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거의 20년 만에 재개봉한 주성치 감독 겸 주연의 〈쿵푸 허슬〉에는 결정적으로 달라진 번역이 눈에 띈다. 〈쿵푸 허슬〉은 악랄한 조직폭력배 도끼파가 평범한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돼지촌을 접수하려 들자, 은둔 고수들이 그곳을 지키기 위해 나선다는 내용이다. 개봉 당시 ‘돼지촌’이라 불렸던 거대 연립주택은 재개봉과 함께 ‘저룡성채’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아마도 홍콩 사람들은 이 이름을 듣지 않고도 다닥다닥 붙은 집마다 장대에 걸린 옷가지와 긴 줄이 늘어선 수돗가를 보자마자 구룡성채를 떠올렸을 것이다. 사라져 가는 옛 홍콩의 향수를 담아 구룡성채(九龍城寨)의 첫 글자를 ‘돼지 저’로 바꾼 저룡성채(豬龍城寨)로 등장시킨 것이다. 최근 구룡성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저룡성채라는 본래 이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장국영이 주연을 맡은 왕가위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아비정전〉의 마지막 신도 구룡성채와 연관이 있다. 낡은 집에서 담배를 입에 문 양조위가 외출을 준비하는 장면은 실제 구룡성채에서 촬영되었다. 1984년 중영공동성명으로 홍콩 반환이 결정되고, 1987년에 구룡성채의 철거가 발표되면서 감독은 촬영을 서둘렀다. 그런데 원래 장국영 주연의 1부와 양조위 주연의 2부로 구상되었던 영화가 1부로 끝나면서 구룡성채가 나오는 장면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왠지 그 또한 구룡성채의 운명처럼 느껴져 비애감을 더한다. 구룡성채야말로 온갖 미완성이 모여 완성된, 설명과 분석 자체가
무의미한 곳이었다.
한국에서 홍콩 누아르 붐을 일으킨 〈영웅본색〉에도 구룡성채가 등장한다. 어느 높은 야산에서 홍콩을 떠나기로 결심한 마크(주윤발)가 피 묻은 안대를 하고 “버리기 아까운 야경이야”라고 말할 때 등장하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은 지금의 첵랍콕 공항이 아닌 카이탁 공항을 배경으로 한다. 그 옆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구룡성채가 내려다보인다. 홍콩을 떠나기로 결심한 마크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곳이 구룡성채와 카이탁 공항이라는 점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아슬아슬한 도심 곡예비행을 볼 수 있었던 카이탁 공항과, 무서운 곳이라고들 하지만 자신이아는 누군가 분명히 살고 있었을 구룡성채는 ‘버리기 아까운’ 홍콩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곽한영 교수의 깊은 노고가 배어든 《구룡성채, 검은 성의 비밀》은 구룡성채의 탄생과 성장부터 우산혁명까지 방대한 홍콩 현대사를 아우르며 그 정체성을 들여다보는 실로 놀라운 책이다. 홍콩의 역사나 대중문화를 잘 아는 사람부터 이제 막 호기심을 가진 사람에 이르기까지, 현지를 답사하며 써 내려간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홍콩’이라는 공간과 사회의 독특한 특성을 이해하게 된다. 나 또한 습관적으로 ‘구룡성채’라 쓰고 있지만, 이 책에서 왜 제목만 빼고 ‘구룡채성’이라고 쓰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구룡성채 그 자체에 집중한 최초의 단독 저서라는 무게감에 값하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책에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물론, 구룡성채 자체를 영화의 무대로 삼은 〈구룡성채: 무법지대〉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이 영화를 만든 정바오루이 감독의 목표는 하나였다. 구룡성채로 들어간 주인공과 그를 잡으려는 삼합회의 위협 뒤편에서 그 공간을 묵묵히 채우고 살아갔던 ‘보통 사람들’을 따뜻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액션 장르이다 보니 무림이나 강호처럼 구룡성채를 묘사하고 있지만, 주성치가 ‘저룡성채’라는 이름으로 이곳을 친숙하게 그려내고자 했던 것처럼, 깊은 그리움의 정서를 담아 구룡성채를 홍콩의 축소판으로 보여 주고자 했다.
그래서 홍콩 영화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구룡성채: 무법지대〉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울컥할 수밖에 없다. 구룡성채, 그곳에는 아침마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에그타르트를 굽고 돼지고기를 삶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과가 끝나면 그들은 함께 TV 앞에 둘러앉아 시간을 보냈다. “홍콩을 향한 나의 변함없는 사랑을 담고 싶었다”라는 〈구룡성채: 무법지대〉 감독의 말처럼,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사랑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구룡성채는 사라졌지만 그곳을 채웠던 삶은 영화와 책 속에, 그리고 이를 보고읽는 이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구룡성채는 그렇게 여전히 살아 있다.