우리는 외세때문에 남북으로 갈렸다고 미국이나 소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들만이 손님마마일까? 손님마마는 우리 안에도 분명히 있다!
류요섭 목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덧붙였다. '구원받지 못할 영혼은 없는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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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우리나라는 아이들이 병에 걸려도, 그것을 손님이라고 불렀단다..
손님을, 나그네를 귀히 여기고 맞이하는 것은 조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의 역사가 그렇다.
그런데 어쩐일인지 기독교라는 것과, 막스주의가 손님을 왔을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원래부터 정치적으로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던 변방에서는 그 손님과 더불어서 뭔가 한 몫 해보고 싶었겠거니...
어쨌든 가족과 친척들이 서로 찢기우고,, 발가벗고 뛰어놀던 친구들이 한순간에 적이 되어버렸다..
이 책은 그때 그당시 그 손님에 의해서 목숨을 잃고 한이 맺힌 사람들, 아직도 그 손님에 씌어있는 많은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종의 굿판 작업이다.
작가는 아직도 이쪽에서는 친일파니 어쩌니 하면서 욕하고, 저쪽에서도 빨갱이니 어쩌니 하는 것이.. 분명 귀신에 씌여있다고 보는 것.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북사투리로 된 문체를 읽느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긴 분량의 소설이 아님에도 오래걸린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도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 통일이 된다면, 아니 근접한 관계까지 간다면 우리는 이북 사람들과 얼마나 '불편'하지 않게 소통할 수 있겠는가. 불편함의 연습은 뜻하지 않게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주인공 류요섭 목사.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사실 주인공인지 아닌지..ㅋ)이 목사라는 사실은 통쾌한 맛이 없지않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고, 진리는 하나뿐이라고 믿는 고지식한 사람들의 '전형'이지 않은가. 그가 이북으로 가서 체험하고, 경험하고, 듣는 이야기들은..어느덧 그를 순수한 소년의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가... 작가가 미국에 있을 당시에, 그곳에서 만난 실제 인물들의 경험담을 통해서 구성된 것이란 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 말이다. 발가벗기고 철사로 코뚜레를 하고 온 동네를 거니는 일, 강간이 일상이 되고야 만다. '빨갱이'는 물론이고, 십자군 지칭하는 기독청년들이 벌인 이야기다.
'손님'은 한 마디로 통일의 굿판이다. 정치지도자를 뽑고, 1국가 2체제니 하는 어려운 통일이야기 말고, 정말로 우리가 한 마을 사람 되는 그 굿판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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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책을 처음 구입하게된 계기는 책뒤의 설명에서다. 영매술이라든지 귀신이라든지 라는 어구에서 이책을 구입하게 된것이다. 처음에 이책의 도입부는 호러나 공포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굉장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나 나름대로 줄거리를 구상해 보았지만 다읽고 나서는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잠시 동안이도 이 책을 가볍게 본 나를 크게 반성하였다. 정말 가슴이 찡했다. 그리고 용서를 배웠다. 또한 이 책은 그만큼 만만한 책이 아니다. 이 책으로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되었고, 지난 우리의 지난 죄악사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정말 무서운 손님이다..." 이책을 다 본후에 우스개말처럼 내가 중얼거린 어구다. 하지만 마음은 엄숙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사상의 대립... 그속에서 우리는 혼돈하고 서로 상처를 준다. 이 상처에서 난 단순한 남과북, 우리민족에 느낌이 바뀌었다. 이젠 결코 분노가 아니다. 이처럼 큰 죄악도 없겠지만, 세상에 이처럼 미련함도 없을 것이다. 불쌍함과 가여움, 그리고 애환이다. 눈물이 난다. 나도 동생이 있지만 서로 다른 사상속에서 서로를 서로가 상처주고 죽이는 줄도 모르고 나중에 자신의 임종전에 그것을 깨닫는다!!....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불쌍한가! 그렇기에 난 가슴이 아팠다. 찢어질듯 했다. 용서.... 이 책에서 제목이 "손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단어 일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용서했다. 내가 정확이 어느부분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구절이 있었다. "하늘나라는 서로 원망하고 분노도 없는 곳"이라는 구절... 가장 가슴에 남은 구절이었다.그리고 그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우리는 용서할 사람이 없다고... 우리의 윗세대의 대립과 갈등과 죄는 그들으로서 서로가 용서했으니 우리는 달라야 한다고... 그렇다고 내가 아니한 안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게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더이상 과거로 원망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지금 현실속에서의 죄가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이난 전쟁을 편파적 입장에서 다루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려움이라면 사투리다. 서울태생인 나에게는 마치 외국어 읽듯이 힘든 이해과정이있다.(북쪽 사투리이니만큼 누구나 그럴것이다.) 하지만 그냥 읽으면 된다. 그럼 무언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냥 느끼면 되는 책이다. 그리고 가슴이 아프면 아퍼하고 눈물이 나면 눈물을 부정하지 말고 흘려라..... 그럼면 되는 책이다. 마르크스라든지 기독교에 대해서도 알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을 조건이라면 한국인이면 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의 부모가 있고 한국의 조상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가 없다. 내가 이책을 잘 표현했나 모르겠다. 난 지금 굉장히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책의 모든 내용이라든지 느낌을 전부다 표현하지는 못했다. 나의 어휘문제다. 이 뭉클한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 것이며 이 붉어진 눈시울은 어떻게 쓸것인가.... 이런것으로나마 나의 미흡함을 대변할 뿐인다. 꼭.... 읽어 보기를 바란다. 꼭 말이다.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
|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소설에서는 '손님'이라 칭한다. 당시 '손님'이란 마마병으로 무서운병을 칭했던 말인데, 아마 6.25 전후에는 기독교와 맑스주의가 '손님'같은 존재였을것이다. 이 소설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소설은 기독교와 맑스주의에 대한 내용으로 당시 황해도에서 벌어졌던 양민학살의 내용을 주제로 하고있다. 이 사건은 처참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의 비극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런 비극을 제대로 전달을 못하는것 같아 아쉽다. 소설 전개방식도 특이한데, 전개는 양파까듯이 점점 사건에 접근해서 결국엔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데 왠지 이런 전개방식은 추리소설에나 있을법한 방식인데, 솔직히 이런 소설에서는 안 어울리는 방식이다. 또한 주인공이 보이는 환영들은 사건의 당사자들이여서 그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사건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수있지만, 누가 말하지는지도 헷갈리고 이북사투리 또한 알아듣기 힘든 말이 있어 사건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작가가 이 왜 이런방식으로 양민학살사건을 소설에 등장시켰는지 모른다. 이 소설에 나오는 회고적인 방식보다는 그 당시 사건을 1인칭 또는 3인칭으로 전개했으면 더욱 처참하고, 비극적으로 느껴졋을것을 같고, 더욱 가슴에 와닿았을것 같았는데, 작가는 정말 어려운 방식을 고집한것 같다. 또한 책을 읽어보면 기독교와 맑스주의가 왜 격돌하게 됐는지도 자세히 나와있지 않아 독자로서는 혼란스럽고, 작가는 마땅히 기독교와 맑스주의에 대해 그 당시의 이해관계와 6.25 전후의 상황을 설명했어야 한다. 단지 이 소설은 양민학살사건의 전모만 밝히려 들었지 기독교와 맑스주의의 이해관계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나와있지 않아, 나로서는 혼란스러웠다. 황석영이라는 대작가를 보고 작품을 선택했는데, 왠지 비극적이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민족적인 사건을 겉핥기 식으로 알게되어 기분이 씁쓸하고 찝찝하다. 아쉬울따름이다. 황석영님! 다음작품에서는 저를 실망시키지 마십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